필리핀에서 스페인어의 소멸과정에 관한 고찰
초록
스페인어는 스페인이 필리핀을 정복한 16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 19세기 말까지 국가의 공용어로서 기능했다. 그러나 스페인어는 대다수 국민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배우게 된 모어는 아니었다. 이는 필리핀에서 스페인어가 사라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 외에도 스페인어가 필리핀에서 널리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이유로는 식민지 시절 교육을 담당했던 수사나 성직자들의 스페인어 교육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 본국과의 거리가 너무 멀고, 경제적인 부의 부재로 인해 이민자들의 숫자가 적어 원주민들과 광범위한 혼혈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 너무 늦게 도입된 보통 교육제도 그리고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지리적 특성으로 인한 상호간의 소통부재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스페인어가 사라진 결정적인 요인은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후 필리핀에서 추진한 미국화 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의 대대적인 영어교육으로 인해 스페인어는 그 사용이 급격히 감소하였고, 1987년 헌법에서는 공용어의 지위를 상실했다. 현재 필리핀에서 스페인어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어떠한 기능도 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일부 상류층에서 사용되는 과거 식민지 시대의 유산 정도로 간주되고 있다.
Abstract
This article attempts to describe processes that are underlying the disappearance of the Spanish language in the Philippines. The main causes of the displacement of this language are presented here in a historical overview of the situation of the Spanish language in relation with indigenous languages and with English. During the colonial rule, Spanish was the language of education, trade, politics and religion. By the 19th century, it became the country’s primary language although it was used by the educated people. As a result of Spanish-American war, the English language began to be promoted instead of Spanish, and the use of Spanish declined promptly. Spanish lost its official status in 1987. Nowadays Spanish is regarded either as a language of the elite among the Filipinos of Spanish descent or as a legacy of the past that no longer exists.
Keywords:
Spanish, Philippines Spanish, Language Displacement, Language Shift, Philippines키워드:
스페인어, 필리핀 스페인어, 필리핀, 언어소멸, 스페인Ⅰ. 들어가면서
1571년 마닐라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작된 스페인의 필리핀에 대한 식민지배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해인 1898년까지 계속되었다. 스페인은 식민통치 3세기 반 동안에 필리핀 사람들의 삶에 상당히 많은 흔적을 남겼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가장 뿌리 깊게 끼친 영향중의 하나는 가톨릭의 전파이다. 지금까지도 남부지역인 민다나오(Mindanao)와 술루(Zulu)를 제외하고 대부분 지역의 필리핀인들의 종교는 가톨릭이다. 또 다른 영향은 정복자들이 가져온 언어인 스페인어와 관련된 것이다. 필리핀 원주민어의 대부분은 어휘, 발음, 문자에 있어서 스페인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정복과 함께 필리핀에 들어온 스페인어는 당시의 모든 원주민어 위에 군림하면서, 식민지 기간 내내 행정, 사법, 교회, 교육, 경제 등 모든 공적 영역에서 공용어로서 기능했다. 1899년 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탄생한 제 1공화국에서도 스페인어는 국가의 공용어로 채택되었으며, 미국과의 전쟁 기간 중에는 반미주의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점령과 함께 들어온 영어의 위세에 밀려 교육, 행정과 같은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스페인어는 그 세가 급격히 약화되어 1973년에는 헌법상 공용어의 지위를 잃게 되면서 모든 공식문서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 스페인어는 350년 동안 원주민어와의 공존의 역사로 인해 타갈로어(tagalo)와 같은 현지 토착어에 많은 흔적을 남겼으며, 현재 50만정도의 인구가 스페인어를 기반으로 하는 혼성어인 차바카노(chabacano)를 사용하고 있다(Quilis y Casado 2008). 2014년 1월 7일자 영국 BBC 방송 인터넷 판은 필리핀인의 언어생활에 끼친 스페인어의 영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보도를 했다.
No hace falta viajar hasta las zonas más meridionales de Filipinas para escuchar el castellano, en sus variaciones filipinas.
En la ciudad más grande del país, Manila, la gente le saludará con un amable “kumustá”, fonéticamente similar al ‘¿cómo está?’.
Si después de darse una “dutsa” (ducha) en su “otel” (hotel), quiere ir a cenar, basta con que pregunte por una “bodega” (bodega) en el “baryo” (barrio). Una vez sepa el nombre de la “kalye” (calle), móntese en su “kotse” (coche) o su “bisikleta” (bicicleta) y prepárese para una buena noche.
Quizá quiera vestir “amerikana” (chaqueta americana), “panyolito” (pañuelo) o “sapatos” (zapatos) de “takong” (tacón) si el restaurante es de “luho” (lujo), aunque si viaja con un presupuesto más ajustado no le será difícil encontrar sitios “barat” (baratos).
Una vez sentado a “lamesa” (la mesa), descubrirá que en “Pilipinas” (Filipinas) no utilizan palillos para comer, sino “kutsilyo” (cuchillo), “tinidor” (tenedor) y “kutsara” (cuchara). Escoger comida resultará muy sencillo, ya que muchos de los platos le sonarán familiares: “carne”, “kaldereta”, “adobo”, “guisado”, “ajillo”, “cabra”, “bistek”... Si la humedad tropical le ha dejado acalorado, pida “yelo” (hielo) con su bebida. Vigile los “gastos” (gastos), pero antes de marcharse no se olvide de pedir la “kwentahin” (cuenta).
스페인의 식민지 역사를 살펴보면 정복자들과 함께 이식된 스페인어가 식민통치를 위한 공용어로서 기능을 하고, 독립 후에도 본국과의 정치적 단절과 관계없이 독립국가의 공용어로 채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필리핀도 독립 직후에 탄생한 제 1공화국에서는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제정하고, 헌법과 국가(national anthem)도 스페인어로 만드는 등 다른 스페인 식민지들과 동일한 수순을 밟았다. 그러나 독립 후 5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필리핀에서는 다른 스페인 식민지들과는 달리 스페인어가 공용어 지위를 상실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 결과 현재 필리핀에서 스페인어는 모든 공적인 영역에서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고 일부 상류층에서 사용되는 과거 식민지 시대의 유산 정도로 간주되고 있다.
거의 350년 동안 필리핀에서 행정, 사법, 교육 등 모든 공적인 영역에서 공용어로 그리고 문학적인 전통을 가진 언어로 기능한 스페인어가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우선,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언어정책과 함께 스페인이 물러난 직후의 사회언어 상황, 미국 통치기간 동안 시행된 언어정책을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실시된 스페인어 관련 언어정책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언어정책
스페인 정복자들이 필리핀에 도착했을 때 발견한 것은 이곳에 말레이-폴리네시아어족에 속하는 다양한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필리핀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원주민 언어의 정확한 숫자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펠런(1955, 153)에 따르면 루손 섬에만 6개의 주요 언어와 많은 수의 소수언어 그리고 다양한 방언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1591년 현재 이들 6개 주요 언어를 사용한 인구수를 보면 타갈로어 124,000명, 일로카노어 75,000명, 비콜어 77,000명, 팡가시난어 75,000명, 팜팡가어 75,000명, 이바낙어 96,000명이다. 이러한 필리핀의 언어적 다양성은 향후 스페인이 시행할 선교사업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필리핀의 언어적 다양성으로 인해 필리핀의 식민통치를 시작한 스페인이 처음에 해결해야 했던 문제는 행정과 선교에 있어서 어떤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행정에 있어서는 식민자의 언어인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채택되었지만 선교에 있어서는 스페인어와 원주민어 중 어느 것을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초기부터 많은 논쟁이 있었다.
식민 초기부터 스페인은 중남미의 다른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필리핀에 스페인어를 보급하려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시행한 언어정책은 다른 중남미 식민지들과는 다른 결과를 나타냈다. 이는 당시 필리핀이 처한 현실이 중남미 식민지들과는 매우 달랐으나 필리핀 실정에 맞는 정책이 부재했기 때문이다(Donoso Jiménez 2012).
당시 필리핀에서의 스페인어 상황은 매우 불안정했다. 이는 중남미와는 달리 금이나 은과 같은 광물자원이 부재한 필리핀에 정착하기를 원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많지 않아 원주민과의 혼혈이 소규모로 이루어졌고,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스페인화가 느리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던 성직자나 선교사들만이 필리핀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필리핀에서 부딪힌 최초의 문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복음을 전파하는 데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교사들은 중남미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페인어 대신에 원주민어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는 일반 원주민들에게 어려운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자신들이 원주민어를 배워 원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식민지 시대의 필리핀 성직자들은 왕실과 원주민을 연결하는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어서, 스페인 식민자들로부터 원주민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원주민에 대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Caudmont 2009). 이는 후일 스페인어가 필리핀에 널리 보급되지 못한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로 작용한다.
식민지 시대의 다언어적 상황에서 스페인어 교육과 관련하여 스페인이 시행한 언어정책은 일관성이 없이 진행되었고 상호 모순되는 경우도 있었다. 카를로스 5세는 1536년에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ña, 현 멕시코)1)부왕에게 내린 칙령에서 복음 전파를 위해 원주민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성직자들과 선교사들이 원주민어를 배우는 데 전념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1596년에 식민지부(Consejo de Indias)가 펠리페 2세에게 식민지의 언어문제 해결을 건의했을 때 국왕은 칙령을 통해 원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언어를 포기하도록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며, 자발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원주민들에게만 스페인어를 가르칠 것을 지시했다(Franco 2000).
스페인 식민지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가톨릭을 전파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고 정교하게 성경 말씀을 전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논쟁을 했다. 중남미 식민 초기에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것이 원주민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가톨릭 교리를 보다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실제 복음전파 과정에서는 원주민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Bernabe 1987, 10).
필리핀에 도착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누에바 에스파냐 출신들이어서 당시 중남미에서 원주민어로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당시 중남미나 필리핀 모두 선교사들이 원주민어 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필리핀에서도 원주민어에 정통한 수사나 신부들이 출현했다. 이렇게 해서 1593년에는 필리핀에서 최초로 스페인어와 타갈로어로 된 교리서가 편찬되었다(Caudmont 2009, 114).
선교사들이 가톨릭 교리서를 원주민어로 번역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가톨릭의 주요 개념들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스페인어의 ‘Dios’(신), ‘espíritu santo’(성신), ‘iglesia’(교회), ‘Jesucristo’(예수), ‘cruz’(십자가)와 같은 중요한 개념들을 원주민어로 번역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어휘에 해당하는 원주민어 어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이 단어들이 전달하는 개념의 순수성을 유지할 목적으로 선교사들은 이러한 어휘들은 번역하지 않고 스페인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베르나베(1987, 10)에 따르면 이러한 결정이 필리핀에서 시행한 첫 번째 언어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시대의 언어정책은 본국에서 입안해서 국왕의 칙령 형태로 식민정부에 하달을 하면 식민지에서는 이를 받아 시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본국에서 내려오는 정책은 구체적이지 못하고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인 경향이 강했다. 또한 특정 지역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식민지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중남미와 상황이 다른 필리핀의 경우에는 시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Donoso Jiménez 2012, 243).
식민정부는 왕의 칙령에 입각해서 정책을 시행해야만 했으나 식민지가 처한 여건에 따라서 칙령을 변경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필리핀의 경우에 18세기에 내려온 칙령에 따르면 모든 공직에 임용되기 위해서는 스페인어 구사능력이 의무적이었으나 스페인어 구사자가 많지 않았던 필리핀의 상황을 감안하여 스페인어 구사자 우대로 임용조건이 바뀌었다.
본국정부는 언어정책 관련해서 많은 칙령을 식민지에 내려 보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칙령들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중남미 경험을 통해서 선교를 위해서는 원주민어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사나 신부들에게 원주민어를 배우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수사나 신부들이 원주민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라는 것이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식민지의 산업이 발전하고 행정체계가 복잡해짐에 따라 보편적인 스페인어 지식을 가진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왕실의 공식적인 언어정책의 목표는 식민초기부터 식민지에서 스페인어를 지속적으로 보급하는 것이었다. 1596년 펠리페 2세는 칙령을 통해 식민지의 성직자들이 원주민어를 배우는 것이 선교에 부적합하므로 이들이 원주민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 칙령은 필리핀 정복 후에 전달된 것으로 본국정부가 선교를 위해 원주민어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을지라도 스페인어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베르나베(1987, 10)는 식민 초기에는 스페인 왕실이 원주민의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원주민어를 통한 가톨릭 교리의 전파를 장려했으나 16세기에 오면 입장을 바꿔 스페인어 교육을 강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1634년에는 펠리페 4세가 식민지의 모든 원주민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칠 것을 명하는 칙령을 공포했다. 이전의 칙령들이 자발적으로 배우겠다는 원주민들에게만 스페인어를 가르치라고 한 것에 반해 이 칙령에서는 모든 원주민들에게 의무적으로 가르칠 것을 지시하고 있다(Caudmont 2009, 114).
1686년에 카를로스 2세는 이전의 칙령들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고 질책을 하면서 이제부터는 칙령을 준수하지 않을 시 처벌을 하겠다고 명했다. 이 칙령에서는 처음으로 스페인어의 교육 목적이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식민지 주민들이 당국에 직접 스페인어로 불만을 제기하기 위해 배울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당시까지는 주민들이 식민정부에 민원을 제기하기 위해 성직자들의 통역을 필요로 했지만 이제부터는 통역 없이도 당국과 직접 소통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칙령에 대해 성직자들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Donoso Jiménez 2012, 247).
1792년에 카를로스 4세도 비슷한 칙령을 공포했다. 이 칙령은 원주민들이 스페인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모든 원주민 마을에 스페인어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으로 학교에서 원주민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또한 스페인어 교육을 위한 재원 및 전문 교사들의 확보 방안을 제시하고 있어 현대적 의미의 언어정책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수도원, 수녀원 그리고 사법기관과 가정에서 스페인어 외에 다른 언어의 사용을 금하고 있다(Caudmont 2009, 115).
지금까지 본 것처럼 스페인 본국에서는 많은 칙령들을 공포했는데 그 내용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변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칙령의 내용이 성직자들이 원주민어를 배우고 원주민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칠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단계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첫 번째 목적이 가톨릭의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다 많은 부속도서들이 스페인 통치 하에 들어오게 된다. 이와 함께 성직자들에게 보다 다양한 원주민어의 교육이 필요하게 되어 언어교육이 복잡해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공용어인 스페인어 교육의 필요성이 점점 더 커졌다.
본국정부가 공포한 칙령을 준수하기 위해 식민정부는 언어정책과 관련된 몇 개의 법률을 공표했다. 칙령들과 비교하면 보다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었으나 성직자들이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768년 필리핀 호세 라몬 솔리스(José Ramón Solís) 총독이 공포한 법령에서는 원주민들에게 스페인어 교육을 위해 지금까지 금지한 스페인사람들의 원주민 마을 거주를 허용했다. 성직자들은 원주민 마을에 들어온 스페인 사람들을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이 법령으로 인해 소수이긴 하지만 스페인사람들이 원주민들과 함께 마을에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법령에서는 학교의 설립을 명하고 학교에서는 스페인어 외에 다른 언어의 사용을 금지했으며 스페인어 학습의 동기유발을 위해 공직은 스페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용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관료체계가 발전됨에 따라 스페인어를 할 수 있는 원주민 출신의 하급관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Donoso Jiménez 2013, 247).
솔리스 총독이 공포한 94개의 법령 가운데 법령 25호는 스페인어 교육과 재원조달에 관한 것이다. 이 법령에서는 원주민들이 가톨릭 교리를 보다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원주민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칠 자질이 충분한 교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서는 교사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재원의 부족으로 자질이 있는 교사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Donoso Jiménez 2013, 248).
19세기에 들어서면 스페인어 교육이 보다 강화되어 1815년에는 국왕의 칙령으로 다시 한 번 식민지 전역의 초등학교에서 스페인어 교육이 의무화된다. 그러나 18세기와 마찬가지로 재원과 교사의 부족, 교수법의 문제 등으로 스페인어는 대다수의 필리핀 사람들에게 보급되지 못했다(Muntenau 2006). 당시 왕의 칙령에서도 식민지에서 언어정책을 시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원조달 방법이나 교원 수급 문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보편적인 스페인어 교육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또한 필리핀 현실과는 동떨어진 정책을 실시하라고 지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18세기에 스페인 왕실은 식민지 전역에서 스페인어를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식민지 관리로 채용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데, 당시 필리핀에서는 스페인어 구사자가 부족한 관계로 이 정책을 시행 할 수 없었다(Donoso Jiménez 2012, 251).
교육에서 스페인어 사용이 보편화된 것은 중남미 및 필리핀을 포함한 식민지 국민들에게 무상 의무교육을 규정한 이사벨 여왕의 칙령이 나온 1863년부터이다. 이 교육칙령은 필리핀 교육체계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에 앞서 1839년에 필리핀에서 초등교육체계 확립을 위한 일련의 규정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교육에서 사용할 언어를 스페인어로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언어로 할 것인지에 대한 지난한 토론이 있었다. 이 토론에서 한 성직자는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면 필리핀사람들이 공통적인 언어를 갖게 되어 결국 스페인 식민 통치에 저항할 것이라는 논리로 스페인어 교육에 반대했다(Bernabe 1987, 15).2) 이에 대한 반대 논리를 편 사람은 18세기 말 성직자들의 스페인어 교육 반대 실상을 조사하기 위해 필리핀에 파견된 에스코수라(Escosura)이다. 그는 필리핀이 미개한 상태를 벗어나 문명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서구문명의 언어인 스페인어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국립교원양성소 및 교육언어로서 스페인어의 의무화와 같은 스페인어를 확산하기 위한 일련의 대책을 제시했다(Fernández 2013, 366).
결국 이 위원회는 스페인어가 초등학교에서 교육언어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최종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이 1863년 교육칙령의 토대가 되었다. 1863년 교육칙령에서는 모든 도시에 초등학교가 설립되어야 하고 6세에서 12세까지의 소년과 소녀들에게 초등교육이 의무적으로 실시되어야 하며 수업료는 무료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교육칙령은 스페인어가 교육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스페인어 해득이 교육과정의 주된 목표가 되었다. 이를 위해 칙령이 공포된 지 5년이 지나서도 스페인어를 말하고, 읽고, 쓰지 못하는 원주민들은 봉급을 받는 정부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없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스페인어를 배워야 하는 가장 큰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었다(Donoso Jiménez 2012, 249).
이러한 교육의 결과 19세기 말에 가면 비록 수준은 다를지라도 수도인 마닐라 인구의 50%가 스페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Rodriguez-Ponga 2003, 47). 또한 당시에 스페인어로 대학교육을 받은 지식인 계층인 계몽주의자들이 출현했다. 이들은 당시 유럽의 사조와 사상을 접한 깨어 있는, 필리핀의 자치와 독립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정치적 신념을 가진 계층이었다.
1865년에서 1898년 사이에 활동한 이 세대는 선전운동을 주도했고 1880년부터는 민족주의적이고 반식민지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이 선전운동을 하면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언어가 스페인어라는 것이다. 또한 이들이 15일에 한 번씩 발행한 신문인 솔리다리닷(Solidaridad)은 창간호부터 필리핀에서 스페인어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이들은 언론, 홍보자료, 서적의 출간과 스페인 정부관료 및 지식인들과 맺은 인맥을 통해 스페인에 필리핀이 처한 상황을 알렸고, 필리핀에서도 스페인에서와 같은 스페인어가 사용된다는 것을 인식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산토 토마스대학(Santo Tomás)에서 이수한 학점들도 스페인 대학에서 그대로 인정을 받아 이 대학 졸업생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스페인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필리핀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 경제, 역사, 문학의 주제를 스페인어로 발표한 일단의 작가들이 탄생했다. 호세 리살(José Rizal), 마르셀로 필라르(Mercelo Pilar), 호세 마라이 팡가니반(José María Panganiban), 그라시아노 로페스 하에나(Graciano López Jaena), 마리아노 폰세(Mariano Ponce) 등이 이 세대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이들은 모두 스페인계 후손이 아니라 원주민 출신들로 스페인어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 중 호세 리살은 필리핀에서 시와 소설의 선구자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이끌어 낸 필리핀 혁명에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다. 따라서 필리핀 혁명운동을 추동한 국가 의식은 스페인어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Fernández 2013).
당시 필리핀 계몽주의자들은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을지라도 반 스페인주의를 기치로 내건 것은 아니었고, 식민정부의 부패와 독재에 대해 저항하면서 정교분리, 자유, 평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언어적인 면에서는 다른 중남미 식민지들과 마찬가지로 정복자의 언어인 스페인어에 대해 별다른 반감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독립혁명 과정이나 당시의 모든 문서들이 스페인어로 작성되었고 혁명가들의 의식에도 스페인의 관습과 문화가 많이 녹아 있었다.
계몽주의자들 역시 필리핀이 당시 유럽과 같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문명의 언어인 스페인어를 교육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 19세기 말에는 독립과 함께 원주민어를 공용어로 해야 한다는 의식은 거의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비록 스페인 왕실과 교회의 정치적인 계획과 야심은 실패했을지 몰라도 스페인의 언어와 문화는 토착적인 것과 섞여 사회에 깊숙이 들어와 필리핀 사람들의 정체성의 일부를 형성했다(Sueiro 2002).
그러나 현지에서의 스페인어 교육을 명하는 왕실의 칙령을 무시한 성직자들의 소극적인 태도, 원주민들의 스페인어를 배우고자 하는 동기 부족, 교사 및 재원의 부족, 다양한 원주민어로 인한 상호간의 소통 부족 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스페인 이민자 수와 같은 요인들로 인해 거대한 도서국가인 필리핀에서 스페인어가 널리 확산되지 못했고 그 결과 식민지 기간 동안 필리핀에서 스페인어를 제 1언어로 사용한 인구는 전체 인구의 3%를 넘지 못했다(Sánchez-Jiménez 2014).
그러나 3세기 반에 걸친 스페인의 식민 통치는 필리핀 사회에 스페인적인 특성들을 남겼다. 이러한 특성들은 종교, 지명, 인명, 음악, 음식, 춤 등에서 나타나며 이로 인해 미국이 통치한 1940년대까지도 스페인어와 문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Ⅲ. 필리핀 혁명과 미국-필리핀 전쟁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함에 따라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 영토에 대한 주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1896년부터 스페인과 독립투쟁을 하고 있던 아기날도(Aguinaldo)가 이끄는 필리핀 독립군은 필리핀 영토를 미국에 넘기기 위한 비준안이 미국 의회에서 논의되는 동안에 필리핀 북쪽의 마놀로스(Manolos)에서 독립을 선포하고 필리핀 최초의 공화국 헌법을 선포했다. 그리고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헌법과 국가(national anthem)를 스페인어로 제정했다. 당시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채택된 것은 우선, 많은 원주민어 중에 우월적인 지위를 가진 언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스페인어로 교육을 받은 소위 말하는 계몽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들의 생각에는 스페인어 외에 공용어로서 생각하고 있는 언어는 없었다(Sueiro 2002).
한편 미국은 필리핀 독립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국제적인 승인을 받으려는 모든 노력을 봉쇄하면서 필리핀에서 스페인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제거한 후 필리핀 독립정부에 대한 와해작전에 들어간다. 이렇듯 미국이 당초 약속했던 필리핀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자, 필리핀 사람들은 자신의 국가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기도에 맞서 1899년에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필리핀은 이 전쟁에서 패하며 또 다시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다. 당시 필리핀은 근대 국가로서 갖춰야 할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인 자원들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함에 따라 19세기 말 독립투쟁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국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미국-필리핀 전쟁의 결과는 당시 필리핀의 국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던 스페인어의 운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Caudmont 2009).
스페인으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한 후에도 스페인화 과정이 계속된 중남미와는 달리 필리핀에서는 미국의 점령으로 인해 미국화가 진행되었다3). 이러한 차이로 인해 중남미에서는 스페인어가 일반 사람들이 널리 사용하는 공용어가 될 수 있었던 반면에 필리핀에서는 공용어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했던 19세기 말 상황과 중남미에서도 스페인 출신자들이 소수이고 원주민들의 수가 절대 다수였던 볼리비아, 과테말라, 파라과이의 독립 당시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스페인화 정도에 있어서 필리핀과 이들 국가들과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필리핀이 미국에 점령되기 전의 상황을 보면 수도인 마닐라에 산토 토마스대학, 중등학교, 언론, 신학교 등 스페인화를 상징하는 많은 교육기관들이 존재했고, 스페인어 역시 전국의 공용어로 기능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Fernández 2013).
중남미 식민지에서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독립을 했을지 몰라도 문화적인 면, 특히 언어는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독립 후에도 스페인화가 중단 없이 지속되었다. 반면에 필리핀에서는 미국의 미국화정책으로 인해 탈스페인화 과정이 체계적이고 의식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로 인해 필리핀에서 스페인화 과정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그 결과 스페인어는 영어의 위세에 눌려 필리핀의 공용어가 될 가능성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이다.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함에 따라 필리핀과 함께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도 미국의 점령 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같은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의 경우에는 계속해서 스페인어가 유지되었으나 이들 국가보다 스페인화가 더디게 진행된 필리핀의 경우에는 이들 국가와는 전혀 다른 언어상황이 전개된다. 쿠바는 권력이 쿠바인에게 이양되어 스페인어가 유지될 수 있었고, 필리핀과 함께 미국의 식민지가 된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스페인어가 영어에 밀리는 상황이 될 뻔 했으나 푸에르토리코인들의 강력한 저항 덕분에 스페인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Quilis y Casado 2008).
그러나 필리핀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필리핀 영토가 미국에 점령당한 것처럼 스페인어도 영어에 점령을 당한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자마자 당시 필리핀의 공용어인 스페인어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영어의 사용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당시 계몽주의자들은 필리핀이 후진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발전의 길로 나가기 위해서는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스페인은 필리핀 사람들에게 이런 공용어를 갖도록 하는 데 실패했다. 이제 미국이 필리핀 계몽주의자들의 논리를 이용해서 영어를 필리핀 사람들의 공용어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Ⅳ. 미국 식민통치 기간의 언어정책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넘겨받은 미국은 통치 초기부터 스페인 식민통치의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 대대적인 반 스페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세는 가장 눈에 띠고 구체적인 문화유산인 스페인어를 시작으로 해서 문화, 건축, 행정과 같은 다른 분야로 확대되었다.
우선 미국은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들과 군인들을 필리핀에 대규모로 배치했다4). 이렇게 파견된 사람들 중 대표적인 것이 그들을 필리핀으로 싣고 온 선박 이름을 따라서 부른 500명의 토마스호 파견대(Thomasites)이다. 미국은 영어교육을 위해 이미 스페인이 1860년부터 구축해 놓은 공교육의 인프라를 활용했고 새로운 학교를 짓는 데 많은 투자를 했다. 또한 당시까지 각 급 학교의 교육에서 사용했던 언어인 스페인어는 영어로 대체되었고, 1920년대에 가면 모든 공립학교에서 스페인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언어정책을 통해 미국은 필리핀에서 스페인의 흔적을 지우고자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을 낙후와 부패로 점철된 시기로 규정하고, 미국의 통치는 필리핀의 민주주의와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선전했다. 또한 미국은 스페인 식민통치에 대한 검은 전설(black legend)의 유포를 통해 필리핀에 남아 있는 스페인적인 요소들을 끊임없이 제거하면서 이 나라에서 전개하고 있었던 탈스페인화 정책을 정당화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필리핀에서 스페인어를 말살하는 데 많은 비용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Montoya 2003).
미국이 점령한지 10년이 채 되지 않아 영어의 위상은 급격하게 높아졌다. 1914년에 가면 필리핀 전역에 영어 교육을 위한 자격증을 갖춘 교사가 8,000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스페인어는 필리핀 사회에서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윌슨 대통령이 영어교육 현장 실사단으로 필리핀에 파견한 헨리 존스의 보고서(1916, 213-14)에 따르면 당시 학교에서 시행하는 영어교육과 관련된 통계자료를 보면 필리핀에서 영어가 다른 언어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도처에서 비즈니스와 사교 언어로 스페인어가 사용되었고, 누구나 서비스를 빨리 받기 위해서는 영어보다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미국 정부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려는 계획이 성공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Fernández 2013, 369).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필리핀 식민통치와 함께 영어가 새로운 문명의 언어로서 부상하기 시작했고 많은 필리핀 엘리트들은 정치 및 경제 분야에서 재빨리 미국 쪽에 줄을 서게 된다. 일부 지식인들은 필리핀이 종국에는 미국의 새로운 주가 될 수도 있다는 환상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필리핀 엘리트 계층은 필리핀의 미국화에 대해 강력한 저항을 전개했다. 이들은 스페인 문화에 동화된 사람들로 문화의 언어로서 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생활에서도 스페인어를 사용했으며 스페인어 신문을 구독했다. 1903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스페인어 신문의 수가 영어 신문의 2배에 달했다. 당시 영어 신문의 구독자는 주로 미국인에 한정되어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계몽주의자들의 모든 글은 스페인어로 발표되었다(Bernabe 1987, 24-26).
이렇듯 미국이 시행한 탈스페인화 정책은 초기에 만만치 않은 저항에 부딪힌다. 대표적인 것이 산토 토마스대학과 같은 교육기관의 저항인데 이 대학에서는 일반 스페인어 강좌를 1970년대까지 유지했다. 또한 필리핀 스페인어 한림원의 창설과 같은 문화기관들의 설립을 통한 저항도 있었다. 그리고 사법체계에서도 계속해서 스페인어가 사용되었으며, 공용어로서 스페인어의 사용중지 계획이 여러 차례 연기되어 결국은 1940년대까지 계속 공용어로 사용되었다(Villarroel 2014).
스페인어 및 문화에 대한 파괴활동과 병행해서 영어 및 미국문화의 이식이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1930년경에는 영어로 제작된 영화만 상영이 허가되었으며 스페인어로 제작된 것은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영이 금지되었다(Fernández 2013, 377).
스페인어 및 문화의 말살은 제도적인 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스페인어 사용자에 대한 물리적인 공격에서도 나타났다. 필리핀 역사에서 스페인어 사용자와 관련해서 두 번의 대량학살이 이루어졌다. 하나는 미국-필리핀 전쟁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이다. 고메스(2008)에 따르면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인구의 1/7이 실종되었는데 이 중 대부분이 스페인어 사용자였다. 이들은 필리핀 독립투쟁에서 스페인에 대항하여 싸운 사람들이고 필리핀 사회에 민주, 자유, 평등을 전파한 사람들이다. 이런 스페인어 사용자들에 대한 의도적인 공격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을 포위하면서 벌여진 2차 학살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군은 석조건물, 성당과 같은 스페인 유산이 있었던 인트라무로스(Intramuros)나 에르미타(Ermita) 지역의 사적지로 피신을 했다. 이들을 향한 미국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이 지역은 폐허로 변했다. 이는 스페인어와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두 번째 의도적인 공격으로 필리핀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대표적인 거주지인 이 두 지역을 파괴함으로써 대표적인 스페인 문화유산을 말살시키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공격으로 10만 명 이상의 스페인어 사용자들이 사망해 스페인어 인구가 1/10로 줄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 폭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해외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야 했다. 이로 인해 필리핀의 스페인어 사용 인구는 급감하게 되었다(Sueiro 2002).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할 때만해도 필리핀 사람들은 일본이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키는 것으로 믿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이 또 다른 제국주의적 야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이 일본을 무찌르고 필리핀을 해방시키자 필리핀 사람들 사이에서 친미주의적 성향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또한 미국의 점령에 반대해서 반미주의 감정을 가졌던 스페인계 이민사회에서조차도 미국에 대해 해방자로서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필리핀에서 스페인적인 것의 종언과 함께 필리핀 사회가 가졌던 스페인과 그 문화에 대한 친근감의 결정적인 쇠퇴를 의미했다(Montoya 2003).
한편 미국은 당시 프랑코가 통치하는 스페인 정부가 독일과 일본의 지지를 구실로 언론을 이용하여 스페인이 필리핀을 재정복하려는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고 선전했다. 이러한 사실은 필리핀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이 필리핀에 남긴 유산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데도 일조를 했다.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반미적인 것은 반민주적인 것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다(Zapico 2016).
당시 미국은 필리핀 사회를 미국화시키고 영어를 보급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기숙학교 시스템을 도입하여 필리핀 젊은이들을 미국의 대학에 보내 교사, 엔지니어, 의사, 변호사로 양성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미래의 전문직 종사자들을 양성함으로써 미국의 언어와 문화로 무장된 엘리트 계층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어로 교육 받은 신세대의 지도자들이 출현했다. 마누엘 로하스는 필리핀대학에서 영어로 교육받은 최초의 대통령이었다(Rodao 1996).
미국 식민통치 하의 필리핀에서 사회적으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영어의 습득이 필수 요건이 되었다. 따라서 스페인어는 영어로 급격하게 대체되기 시작한다. 이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영어가 필리핀 사람들에게 좋은 직업을 구하는 데 유리했고, 당시의 필리핀 사람들이 갖는 스페인어에 대한 이미지는 전통, 무기력, 착취, 저발전과 같은 것인 반면에 영어는 과학, 진보, 사회·경제적 발전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Fernández 2013).
미국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에 나타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보다 미국이 점령한 20세기 초에 스페인어로 출간된 작품들이 더 많이 나왔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의 통치 하에서 보다 많은 언론의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필리핀의 사회, 문화, 종교적 전통과 양립하기 어려운 미국문화에 대한 지식인층의 반감의 표출로도 볼 수 있다(Villaroel 2014, 30). 당시 스페인어는 중산층까지 확산될 수는 없었을지라도, 스페인어로 발표된 문학은 많은 수의 필리핀 젊은 시인, 수필가, 언론인들 덕분에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 유명한 시인으로는 페르난도 마리아 게레로(Fernando María Guerrero), 세실리오 아포스톨(Cecilio Apóstol), 호세 팔마(José Palma) 등이 나왔고, 수필가로는 페드로 파테르노(Pedro Paterno), 에피파니오 델 로스 산토스(Epifanio de los Santos), 하이메 델라 베이라(Jaime de Veyra) 등이 활동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일련의 스페인어 신문과 잡지가 발행되었는데, 엘 레나시미엔토(El Renacimiento), 엘 메르칸틸(El Mercantil), 엘 코메르시오(El Comercio), 라 방과르디아(La Vanguardia), 라 데펜사(La Defensa), 엑셀시오르(Excelsior) 등은 상당한 독자수와 영향력을 보유했으며 이 중 일부는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까지 발행되었다.
미국의 통치기간 동안에도 스페인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지역은 스페인 거주지역이다. 그리고 외국인 거주 지역에서도 당시의 상류층의 언어였던 스페인어가 사용되었다. 특히 중국인 혼혈인들 사이에서도 스페인어가 쓰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비즈니스에서 이 언어가 공통어5)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레바논인, 시리아인 등과 같은 외국인들도 스페인어를 사용했다(Rodao 1996, 165).
미국의 식민통치 말기까지 스페인어가 영어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던 기관은 사법부와 가톨릭교회이다. 스페인 법체계를 물려받은 필리핀에서는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스페인어가 필수였다. 또한 입법부와 법원은 모든 문서를 스페인어로 작성했으며 영어로 된 번역본을 첨부했다. 당시에는 스페인어를 못하는 법률가보다는 영어를 못하는 법률가가 훨씬 찾기 쉬웠다. 마닐라를 제외한 작은 도시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를 위해 지도층들이 스페인어를 영어만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Rodao 1996, 165).
당시 행정에서도 스페인어가 광범위하게 시용되었다. 이는 행정부처에 스페인 혼혈인들이 많이 근무했기 때문이다. 또한 스페인 사람, 혼혈인, 중국인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비즈니스에서도 영어와 함께 스페인어가 공통어로 사용되었다. 미국 통치시기에 스페인어는 지식인층의 공통어로서 기능했으며 식민지 언어였음에도 미국의 식민지에 반대하는 반식민지투쟁의 언어로도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페인어는 계속해서 주변부의 언어로 밀려났다. 그 이유는 우선 스페인어가 민중의 언어가 아닌 엘리트 계층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도시지역이나 엘리트 계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미국의 영어 도입으로 스페인어의 위상이 약화되고 급격하게 무게중심이 영어로 이동함에 따라 필리핀의 스페인어문학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스페인어의 소멸과정은 당시 발행되었던 스페인어 신문에도 나타난다. 제 2차 세계대전 전에는 스페인어 신문이 80,000부가 발행되었으나 전후에는 10,000부로 발행부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Rodao 1996, 169). 또한 1920년 소벨(Zobel)에 의해 만들어진 권위 있는 스페인어 문학상인 소벨상도 1942년에 중단되었다가 다시 1952년에 재개되는 등 문학작품들이 들어오지 않아 불규칙한 행보를 보였다.
필리핀의 탈스페인화는 프랑코가 통치하는 스페인의 국제적 고립, 스페인 문화유산의 소멸, 과거 가치에 함몰되어 있었던 스페인의 낙후성 그리고 미국의 스페인에 대한 부정적인 선전 등으로 인해 촉진되었다. 또한 그 당시에 필리핀 과두지배계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스페인적인 것과 스페인어가 가졌던 부정적인 인식 또한 194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탈스페인화에 일조를 했다. 이로 인해 미국이 도입한 영어로 교육을 받은 필리핀의 젊은이들이 스페인어 사용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다. 그 이후로 필리핀에서 스페인어는 사회의 하위 계층과 차별화를 위해 사용되는 필리핀의 상류층을 상징하는 언어가 되었다(Montoya 2003).
또한 당시에 스페인어의 영향력 감소에 큰 영향을 준 것 중의 하나는 장차 국어로 스페인어를 대신할 토착어를 채택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영어나 스페인어 말고 다른 원주민어를 국어로 채택하는 문제는 미국의 통치기간인 1920년대에 와서야 제기된다. 이러한 인식은 마닐라를 벗어나자마자 영어나 스페인어가 통하지 않아 연설하는 데 통역이 필요하다고 한 케손 대통령의 불평에서 잘 드러난다. 그래서 1935년에 미국이 약속한 독립을 이행하기 위해 만든 1937년 헌법에서 필리핀 국어 조항을 신설하고 국어를 타갈로어에 기반을 둔 원주민어로 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이외에도 필리핀에서 스페인어가 영어로 대체되는 중요한 이유는 1907년에서 1946년 사이에 있었던 정치 지도자들의 세대교체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20세기 초에는 스페인어로 교육을 받는 지도자들이 정치 일선에 나섰으나 1930년대부터는 미국화 정책의 수혜자들인 미국 기숙학교 출신들이 정치 지도자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따라서 사회 각 부문에 있어서 영어의 사용이 급격하게 확대된다.
Ⅴ. 독립 이후의 언어정책
필리핀은 1946년에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독립 국가가 되었지만 경제 및 문화, 특히 언어 사용에 있어서는 미국에 종속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한편 스페인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쇠퇴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스페인어를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각 급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필수로 가르치려는 시도가 법령 제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1947년에는 비록 선택과목이긴 하지만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소토법이 제정되었고 1952년에는 모든 대학교와 사립학교에서 2년 동안 연속으로 스페인어를 필수로 가르치게 하는 마그놀라법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1957년에는 쿠엔코법이 제정되었는데 이를 통해 필리핀 대학에서 교육학, 법학, 무역학, 인문학, 외교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스페인어 24학점을 필수적으로 이수하도록 했다. 그 후 1967년에 제정된 법에서는 필수 이수학점을 절반인 12학점으로 줄였다(Fernández 2013, 373).
로다오(1996, 173)에 따르면 이러한 법안들은 필리핀에서 스페인어의 유지를 위해 도움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이러한 법안들로 인해 스페인어가 자신들의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많은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유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식 교육에서 주입한 스페인 식민통치에 대한 검은 전설의 영향으로 필리핀의 낙후상황의 원인이 스페인에 있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널리 확산됨에 따라 스페인어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이 생겨났다. 이처럼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필수로 배우게 하는 정책은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실행한 결과 참담한 실패로 이어졌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는 별 다른 유용성이 없는 스페인어가 귀찮은 과목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사실과 맞물려 전후의 반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적 감정 때문에 스페인의 과거 식민통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져 1973년 헌법에서는 15조 3항에서 헌법을 제정하는 데 사용할 언어로 영어와 필리피노만을 규정함으로써 스페인어는 사상 처음으로 헌법상 공용어의 지위를 상실했고 공식적인 문서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헌법에서는 공용어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대통령령을 통해 정부 문서보관소에 있는 스페인어로 된 주요 문서들이 영어나 필리피노로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은 경우 스페인어는 계속해서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인정했다(1973년 3월 15일 대통령령 155). 1987년 헌법에서는 필리피노와 영어만을 공용어로 규정하고 스페인어는 자발적이고 선택적으로 사용을 진작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따라서 스페인어는 필리핀 사회에서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교육과정에서 스페인어가 필수과목에서 배제되었다.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1946년부터 스페인어가 공용어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1987년까지 필리핀에는 영어, 필리피노 그리고 스페인어라는 3개의 공용어가 사용되었다. 이 기간 동안 영어는 과학, 기술 그리고 국제공용어로서의 기능을 담당했고, 필리피노는 국가 정체성을 나타내는 언어였으며 스페인어는 건국의 문서들이 작성된 언어로서 과거의 전통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Zapico 2016).
현재 필리핀에는 두 가지 형태의 스페인어가 존재한다. 하나는 교양계층이 사용하는 표준 스페인어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닐라나 세부의 혼혈가정이나 상류층의 언어로 사용된다. 다른 하나는 스페인어와 타갈로어, 세부아어 및 기타 원주민어가 혼합된 혼성어인 차바카노로 현재 마닐라, 카빗테, 테나테, 민다나오, 삼보앙가, 다바오, 바실란, 코타바토 등지에서 사용된다(Villaroel 2014, 36).
Ⅵ. 나가면서
스페인어는 16세기부터 필리핀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 한 번도 국민 전체의 제 1언어로 기능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국가의 공용어로서만 기능을 했을 뿐, 전 국민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배운 언어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똑같이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은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들이 스페인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쟁취한 후 지금까지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데 반해 필리핀에서는 스페인어가 사라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이 외에도 스페인어가 필리핀에서 널리 보급되지 못한 이유로는 식민지 시대 교육을 담당했던 수사나 성직자들의 스페인 교육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 본국과의 거리가 너무 멀고, 경제적인 부의 부재로 인해 스페인 이민자들의 숫자가 적어 원주민들과 광범위한 혼혈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 너무 늦게 도입된 보통 교육제도 그리고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지리적 특성으로 인한 상호간의 소통부재 등을 꼽을 수 있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이후의 스페인어 운명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로 필리핀이 미국에 넘어간 후 진행된 미국화 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미국은 점령하자마자 필리핀에서 스페인어를 말살하고 영어를 공용화하려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 결과 필리핀에서는 미국이 통치한지 50년 만에 영어가 350년의 역사를 가진 스페인어를 밀어내고 거의 모든 영역에서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또한 과거 스페인 식민통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영어에 비해 스페인어가 갖는 낮은 유용성으로 인해 필리핀인들로부터 외면을 받은 결과 현재 필리핀에서 스페인어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어떠한 기능도 못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일부 상류층에서 사용되는 과거 식민지 시대의 유산 정도로 간주되고 있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8년도 부산외국어대학교 학술연구조성비에 의해 연구되었음.
참고문헌
- BBC News Mundo(2014), “En busca del castellano perdido en Filipinas”, https://www.bbc.com/mundo/noticias/2014/01/140103_espanol_filipinas_aun_vive_sc, (2018.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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