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의 인종과 정치: 발생, 전개, 특징
초록
브라질에서는 인종에 대한 명확한 개념의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인종차별주의가 존재한다. 즉 명확한 인종의 개념이 없이 인종주의는 존재하기 때문에, 브라질에서 인종문제는 복잡하다고 하겠다. 인종주의는 단순한 사회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분리, 배제, 주변화 등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문제이다. 유럽 식민주의 확대 과정에서부터 인종주의는 브라질의 사회적, 물질적, 심리적, 정치적 지배의 가장 뿌리 깊고 효율적인 통치방식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 연구는 인종의 정치로서 브라질의 인종주의에 대해 연구하려 한다. 결론적으로 브라질에는 인종에 따른 인종차별과 인종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브라질에는 인종에 따른 인종차별과 인종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연구하기 위해, 제2장은 브라질에서 인종정치의 기원을 살펴본다. 제3장에서는 브라질 사회와 인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제4장은 브라질의 흑인운동으로서 인종주의에 대한 흑인의 저항을 살펴본다. 제5장의 전반부는 ‘브라질의 인종불평등’을 살펴보고, 후반부는 ‘브라질의 인종차별’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제6장은 결론부분으로서 브라질의 인종정치의 도전과 한계는 무엇인지 논의하려 한다.
Abstract
In Brazil, racism exists without the clear definition of race. In other words, because there is racism without a clear concept of race, racial issues are complicated in Brazil. Racism is not just a social problem. It is, above all, a political problem that arises from economic separation, exclusion, and marginalization. From the enlargement process of European colonialism, racism has been the most profound and efficient way of governance of social, material, psychological and political domination of Brazil. From this perspective, this study seeks to research racism in Brazil as a race politics. In conclusion, racial discrimination and racial inequality exist in Brazil.
Thus, to study the racial discrimination and racial inequalities in Brazil, Chapter 2 examines the origins of racial politics in Brazil. Chapter 3 explores the relations of Brazilian society and races. Chapter 4 examines Black's resistance to racism as a black movement in Brazil. The first half of Chapter 5 looks at ‘racial inequality in Brazil’ and the latter sees ‘racism in Brazil’. Chapter 6, as a conclusion, discusses the challenges and limitations of racial politics in Brazil.
Keywords:
Brazil, Race, Racism, Racial Democracy, Racial Inequality키워드:
브라질, 인종, 인종주의, 인종민주주의, 인종불평등Ⅰ. 서론
미국의 인종구분이 조상에 기초한 방식이라면, 브라질의 인종구분은 외모에 기초한 방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브라질의 백인은 밝은 피부색의 개인이다. 파르두(Pardo 혼혈인)는 백인보다 검은 피부색의 개인이다. 그러나 파르두의 개념은 범위가 큰 편이다. 프레투(Preto 흑인)는 명확하게 검은색의 피부색을 가진 개인이다. 이처럼 브라질에서 인종구분은 인종적 또는 종족적 구성요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시각적 객관성으로서 물리적 특징으로 구분된다(Bailey 2002, 110).
미국에서 인종구분은 한 방울이라도 흑인조상의 피가 있으면, 외모와 상관없이 무조건 흑인이다. 반면, 브라질에서 인종구분은 명확하지 않고 애매하다. 브라질의 인종구분에서 인종(Race)이라는 단어보다 피부색(Color)이라는 단어를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흑인운동가는 인종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쓰고 있지만, 피부색과 인종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인종은 조상에 기초한 것으로써 변할 여지가 없다. 반면, 피부색은 개인의 피부색깔에 따른 것으로써 관찰자의 주관적 관점에 따라 변화의 여지가 있다. 피부색이나 인종은 브라질에서 어떤 사회적 의미를 포함하는데, 일반적으로 밝은 피부색은 검은 피부색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즉 흑인적인 특징보다 백인적인 특징이 더 매력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인종화(Racialization)는 중요한 개념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특정한 사회에서 인종에 대한 고유한 사회적 의미를 형성하기 때문이다(Mitchell-Walthour 2018, 7). 브라질의 고유한 역사에 따른 사회적 관습은 피부색에 따라 위계(Pigmentocracy)의 체계를 생성시켰다. 피부색의 위계제에 따라 피부색이 밝은 자에게는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했고 피부색이 검은자에게는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캐나다 또는 미국에서 흑인은 단순히 흑인이다. 그러나 브라질에서는 똑같은 흑인이라고 해도 상황에 따라 호칭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카니발 동안이나 삼바공연을 할 때는 “흑인”(Negro)이라고 부르고, 직장동료는 “어두운(검은) 사람”(Escuro) 이라고 부르며, 술친구는 “혼혈인” (Moreno) 또는 “큰 흑인”(Negão)이라고 부른다. 여자 친구는 남자 친구인 흑인을 “귀여운 흑인”(Neguinho)라고 부르고, 각종 공식통계의 작성 시에는 “흑인”(Preto)이라고 쓰며, 출생 신고서에는 “혼혈인”(Pardo)이라고 쓴다(Sansone 2003, 50). 이처럼 인종에 대한 유연한 호칭 또는 완곡한 표현으로서 피부색에 대한 규정은 일종의 차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완곡한 호칭 또는 피부색에 대한 개인적 규정은 사용하는 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자에게도 차별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곡한 호칭은 상호합의에 기초한 것이다. 피부색에 대한 완곡한 호칭을 사용하는 개인은 동일한 피부색 집단의 특징이나 정체성을 지지하면서, 합의되지 않은 방식으로 특정한 개인에게 예외적인 영예를 주기 위한 것이다. 피부색에 대한 완곡한 호칭을 수용하는 자는 그러한 사회적 규정을 승인하는 것이다(Benedito 2005, 26). 브라질에서 인종을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는 피부색이지만, 나이, 성별, 교육수준, 계급, 지역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Monk 2013, 98). 게다가 브라질은 인종적 혼혈을 중시하면서 “인종적 애매성”(Racial Ambiguity)은 국가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Mitchell-Walthour 2018, 10). 이처럼 브라질에서 ‘인종적 혼혈’과 ‘인종적 애매성’은 구조적 인종주의를 최소화하면서, 인종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켰고 흑인운동을 제한하면서, 백인권력을 지속시켰다.
브라질에서는 인종에 대한 명확한 개념의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인종차별주의가 존재한다. 즉 명확한 인종의 개념이 없이 인종주의는 존재하기 때문에, 브라질에서 인종문제는 복잡하다고 하겠다. 인종주의는 단순한 사회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분리, 배제, 주변화 등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문제이다. 유럽 식민주의 확대 과정에서부터 인종주의는 브라질의 사회적, 물질적, 심리적, 정치적 지배의 가장 뿌리 깊고 효율적인 통치방식이었다. 결국 인종주의는 기독교-유럽-백인의 이익을 위해 인종과 노동, 인종과 공간을 결합시키면서 노동력의 위계화에 따른 비대칭적인 분배를 정당화하는 정치이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종의 범주화와 위계화는 단지 한 쪽의 입장에서만 유효하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김달관 2015, 90).
이런 관점에서 본 연구는 인종의 정치로서 브라질의 인종주의에 대해 연구하려 한다. 본 연구는 무엇보다 연구자의 개인적 한계로 인해 포르투갈어로 된 자료를 연구하지 못했고, 통계자료가 2010년 정도까지로 한정되어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제2장에서는 브라질 사회와 인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브라질에서 사회와 인종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인종에 대한 사회적 의미를 형성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즉 브라질 사회에서 유럽중심주의에 기초한 백인성(Whiteness)과 흑인성(Blackness)의 의미형성 과정을 살펴본다. 제3장은 브라질에서 인종정치의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전반부는 백인우월성에서 인종민주주의로 변화의 과정과 그 내용을 살펴보고 후반부는 신인종주의에서 할당제로의 변화과정과 그 내용을 살펴본다. 제4장은 브라질의 흑인운동으로서 인종주의에 대한 흑인의 저항을 살펴본다. 핵심적으로 흑인의 저항을 ‘문화정치에서 정치문화로’라는 관점에서 살펴본다. 제5장은 브라질에서 인종정치의 특징을 분석하는데, 전반부는 ‘브라질의 인종불평등’을 살펴보고, 후반부는 ‘브라질의 인종차별’을 살펴본다. 제6장은 결론부분으로서 브라질의 인종정치의 도전과 한계는 무엇인지 논의하려 한다.
Ⅱ. 브라질 사회와 인종
중세시대에 유럽(특히 북유럽)은 종교보다는 과학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은 유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종교와 정신성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륙으로서 유럽은 아프리카보다 더 도시적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지배적이었던 부족중심주의(Tribalism)는 유럽에서는 작은 도시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15세기에 이르면, 아프리카와 유럽에서 가장 도시화된 지역 간의 격차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과학과 함께하는 유럽이 세계의 권력이 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은 종교발전 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자본주의를 강조했다. 반대로 아프리카는 종교와 과학 사이에 균형을 유지했다. 유럽지식인은 논리, 믿음, 종교 사이에 명백한 차이를 구분하면서, 2개의 분리된 영역으로서 ‘현실’을 분리했는데 그것은 합리적 세계(과학)와 비합리적 세계 또는 정신적 세계(종교)가 그것이었다. 유럽지식인은 과학의 영역이 정신적 세계보다 앞선 것으로 여겼고, 그래서 신앙과 정신성보다는 이성과 과학에 더 가치를 두는 문화가 ‘문명화’되었다고 보고, 그러한 문화가 보다 더 ‘발전’했다고 규정했다. 반대로 정신세계에 더 가치를 두는 아프리카 문화는 ‘원시적’이고 ‘후진적인’ 문화로 규정했다. 그래서 15세기의 유럽지식인에게 보다 ‘발전했다’는 것은 종교와 과학 사이의 구별일 뿐만 아니라, 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여러 반대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유럽인은 ‘아프리카인은 열등하다’는 개념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사회적ㆍ문화적 맥락에서 유럽 과학자의 일부에서 “햄의 저주”(Curse of Ham)라는 신화가 등장했다. ‘저주’라고 불린 이것은 성경에 대한 유럽의 자의적 해석에서 유래했다. 이런 가운데 기독교의 신학자는 노아의 자식 중의 한 명인 햄이 벌거벗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햄이 저주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햄의 자손은 노예로서 그들의 삶이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아프리카의 흑인은 햄의 자손이 되었고 그들의 노예화는 정당한 것이 되었다(Faith 1995, 39-44).
‘햄의 저주’로 인해 영원한 벌을 신에 의해 받게 될 운명을 갖고 있는 흑인의 저주가 ‘흑인성의 저주’로 변경되었다. 정작 성경에는 이러한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성의 저주는 노예의 상징이 되었다. 따라서 ‘햄의 저주’는 유럽 백인의 경제적ㆍ정치적ㆍ종교적 이해에 기여했다. 유럽의 노예소유주는 흑인 노예 육체의 단순한 소유자가 아니었다. 유럽의 노예소유주는 흑인 노예를 정신세계가 없는 육체로 환원했다. 이에 노예는 재산이 되었고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 환원되었으며 생명이 없는 물체가 되었다(Daniel 2006, 20). 이처럼 유럽중심주의적인 백인우월성의 가치는 유럽사회의 대부분에 스며들었다. 지배적인 계급의 사회적ㆍ정치적 활동은 유럽중심주의적 문화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중심주의적인 인종에 대한 가치관은 인간의 차이에 대한 특별한 가정에 기초했으나 일관적이지는 않았다. 유럽중심주의적 인종의 가치관은 물질적 조건, 문화ㆍ자연에 대한 지식 등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인종개념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으며, 인종구분을 강제했던 개인의 동기, 목표, 인식수준, 이해력 등에 영향을 주었다. 문화적 시도로서 인종개념은 자연과학에 기초를 두지 않았고,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차이에 대한 대중적 믿음의 결과물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인종’은 점차적으로 생물학적 개념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Daniel 2006, 24).
1500년에 브라질 해안가에 첫 번째로 포르투갈 인이 도착했다. 1530년대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위해 원주민을 노예로 삼기 시작했다. 그러나 식민초기에 포르투갈은 원주민을 노예로 삼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한 이유는 원주민이 인근 지역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접근이 어려운 내륙지역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Ferreira 2004, 10). 게다가 유럽인과 함께 온 전염병과 전쟁으로 인해 원주민이 급격하게 감소하면서, 대안적인 노동공급으로서 아프리카의 흑인을 브라질에 데려오기 시작했다(Telles 2004, 24). 포르투갈이 다른 지역보다 아프리카의 흑인을 일찍 수입하게 된 이유는 브라질에서 아프리카와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웠고 그래서 흑인 노예의 가격이 비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의 대농장주는 흑인 노예의 건강을 해칠 정도로 심하게 흑인노예에게 노동을 시켰는데, 그것은 노예의 건강을 유지시키기에 노력하는 것보다 새로운 흑인 노예를 구매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는 보통 7년 정도를 사용할 수 있었다(Hamilton 2001, 121). 게다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브라질에 수입한 것은 이미 포르투갈인은 아프리카 인근 식민지의 설탕 대농장에서 흑인노예와 일한 경험이 있었고 포르투갈 당국도 흑인 노예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포르투갈 부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Reiter 2003, 59-60). 이후 약 300년 동안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가 유입되었고 1850년 노예무역이 종식될 때까지 약 4백 만 명의 아프리카의 흑인이 노예로서 브라질에 수입되었다.
식민초기에 포르투갈인은 정착보다는 부를 찾기 위해 온 남성이 대부분이었다. 포르투갈의 여성은 브라질로 이민이 금지되면서, 브라질에 높은 남녀성비의 불균형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인은 원주민과 흑인의 여성 중에서 상대를 찾았고, 이들 간의 동거(사실혼)가 생기면서, 많은 혼혈인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예에 기초한 경제에서 강제된 인종적 위계를 고려할 때, 포르투갈 출신의 백인 남성과 브라질의 비백인 여성 사이에 관계는 매우 비대칭적이었다. 포르투갈의 백인 남성은 흑인, 원주민, 혼혈인 여성을 강간했고 학대했다. 비록 당시에 백인과 비백인 사이에 동거와 결혼이 일반적이었지만, 노예제 시기(1500-1888) 동안에 원주민과 노예에 대한 학대가 만연했다. 타 인종 사이에 혼혈의 전통은 폭력적인 성관계뿐만 아니라, 공식적ㆍ비공식적 동거를 통해 브라질의 사회적 토대가 형성되었다(Telles 2004, 25).
1600년대 초에 흑인은 사탕수수 농장의 주요한 노동력이 되었다. 1625년 브라질의 설탕은 모든 유럽시장에 공급되었다. 이에 영국도 1660년경에 신대륙의 영국식민지에서 설탕을 생산했고, 이로 인해 영국이 북유럽에서 설탕공급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브라질 북동부의 바이아 지역은 19세기 중반까지 중요한 설탕 수출지였다. 1760년대 설탕공급의 과잉으로 인해 국제설탕가격이 급락했으나,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1763년에 수도를 북동부 지역 바이아 주의 사우바도르(Salvador)에서 남동부지역 히우(Rio de Janeiro)로 이전했다. 이후 브라질의 남동부지역은 금, 커피, 제조업의 중심지가 되면서 북동부지역의 바이아는 경제적 주도권을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Rice 2002, 49).
1822년 흑인노예가 증가하면서 흑인의 반란에 따른 혁명적 갈등을 피하기 위해 브라질의 독립이 시도되었다.1) 외부적으로 영국의 외교적 압력과 흑인인구의 증가라는 내부적 압력이 증가하면서 브라질은 1850년에 노예무역을 종식시켰다. 남동부지역에서 커피생산이 증가하면서 지역적으로 노동력의 부족 현상이 발생했고, 다른 한편으로 광범위한 노예의 반란으로 인해 많은 노예소유주는 노예를 종속적인 노동자로 유지하려는 기대와 함께 노예를 자유인으로 해방시켜 주었다. 노예폐지자의 압력과 흑인노예의 저항이 증가하면서 결국 1888년에 브라질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Alberto 2011, 7).2) 1888년 노예제의 폐지는 실질적으로 많은 노예를 해방시키는 효과가 발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822년 브라질의 독립 시에 총인구에서 흑인노예는 많아야 50%정도였고, 1888년 당시에는 총인구에서 흑인노예는 5% 정도였다. 이것은 노동력의 재구조화, 자동화에 따른 기술발전, 노예해방의 누적효과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1817년에 통과된 대서양의 노예무역 금지가 1850년 이후에 실질적으로 실행되었고, 1871년 히우 브랑쿠(Rio Branco)법은 노예출신 여성에서 태어난 자식을 자유인으로 해방시켰으며, 1885년 법은 60세 이상의 노예에게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이다(Butler 2000, 7). 다른 한편, 브라질에서 노예제의 폐지가 경제적인 요소보다는 문화적인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그것은 첫째, 브라질에서 노예는 자신의 자유를 구매할 수 있었다. 어렵고 드문 일이었지만, 자유를 살 수 있었던 흑인노예는 브라질의 사회에 진입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둘째, 브라질의 광대한 영토로 인해 그 넓은 지역을 브라질 당국이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에 브라질의 여러 지역에서 도망노예의 공동체인 킬롱부(Quilombo)가 발생했다(Hindert 2016, 66).3)
19세기 동안에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인해 미국과 유럽에서 중산층이 확대되었다. 삶의 질 향상과 함께, 중산층까지 커피의 구매가 가능하게 되었다. 커피 수요의 증가는 브라질에서 커피생산을 증가시켰고, 특히 브라질의 남동부지역에서 커피생산이 증가했다. 19세기 중반에 커피는 브라질에서 중요한 수출작물이 되었고 브라질 총수출의 54-65%를 차지했다. 커피수요의 확대와 노예해방은 동시에 발생했고, 이러한 요소는 커피 대농장에서 값싼 노동력의 필요를 증가시켰다. 노동력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상파울루의 대지주는 해방된 노예와 자유 원주민 노동자를 북동부지역으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국제설탕가격의 하락으로 인해 북동부지역의 설탕생산이 감소하면서 노동공급이 과잉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Furuichi 1999, 28). 1888년 브라질에서 노예제의 폐지는 세계에서 가장 늦게 노예제를 폐지한 국가가 되었다(Larkins 2015, 6).
전체적으로 노예제의 폐지 이후, 브라질의 사회적ㆍ인종적 특징은 변화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사회의 최상층은 압도적으로 유럽계의 백인 브라질 인이 계속해서 자리를 차지했고 부, 권력, 특권도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변모했지만 유럽계의 백인은 그대로 최상층을 유지했다. 가장 낮은 층은 압도적으로 혼혈인과 흑인이었다. 도시의 부르주아는 새로운 전문가 백인으로서 전통적인 대지주 귀족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들은 개인의 재능과 함께 전통적 가치를 어느 정도 대체했다. 비록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했지만 사회적 상승이동의 가능성은 혼혈인이 중산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약간의 기회를 제공했다(Daniel 2006, 40). 1871-1888년 동안에 브라질의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인)가 처음으로 흑인 수를 능가했다. 당시 프레투(Preto: 흑인을 지칭함)라는 용어는 다양한 아프리카의 배경을 가진 흑인 모두를 호명하는 용어로서 ‘국민’이라는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비록 개인수준에서 흑인 또는 물라토로 구별되었지만, 브라질 출생과 아프리카 출생의 구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흑인 후손은 사회적 열등성을 상징했고 아프리카적 특징을 갖는 검은 피부색을 의미했다. 지배적인 유럽계 문화와 관련이 있는 백인 아래에 흑인 후손들이 위치하게 되었다(Daniel 2006, 44). 유럽계 백인 브라질인은 브라질 발전의 애로사항이 흑인과 물라토에 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유전적으로 ‘열등하고’, 문화적으로 ‘후퇴했으며’, 사회적으로 ‘타락한’ 혼혈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이미 약화된 이들의 협상력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이민은 인종적ㆍ문화적인 백인화(Whitening)의 가속화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경쟁자로서 흑인을 제거하기 위해 강조되었다. ‘인종청소’를 위한 정책으로서 1907년에 이민법이 통과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브라질에 있는 아시아 인구의 연간 3%로 이민을 제한했고 흑인의 이민을 금지했다. 게다가 브라질의 국가정책은 ‘유약한’ 유럽이민자를 선호했다. 이에 이들은 혼혈인과 흑인 노동자와의 임금협상과 노동조건을 약화시켰다. 게다가 유럽 이민자는 인종적 평등과 인종 간의 유대를 통해 노동운동을 약화시키면서 인위적으로 흑인과 혼혈인의 낮은 임금을 유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강한 협상을 추진하는 노동자에 제재를 사용 할 수 있도록 정부가 백인 사용자를 위해 정책을 지원했다. 이후 성장하는 상파울루의 제조업 부문은 혼혈계 브라질 인이 남동부지역으로 이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럽인의 이민을 더욱 촉진시켰다(Daniel 2006, 47-49).
Ⅲ. 브라질에서 인종정치의 변화
브라질의 대표적인 인종정치로 인종주의가 존재한다. 브라질의 인종주의는 크게 보면,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19세기 중반에 우생학에 기초한 백인우월주의 시기이다. 기본적으로 이종혼혈에 기초를 두지만 백인우월주의에 따라 백인화(Whitening)를 목표로 했다. 두 번째 단계는 1933년 프레이리(Gilberto Freyre)의 “인종민주주의”(Racial Democracy) 시기이다. 기본적으로 이종혼혈에 기초를 두지만 백인화보다는 혼혈인이 핵심적인 주체가 되었다. 브라질의 인종정치로서 ‘인종민주주의’는 1990년대까지 브라질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세 번째 단계는 신인종주의 시기로서 1974년 정치개방 이후 출현한 반-인종주의 도전학파와 1985년 민주화 이후에 출현한 반-인종주의 도전학파로 구분한다. 네 번째 단계는 2000년대에 출현한 차별철폐초치로서 할당제 시기이다.
3.1 백인우월성에서 인종민주주의로
브라질에서 인종정치로서 인종주의가 있다. 인종주의는 백인이 비-백인을 열등하다고 평가하면서 비-백인을 차별하는 이념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브라질에서 인종주의는 역사적 단계로 구분할 수 있고, 첫 번째 단계는 19세기 중반 우생학에 기초한 백인우월주의 시기이다. 19세기 중반에 브라질의 지식인은 우생학에 영향을 받았다. 당시의 우생학은 유럽백인은 일반적으로 우월한 인종이고, 흑인은 열등한 인종이며, 혼혈인은 퇴락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우생학의 일반적 경향 속에서 브라질은 자신의 고유한 우생학을 발전시켰다. 백인의 우월성 개념은 그대로 유지했으나 혼혈인이 퇴락했다는 당시 우생학의 개념은 거부했다. 대신에 백인이 우월하기 때문에 백인과 열등한 인종과 이종혼합(Miscegenation)이 반복적으로 지속되면 결국에 보다 하얀 피부색을 가진 건강한 혼혈인이 생성될 것으로 가정했다. 이것은 강경한 인종분리자의 출현을 어렵게 만들었다. 당시의 우생학의 관점에서 브라질의 잠재적인 ‘열등성’의 해결은 이종혼혈을 통한 백인화(Whitening) 전략이었다. 이것은 노예제의 폐지로 인해 발생된 노동력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유럽의 이민을 장려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의 백인 이민은 노동량과 노동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Treviño 2005, 9-10).
비록 브라질의 인종적 위계가 다른 유럽보다 이종혼합에 보다 관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의 열등성은 그대로 인정했고, 브라질의 인종적인 위계적 사회구조도 그대로 유지했다. 즉 유럽계 백인은 사회의 피라미드에서 상위에 확실히 위치했다. 피부색이 검은 색이면 사회의 신분이 아래로 떨어졌고 이들의 외양적 특징은 아프리카의 흑인에 가까웠다. 피부색에 따른 사회적 신분은 부모에 따른 유전학적인 것과 차이가 있었다. 이에 따라, 브라질에서 사회적 신분을 향상시키기 위해 밝은 피부색의 배우자와 결혼을 통해 신분을 향상시키려 했다. 또한 유럽의 방식으로 옷을 입는 관습을 따르거나, 보다 부자가 되면 이것도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어느 정도 향상시킬 수 있었다(Treviño 2005, 11). 브라질의 역사는 국민을 백인화 시키기 위해 국가가 주도적인 노력을 보여주었다. 당시에 국민의 백인화는 문명화된 진보의 성취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Gladys 2010, 25).
19세기에 노예제가 폐지되었을 때, 코카서스(Caucasians)인이 비-백인에 대해서 우월하다는 과학자의 주장에 따라서 백인의 비-백인에 대한 인종지배의 이념을 강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인종은 대부분 생물학적 위계보다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기초에 의거했다. 19세기 후반에 브라질에서 인종에 대한 과학적 관심은 ‘어떻게 인종이 브라질의 미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까?’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우생학이 등장하는 시기에 특히 유전지식에 따라 보다 향상된 후손을 얻기 위한 시도와 관련이 있었다. 당시의 우생학은 흑인을 열등한 것으로 보았고 혼혈인을 퇴보한 것으로 보았다. 게다가 우생학은 브라질과 같은 열대기후에서는 인간의 생물학적ㆍ정신적 상태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Telles 2004, 26). 우생학은 사회정책을 진흥했는데, 그것은 인류의 진보를 위해 유전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미국ㆍ영국ㆍ독일의 우생학은 멘델스의 우생학에 매우 근접했다. 그것은 유전적 상속과 인종적 함의에 엄격히 따랐다. 그러나 대부분의 브라질과 라틴아메리카의 우생학은 프랑스적 입장(Neo-Lamarckianism)을 따랐다. 그것은 유전적 결점이 극복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프랑스의 우생학적 관점은 인종에 대한 브라질인의 해석에 영향을 끼쳤다. 즉 우생학에 대한 당시 프랑스의 관점은 흑인과 혼혈인의 열등성에 대한 인종주의적 예견을 인정했으나, 이종 간 혼혈에 의해 열등성이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브라질 학자는 건설적인 이종 간 혼혈의 이론을 통해서 백인화라는 해결책을 제안했다. 높은 백인 출산율과 백인 유전자가 다른 유전자에 비해서 우수하고 지배적이라는 믿음에 기초하여, 브라질의 우생학자는 이종혼합을 통해 흑인국민을 장기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특히 백인으로 귀결되는 또는 대부분이 백인으로 귀결되는 브라질을 예측했다(Telles 2004, 28-29). 브라질에서 백인화이념은 유럽의 우생학과 사회진화론의 인기에 따라 발전하게 되었다. 브라질의 백인화이념은 ‘보다 열등한 인종’은 인종적 혼혈과정을 통해 ‘보다 우월한 인종’에 흡수된다고 믿었다(Caldwell 1999, 55).
인종주의의 두 번째 단계는 1930년대 프레이리(Gilberto Freyre)의 “인종민주주의”(Racial Democracy) 시기이다. 1933년에 프레이리가 출판한 “주인과 노예”(Casa Grande e Senzala, The Master and the Slaves)에서 제안한 이종혼혈은 백인화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했다(Sousa 2006, 2). 그것은 브라질 공동체를 분리하거나 또는 고립시키는 대신에 혼혈인을 ‘상상의 브라질공동체’에 통합시키려는 전략이었다. 사회적 위계에서 흑인을 제일 밑에 위치시키면서, 흑인과 다른 인종을 하나의 국민으로 만들려는 바르가스(Getúlio Vargas) 대통령의 기획과 프레이리의 관점은 일치했다. 프레이리의 관점은 이전의 노예를 사회에 통합시키려는 해결책으로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그대로 지키려는 도시 엘리트와 새롭게 떠오르는 비백인 구성원에게도 해결책을 제시했다. 프레이리의 이론이 바르가스 국가정책의 공식적 교리로 전환되면서, 브라질은 인종민주주의 국가가 되었고 그것은 오직 하나의 인종 즉 혼혈인만이 거주하는 국가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프레이리의 이론은 국민과 엘리트 자신을 위한 논리를 제공했다. 즉 유럽의 문화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광범위한 인종적 혼혈의 역사적 사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바르가스 체제 하에서 국민형성의 기획을 제공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흑인의 단일성과 흑인의 동원을 방해했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상승이동은 유럽적 가치, 태도, 미학에 대한 동화를 통해서 성취됨을 의미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한 사회적 상승이동은 브라질의 가치와 사회적 위계제가 브라질의 생물학적ㆍ문화적 다양성 속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유럽적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했다(Gladys 2010, 26-27). 프레이리의 핵심적 관점은 사회계급에 따른 인종형태로서 상류층은 백인이 많았고 하층은 흑인이 많았다. 이에 사회적 정체성과 계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애매한 인종구분’에 기초하여 중간범주의 존재를 인정하는 엘리트적 관점이었다(Bailey 2002, 24-27).
다른 한편, 프레이리의 인종민주주의는 백인화이념을 극복하는 의미 있는 것이었다. 더 이상 백인성을 최종목표로 하는 단순한 수단으로서 혼혈이 아니었다. 대신에 혼혈은 그 자체로 미덕이 되었고 진정하고 근대적인 브라질 국민의 원천이었다. 백인ㆍ흑인ㆍ혼혈인의 일관되고 계몽된 종합으로서 혼혈의 이상화는 근대 브라질의 국민주의를 추동시키는 ‘브라질 예외주의’ 의미에 토대가 되었다(Treviño 2005, 15). 이종 간 혼혈에 대한 프레이리의 긍정적 해석은 단일적 체계(a Unifying)로서 인종적 경계를 흐리게 만들면서 반-인종차별적 과정을 본질적으로 이상화 했다. 흑인ㆍ혼혈인ㆍ백인을 단일적 체계에 집단적 친밀감(귀속의식)으로 규정하면서, 혼종적ㆍ국민적 특성으로 동화시키는 것을 이상화 했다. 이에 프레이리의 인종민주주의는 인종적 구분을 중시하지 않는 조화로운 사회, 평등주의를 포함하는 미래의 약속을 중시했다. 그러나 인종민주주의의 반-인종주의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인종민주주의는 백인의 우월성을 제거하지는 않았다. 인종민주주의에는 백인의 우월성과 반-흑인성(Antiblackness)이 강하게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인종적 그리고 피부색에 따른 계층화를 용이하도록 했다. 동시에 혼혈인은 이상적이고 핵심적인 주체가 되었다. 이것은 인종적 정체성과 주체성에 있어서 비-혼혈적 표현을 제한하면서, “우리 모두는 혼혈인이다”라는 것이 상식적 담론이 되었다. 국민적 담론으로서 이종혼합의 핵심은 ‘문화적인’ 형성을 위한 토대로서 인종적 차이를 배제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인’ 범주를 위한 기초로서 인종적 차이를 유지했다. 즉 브라질의 사회에서 개인적 신분은 신체의 흑인성 정도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에 흑인의 하위 주체적인 위상의 표시는 낮은 사회적ㆍ경제적 신분을 나타낸다. 인종민주주의라는 이종혼합의 지배적 이해는 사회경제적 불평등, 신분, 차별을 구조화 하는 후기 인종주의적 가정에 의존했다.4) 결국, 이종혼합과 인종민주주의의 이상은 인종과 관련하여 희망과 기대를 형성시켰다(Da Costa 2014, 26-27). 프레이리는 다양한 인종의 혼혈을 통해 새롭고 우월한 인종형태를 생성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프레이리의 주장은 혼혈인은 열등하고 우생학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는 기존의 경향에 도전했다. 프레이리 이전의 대부분의 브라질의 지식인은 혼혈인을 국민적 질서를 혼란케 하는 이질적이고 비안정적인 요소로 보았다. 그러나 프레이리의 인종적 이종혼혈은 국가의 미래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제시되었다. 그는 인종의 순수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동질적인 인종과 조화로운 국민을 구성하는 수단으로서 이종혼혈의 긍정적인 측면의 재해석이었다. 이러한 프레이리의 연구는 근대 브라질의 식민지 기원을 해석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식민시대의 인종적ㆍ성적 상호행위의 강조는 그의 인종민주주의의 형성에 핵심이었다. 프레이리는 포르투갈 대지주가 다른 인종 및 종족과의 관계에 있어서 개방적이고 평등적이며 예의를 갖추었다고 주장했다. 프레이리는 포르투갈 인이 평등한 인종적 태도를 갖고 있었다는 증거로서 높은 이종 간의 혼혈을 인용했다. 프레이리는 소수인 포르투갈 대지주, 노동력 부족, 광활한 영토는 포르투갈 인들로 하여금 ‘활기찬 원주민 여성’과 ‘즉시적인 이종혼합’을 강제했다고 주장했고 브라질의 사회 발전을 확대해야 할 필요성도 언급했다. 이종혼합을 통해, 유연한 사고력을 갖고 있는 포르투갈 인이 ‘활기차고’, ‘유순한’ 혼혈인을 출현시켰다는 것이다. 게다가 타 인종에 대한 포르투갈인의 취향(경향)은 종족적ㆍ인종적 경계에 있어서 남성 식민자로 하여금 중간 교량이 되도록 했고 이것이 영국ㆍ프랑스ㆍ네덜란드보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개발에 성공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Caldwell 1999, 59-62).
프레이리의 “주인과 노예”는 브라질 국민정체성의 형성에 기여했다. 프레이리는 이전에 무시했던 이종혼합을 브라질의 긍정적인 국민의 특징으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이종혼합은 브라질 문화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비록 프레이리가 잘 규정된 개념의 요소와 용어를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프레이리는 ‘인종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사상을 개발했고 표현했으며 대중화 시켰다. 인종민주주의는 193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인종에 대한 브라질의 지배적 사상이었다. 프레이리는 특별한 방식으로 인종적 동화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브라질 국민’을 창조했다. 이종 간의 혼혈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조화롭게 하고 갈등을 완화시키기 위한 큰 그릇으로서, 16-17세기 브라질의 가부장적 가정(家庭)에서 브라질 전체로 인종민주주의를 확대했다(Telles 2004, 33-34).
3.2 신인종주의에서 할당제로
1950년 유엔의 국제기구의 하나인 유네스코(UNESCO)의 지원 하에서 브라질의 인종민주주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서 여러 나라로 구성된 전문가들이 브라질의 인종관계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결론적으로 유네스코의 연구는 브라질에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유네스코의 연구 이후에 브라질에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연구가 계속 나왔다. 1950년 이후 사회과학자는 브라질에서 비-백인이 겪고 있는 사회적 인종차별과 불평등의 객관적ㆍ통계적 증거를 제시하면서, 프레이리의 인종민주주의에 대해 비판했다. 브라질에서 인종적 관용의 문화가 존재함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대부분의 연구는 브라질에서 진정한 인종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사회적ㆍ경제적 장벽이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했다. 브라질의 사회학자인 페르낭지스(Florestan Fernandes)는 ‘신화’로서 인종민주주의의 이상을 가장 먼저 비판했다(Sousa 2006, 4).
1950년 유네스코의 연구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 브라질에서 백인과 비백인 사이에 깊은 불평등의 원인을 찾고자 하는 인종주의 연구가 실행되었다. 반인종주의 도전학파의 선두주자인 페르낭지스는 브라질의 인종관계에서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서 인종관계에 배태된 역사적ㆍ구조적 형성의 분석이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이들은 브라질에서 인종적 조화에 대한 프레이리의 가설은 ‘과학적 엄밀성의 부족’과 브라질의 지방과 과두세력의 관점을 옹호했다고 비판했다. 프레이리의 보수주의는 브라질 식민사에 동정적 해석으로 반영되었고, 구조적 변혁보다는 안정과 유산 같은 보수적인 주제를 선호했다. 1955년 초기에 프랑스 인류학자(Roger Bastide)와 페르낭지스는 “상파울루에서 흑인과 백인”(Negros e Brancos em São Paulo)를 출판했고, 1965년에 페르낭지스 단독으로 “계급사회에서 흑인의 통합”(A Integração dos Negros na Sociedade de Classes)을 출판했는데, 이것은 브라질에서 인종관계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로 여겨졌다. 그의 일반적인 결론으로서 경쟁적인 사회경제적 질서의 등장은 이전에 노예였던 자들의(흑인) 사회적 조건을 향상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계급으로 분리된 사회에서 통합을 위한 흑인 브라질인의 실패는 흑인을 사회적 아노미와 빈곤상태로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인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했다. 반면에 이런 상황은 사회이동을 위한 흑인의 시도에 반대하는 인종차별을 발생시켰다. 결국, 페르낭지스는 노예제의 오래되고 비대칭적인 인종관계는 노예에 기초한 경제모델의 붕괴 이후에도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은폐된 카스트 제도’는 백인과 동일한 조건의 경쟁으로부터 흑인을 방해했다. 이런 의미에서 권력, 부, 특권은 브라질 백인 인구의 손에 집중되었다는 것이다(Sousa 2006, 90-92). 따라서 인종주의적 태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준과 양립될 수 없음을 페르낭지스는 강조하면서,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면 브라질에서 인종차별이 중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의 인종질서는 이미 1930년대에 붕괴되었다고 보았다. 흑인의 점차적인 중산층으로 통합을 통해 이질적인 소수로서 계급위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즉 소수의 그리고 산발적인 방식으로 흑인은 중산층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인종통합의 가능성은 피부색과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우연에 따른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회적 평등을 성취하지 못하는 한, 인종민주주의는 유지되지 못할 것이고 이에 따라 민주주의도 성취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인종민주주의는 단지 신화에 불과할 뿐이라고 비판했다(Sousa 2006, 93-94).
브라질의 인종정치에서 프레이리까지의 경향이 인종불평등과 차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엘리트적 반인종주의자라면 페르낭지스부터의 경향은 반-인종주의에 대한 도전학파로서 인종불평등과 차별의 존재를 인정하는 ‘신인종주의’ 시기이고 인종주의의 세 번째 단계이다. 브라질 인종주의의 세 번째 단계는 신인종주의 시기로서 1974년 정치개방 이후에 출현한 반인종주의 도전학파와 1985년 민주화 이후에 출현한 반인종주의 도전학파로 구분할 수 있다.
인종주의의 세 번째 단계로서 신인종주의의 첫 번째 시기(1974-1985)는 이전 보다 인종정치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이 증가했다. 첫째, 군부정권은 모든 반대세력을 억압했고 국민적 공동체의 안정성을 위협했다. 둘째, 군부정권은 인종민주주의를 브라질 국가의 공식적 이념으로 규정했다. 군부정권이 인종민주주의를 선택한 핵심적인 이유는 브라질에서 인종차별의 문제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 인종민주주의 신화는 인종차별적 이념이 되었다. 즉 인종민주주의는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인종적 불평등과 인종차별적 질서를 정당화 했다. 따라서 인종민주주의 신화는 브라질에서 권력자를 위한 가장 강력한 ‘정당화 이념’이 되었고 권력이 없는 대중에게는 ‘신화적 이념’이 되었다. 넷째, 정치개방(1974-1985) 시기에 브라질의 흑인운동이 서서히 다시 등장했다. 다시 등장한 흑인운동은 비백인 사이에서 유대감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인종적 애매성을 흑인운동의 어려움으로 인식했다. 이들은 흑인의 주관성 또는 긍정적인 인종정체성을 지지했다. 신인종주의의 한 부류인 반인종주의 도전학파는 특히 브라질의 정치개방(1974년) 이후에 출현했는데, 이들은 첫째, 브라질에서 인종적 편견과 차별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했다. 둘째, 인종차별의 존재를 주장하려는 시도로서 인종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 셋째, 브라질에서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으로서 ‘계급’보다는 ‘인종주의’에 보다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인종과 관련하여 브라질에서 인종주의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지 않다는 편견”을 보여주려 했다(Bailey 2002, 27-29).
억압적인 군부독재 기간이 점차 종결되면서, 1985년 민주화 이후의 인종주의의 세 번째 단계의 두 번째 시기의 신인종주의는 인종민주주의 신화가 흑인운동의 노력을 중화시키려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흑인운동의 재등장은 인종차별의 부인에 지속적으로 도전했다. 이런 맥락에서 세 번째 단계의 두 번째 시기는 인종불평등의 문제를 인구조사의 통계적 분석과 연구 자료의 양적인 방식을 활용하여 교육, 소득, 계급 등의 차이로 환원될 수 없는 인종적 불평등과 차별을 명확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이에 따라, 브라질의 인종관계에서 사회학적 개념으로서 ‘인종’의 회복을 가능케 했다. 이들은 정당화와 신화화의 이념으로서 인종민주주의의 기능을 명확히 보여주었다(Bailey 2002, 30-31). 일반적으로 신인종주의 입장은 백인 브라질 인이 인종차별을 부인한다는 점에 비판적이었다. 백인의 인종차별적 태도가 브라질에서 의미 있게 변모했다는 증거가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백인은 브라질에서 인종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지지했다. 신인종주의는 흑인 브라질인도 인종차별을 계속해서 부인한다는 점에 비판적이었다. 사회과학이 인종차별에 대해서 실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의 인종민주주의 신화는 엘리트가 아닌 평범한 브라질 인에 의해서 아직도 방어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신인종주의 입장은 인종민주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긍정적 믿음은 브라질에서 반-인종주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장애물이라고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 브라질에서 인종민주주의 이념의 지배적 위치는 흑인성을 주장하는 흑인운동에 방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흑인운동에서 일반적으로 흑인참여의 결여는 인종개념의 애매함 때문이었다. 1985년 민주화 이후의 신인종주의의 특징을 보자면 첫째, 미국과 브라질의 통계수치를 이용해 흑인과 백인이 분리되어 있다는 주장을 했다. 둘째, 사회구조와 인종주의의 상호행위에 대한 분석에서 ‘계급’보다는 ‘인종’을 중시했다. 셋째, 인종차별적 주관성을 부정하려는 인종민주주의에서 개념의 애매성을 재평가했다. 넷째, 인종민주주의의 ‘지속적 영향’과 이것을 부정하는 ‘파괴적 효과’가 인종주의 쟁점에 영향을 끼쳤다고 비판했다(Bailey 2002, 31-33).
결론적으로 인종주의의 세 번째 단계로서 신인종주의의 일반적인 특징을 요약하자면 첫째, 브라질에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있다. 둘째, 사회학적 분석에서 ‘계급’보다는 ‘인종’을 중시했다. 셋째, 흑인/백인에 대한 인종적 주관성의 회복을 주장했다. 넷째, 정당화 하고 신화화 하는 이념으로서 인종민주주의의 관점은 인종차별을 부인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다섯째, ‘반-인종주의’의 인종불평등에 대한 부정적 사회효과에 집중했다. 여섯째,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관점에서 인종차별과 불평등의 객관적, 통계적 자료를 통해 밝혀내려 했다.
인종주의의 네 번째 단계는 2000년대의 차별철폐조치(Affirmative Action)로서 할당제로의 변화이다. 그것은 브라질의 인종정치의 역사에서 극적인 순간을 대표한다.5) 할당제로의 변화는 브라질의 민주화와 함께 발생했고, 그것은 지방수준에서 시민사회의 참여를 포함하는 탈집중화, 민주적 정치제도의 강화 등이 특징이었다. 브라질의 민주화로 인해 2002년 대통령후보로서 노동운동가인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김달관 2017). 2002년 2개의 국공립대학에서(Universidade do Estado de Rio de Janeiro, Universidade Estadual do Norte Fluminense Darcy Ribeiro) 자기 스스로 흑인 또는 혼혈인으로 정체성을 규정하는 대학입학 지원자 중에서 40%를 합격시키는 차별철폐 제도를 실시했다. 2003년 히우 주(主)에서 국공립 고등학교 졸업생 중에서 20%, 흑인 중에서 20%, 소수자와 장애자 중에서 5%의 대학입학을 허용했다(Magalhães 2006, 101). 이에 2003년 차별철폐조치가 4개의 국공립대학에서 실행되었고, 2008년에는 84개의 대학으로 확대되었다. 2012년 3월 대법원에서 흑인을 위한 할당제가 차별철폐조치로서 합헌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2012년에 고등교육기관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는 125개의 기관이 할당제를 실시했다(Augusto 2014, 141-142). 인종정치로서 2002년 히우의 국공립대학에서 흑인계 브라질 인에 대한 차별철폐조치법이 제정되었을 때, 브라질 흑인운동도 깜작 놀랐다. 이것은 이중적 승리였는데, 하나는 흑인계의 브라질 인을 위한 정책수단의 시도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적인 흑인차별에 대한 여론의 광범위한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이다(Da Silva 2004, 789). 이처럼 브라질에서 인종정치가 서서히 인종적 편견과 인종적 차별을 축소시키고 있으나 앞으로도 더욱 많은 브라질 사회의 노력이 필요하다.
Ⅳ. 브라질에서 인종(흑인)운동: 문화정치에서 정치문화로
브라질에서 인종주의의 차별을 겪는 흑인의 저항운동은 사회운동으로서 문화정치로부터 시작되었다. 문화정치(Cultural Politics)는 불평등한 사회관계에서 정당화의 논리를 변혁시키려는 투쟁이다. 문화정치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실천의 의미를 결정하고, 이러한 의미를 결정하는 권한을 어느 집단과 개인이 갖고 있는지 살펴본다. 문화정치에서 문화는 우리의 삶의 의미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주관성 및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주관성은 존재하는 권력관계를 수용할지 또는 경쟁할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게다가 주변화 되고 억압받는 단체에 있어서, 저항의 정체성 형성은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적 투쟁의 핵심적 자원이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에서 모든 사회운동을 문화정치로 규정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문화적인 ‘사회운동’이 문화적인 ‘정치’의 개념을 제한하려는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러한 제한의 시도는 ‘새로운’과 ‘과거의’ 사회운동 사이의 구분으로 귀결되었다. 새로운 사회운동에서 정체성이 중요해졌고, 이에 따라, ‘정치는 행함에 있어서 새로운 방식’이 중요했으며(Identity in Politics), 사회성의 새로운 형태에 대한 기여가 중요해졌다(Alvarez 1998, 5-6). 문화정치는 규정적이고 관계적이다. 서로가 갈등관계에 있을 때, 그리고 다른 문화적 의미를 형성하는 사회적 행위자의 실천이 발생할 때, 문화정치는 의미가 새롭게 규정되는 과정으로서 이해된다. 문화정치는 ‘정치적인 것’으로써 수용되어야 하는 ‘의미와 실천’을 수용한다. 게다가 문화정치는 모든 사회의 지배적인 정치문화에 의해 특징이 드러난다. 여기서 정치문화는 특정한 사회에서 ‘정치적인 것’을 의미하는 ‘사회적 구성’이다. 즉 정치문화는 역사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던 사회적 현실의 전체를 의미하는 제도와 실천의 영역이다. 서구의 지배적 정치문화는 합리적, 보편적, 개인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지배적인 정치문화는 공적ㆍ사적 영역구분의 부족으로 인한 정실주의, 후견주의, 친족주의 문화 등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운동으로서 문화정치는 문화적ㆍ정치적ㆍ사회적 경계를 무너뜨린다. 또한 문화정치는 문화적 차이를 전제하거나 문화적 경쟁을 규정한다. 만약 사회운동이 사회 권력의 수정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정치문화가 권력의 협상을 위한 제도적 영역을 포함한다면, 사회운동은 정치문화의 문제와 다투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운동으로서 문화정치는 권력의 제도적 영역인 정치문화를 궁극적 목표로 삼아야할 필요가 있다(Alvarez 1998, 8-9).
20세기 초 브라질의 흑인운동은 인종관계에 대한 2개의 담론에 직면했다. 첫 번째 담론은 흑인의 열등성과 관계가 있다. 두 번째 담론은 흑인이 브라질성(Brasilidade)에 기여했지만 인종주의는 흑인의 기여를 부인했다. 브라질의 인종관계에서 백인화와 인종민주주의는 인종적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고 ‘인종’보다는 ‘계급’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인식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인종적 평등을 요구하는 흑인운동을 부인했다. 게다가 브라질에 뿌리 깊은 후견주의 정치문화로 인해 흑인의 시도가 백인 엘리트에 의해 자주 호선되었기 때문에, 집단행동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Selka 2007, 26-27). 브라질에서 첫 번째 흑인운동은 1920-1950년 사이에 등장했다. 이때는 빠른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임금노동체계가 변모했고 자본주의가 채택되었다. 흑인은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구조 내에서 점차적으로 주변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흑인의 주변화에 대항하기 위한 흑인조직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상파울루는 새로운 제조업의 중심지가 되면서 흑인이 증가했고 이와 더불어 흑인운동이 발전하게 되었다. 상파울루에서 흑인의 브라질 사회에 통합, 흑인의식의 형성, 브라질 발전에 흑인의 기여 강조 등을 주장하는 흑인 언론이 등장했다(Faith 1995, 96).
이런 맥락에서, 첫 번째 흑인운동 조직은 1931년 상파울루에서 조직된 “브라질흑인전선”(Frente Negra Brasileira: FNB)이었다. 브라질흑인전선(FNB)은 흑인의 정치적 동원을 첫 번째로 시도했다. 브라질흑인전선은 흑인언론으로서 그리고 문화적 조직으로서 기원했음에도 불구하고, 1936년에 브라질 사회에서 유럽인의 이민을 비판했고 이후에 흑인의 사회경제적 위상의 발전에 전념하는 정치조직으로 전환을 시도했다(Faith 1995, 97). 브라질흑인전선이 정당을 창설하려 했는데, 그러한 이유는 브라질의 정당이 흑인을 배제했기 때문에, 조직된 정치에서 흑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필요했다. 브라질흑인전선은 산업부문에서 인종차별투쟁과 사회적 배제에 대해 투쟁하고자 했다. 또한 일상적으로 극장, 이발소, 호텔, 레스토랑 등에서 실제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인종분리에 대해 투쟁하고자 했다. 브라질 전체에서 흑인은 대중적인 장소에 출입할 수가 없었다. 1930년 군사쿠데타에 의해 제1공화국(1889-1930)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정치공간에서 브라질흑인전선은 개방된 공간의 장점을 활용하고자 했다. 브라질흑인전선은 바르가스 정권을 지지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 주변화 된 흑인이 바르가스 정권에서 정치참여를 위한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7년의 신국가 시대에 바르가스는 모든 정당을 금지시켰고 브라질흑인전선도 1938년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브라질흑인전선의 해체와 함께, 흑인은 자신을 조직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을 찾아야만 했다(Treviño 2005, 96).
이후, 흑인예술가이자 교육자인 나시멩투(Abdias do Nascimento)가 1944년에 “흑인실험극장”(Teatro Experimental do Negro: TEN)을 창설하게 되었다. 흑인실험극장(TEN)은 흑인의 문화적 가치를 제고하고 흑인과 백인 사이에 사회적 상호행위에서 변혁을 위한 예술적ㆍ사회문화적 운동을 대표했다. 흑인실험극장은 동화(同和)가 아니라 차이에 대한 인정과 흑인과 흑인유산의 인정을 주장하면서, 보다 긍정적인 흑인운동의 입장을 발전시켰다. 특히 차이가 불평등으로 전환되는 것의 금지를 요구하면서, 흑인정체성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흑인실험극장의 긍정적 입장은 당시 단체 활동이 금지되었지만 흑인활동가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흑인의 미적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가장행렬을 조직했고 영상예술대회도 조직했다. 이런 행사는 반-인종주의적 법률제정을 목표로 했다. 게다가 흑인실험극장은 ‘킬롱부’(Quilombo)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킬롱부는 모든 브라질인의 무료교육을 제안하면서,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위해 흑인학생에게 장학금을 제공했고, 문화적ㆍ교육적 방식을 통해 인종차별에 투쟁했으며, 브라질 역사에서 흑인후손의 기여를 인정받고자 했다. 중요한 것은 법에서 인종과 피부색에 따른 차별을 범죄로 정부가 규정하도록 요구하고 그러한 범죄의 예방을 위해 투쟁했다(Treviño 2005, 98-99).
나시멩투는 브라질 사회에서 아프리카의 정체성과 문화를 강화하기 위해 흑인실험극장을 창설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흑인이 문화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에 흑인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흑인실험극장의 목표는 연극을 단순히 상연하는 것뿐만 아니라, 흑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투쟁의 수단으로서 연극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중요한 문제는 흑인실험극장을 위한 장소조차 부족했다. 그래서 “전국학생연합(National Student Union: UNE)”이라는 학생조직의 건물에서 업무가 끝나면, 그 이후에 일부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업무공간의 문제를 해결했다. 나시멩투는 흑인실험극장의 구성원으로서 연극에 대한 훈련이나 경험이 없는 사람을 원했기 때문에 흑인실험극장 구성원은 대부분 가사노동자, 학생, 일반노동자들이었다. 또한 취미로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중시하면서 지식인뿐만 아니라 일반 흑인 구성원도 있었다. 흑인실험극장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흑인은 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흑인실험극장 밖에서 자신의 취미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흑인실험극장은 정부검열로 인해 항상 정부와 긴장관계에 있었다(Faith 1995, 110-113).
나시멩투는 문화단체로서 흑인운동의 한계를 느끼면서, 1945년 흑인실험극장(TEN)의 정치조직인 “브라질흑인민주주의위원회”(Comité Democrático Afro-Brasileiro: CDAB)를 창설했다. 브라질흑인민주주의위원회(CDAB)의 창설의 목적은 바르가스 신국가(Estado Novo)의 독재로 인한 정치범의 석방을 위한 것이었다. 브라질흑인민주주의위원회는 흑인과 비-흑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인종적으로 개방적인 조직이었다. 그러나 개방적인 조직이었기 때문에 브라질흑인민주주의위원회에 대한 흑인의 관점은 구성원 사이에 갈등을 유발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내ㆍ외부의 사정으로 인해 브라질흑인민주주의위원회에서 나시멩투가 추방되었고 이에 브라질흑인민주주의위원회는 기능을 멈추게 되었다. 브라질흑인민주주의가 폐쇄된 이후, 흑인실험극장이 브라질흑인민주주의위원회의 정치적 역할을 대신 맡게 되었다 (Faith 1995, 113-115)
흑인실험극장은 상파울루 모임에서 반차별법 요구를 표명했다. 흑인실험극장의 반차별법의 요구와 성명은 많은 정치조직으로부터 공식적 지지를 받았으나, 최종적으로 브라질 의회는 인종민주주의 국가에서 인종차별의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반차별법 제안의 실패는 4년 후에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아퐁수 아리누스(Afonso Arinos)의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브라질 정부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내외부적 요구에 대응하지 않고 있는 동안, 외국인의 영향으로 인해 반차별법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 외국인의 영향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무용가 캐서린 던햄(Katherine Dunham)이 브라질에서 인종차별적 사건을 경험하면서 촉발되었다. 캐서린 던햄의 경험이라는 것은, 그녀가 상파울루의 한 호텔에서 이미 숙박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상파울루 호텔 측은 그녀의 호텔이용을 거부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던햄이 브라질 변호사와 함께 인종차별로 인한 소송을 제기하려 했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브라질은 인종주의와 인종차별이 부정되는 국가이기 때문에, 어떠한 반차별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사회적 쟁점이 되었고 이에 아퐁수 아리누스 의원이 새로운 반차별법 법안을 의회에 발의했고 이것이 통과되면서 유명한 ‘아퐁수 아리누스 법’으로 알려졌다. 비록 브라질이 현재 인종차별을 형법에서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당시의 아퐁수 아리누스 법은 특정한 경우로 엄격하게 인종차별 규정을 제한했고 중범죄로서 보다는 경범죄로서 처벌했다(Faith 1995, 115-119).
제2공화국 시기에(1946-1964) 아퐁수 아리누스 법은 인종정치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반-인종차별운동이 확대되지는 못했다. 제2공화국이 되면서 신국가(1937-1945) 시기에 정치적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흑인운동은 민주적 상황에서 대중운동을 위한 시기가 도래했으나 흑인실험극장에 의해 조직된 모임은 수 백 명을 조금 넘을 뿐이었다. 흑인실험극장이 나름대로 성과를 만들어내는 동안에, 대부분의 국민은 흑인운동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보편주의와 정체성을 강조하는 운동단체 사이에 분열로 인해, 흑인운동의 성장은 한계에 직면해 있었다. 또한 좌파진영에서 계급에 기초한 운동도 흑인운동의 성장에 방해요소로 작용했고, 바르가스 정권에 의해 수용되었던 인종민주주의의 공식적 이념도 흑인운동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게다가 카니발 같은 흑인의 영향을 받은 대중문화의 진흥과 인종적 조화의 이상은 브라질의 정체성에서 아프리카 흑인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또한 흑인종교와 문화적 전통도 인정했는데, 이런 요소도 부분적으로 흑인운동의 발전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Treviño 2005, 102).
제2공화국 시기 동안에 주류 정당 내에서 흑인의 정치대표를 위한 약간의 공간이 제공되었지만 흑인조직의 창설 필요성은 대두되지 않았다. 1945- 1964년 동안은 제2공화국 시기로서 브라질에서 민주주의를 실험하던 기간이었다. 이때 흑인운동에서 대부분의 조직은 문화적 지향성을 갖고 있었다. 가장 활동적인 조직으로서 흑인실험극장은 상대적으로 주변화 되어 있었고, 강력한 흑인의 정치조직은 창설되지 않았다. 1964년 군부쿠데타로 인해 시작된 1964-1985년 군부독재 시기 동안에 권위주의적 정권이 들어서면서 어떠한 형태의 정치조직도 정권의 안정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에 정치조직을 폭력적으로 억압했다. 흑인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흑인운동의 지도자는 투옥되거나 다른 나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유네스코 연구 이후 흑인운동은 군부독재 기간 동안에 억압을 받으면서 정치활동보다는 인종관계를 연구하는 학술연구를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에 모든 친-민주적 조직과 노조, 심지어는 문화단체도 박해를 받았다(Treviño 2005, 104-105).
1970년대 정치개방과 함께, 흑인운동으로서 “흑인 솔 운동”(The Black Soul Movement)은 흑인의 하층 청년과 노동자에 의해 인종의식을 문화적으로 표현하는 운동이었다. 흑인의 하층 청년과 노동자는 가늘고 단단하게 세 가닥으로 땋아 붙인 머리를 하고 말콤 엑스와 프란츠 파농을 인용했다. 이들은 인종적 의식의 표현으로서 ‘흑인선전’을 하는 영화를 보고 솔(Soul)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운동을 주로 펼쳤다. 흑인음악운동으로서 ‘흑인 솔 운동’의 핵심은 삼바학교에 반대하는 것이다. 삼바학교는 유럽계 브라질의 엘리트에 의해 이용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삼바학교가 더 이상 흑인문화를 대표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했으며, 백인지배의 잔존물로서 기능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에 흑인음악운동에 대한 중요한 비판도 존재했는데, 그것은 이들이 미국의 흑인운동(Black Power Movement)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문화현상으로서 흑인음악운동은 새롭게 출현하고 있는 인종의식에 기초하는 정치행위로 전환을 어렵게 한다는 비판도 존재했다. 그러나 미국의 흑인음악운동은 브라질의 흑인에게 인종적 자부심을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 요소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브라질의 흑인음악운동은 브라질의 사회문제를 다루기 이전에 미국의 상황을 미리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흑인선전 영화가 미국에서 사용된 대표적인 착취의 수단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브라질의 흑인음악운동이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는지 여부는 불명확하다. 다른 한편, 흑인음악운동이 인종적 표현을 정치적 행동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논쟁에서, 흑인음악운동은 자신을 흑인으로 보기 시작했고 흑인성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긍정적 효과라고 보았다. “브라질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국가에서 흑인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아프리카 유산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은 흑인의 자부심이었고 그것의 정치적 표현이었다. 흑인 유산에 대한 인정요구는 흑인의식의 정치적 행위로서 첫발을 의미했다(Faith 1995, 128-130).
‘흑인 솔 운동’이라는 흑인음악운동이 주로 문화적 영역에 중심을 두었다면, “단일화된흑인운동”(Movimento Negro Unificado: MNU)은 브라질에서 인종문제의 정치적 측면에 중점을 두었다. 단일화된흑인운동(MNU)은 1978년 상파울루에서 2개의 사건 때문에 출현하게 되었다. 하나는 경찰에 의해 흑인노동자의 고문과 살인이 발생한 것이 원인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피부색 때문에 스포츠클럽에서 일하던 흑인 청년이 해고되는 사건이 원인이 되었다. 이 두 사건의 결과로서 군부정권의 지속적인 억압 때문에 공개적 시위는 위험했으나, 이런 상황에서도 단일화된흑인운동의 일부가 시위를 했다. 이 시위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는데, 이것은 흑인의식 운동으로서 처음으로 발생한 전국적 규모의 시위였기 때문이다. 1978년 약 2천 명 이상이 참여했던 이 시위는 상파울루 시(市) 극장 밖에서 거행되었다. 이 시위의 핵심은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 성공적인 시위 이후에 단일화된흑인운동(MNU)은 시위의 성과에 대한 평가를 하는 토론에서 조직의 새로운 이름에 합의했는데, 새로운 이름은 “인종차별에반대하는단일화된흑인운동”(O Movimento Negro Unificado Contra a Discriminação Racial: MNUCDR)이었다(Faith 1995, 134).
단일화된흑인운동(MNU)은 흑인의 실업, 경제적ㆍ사회적 주변화, 경찰, 정치억압, 성적ㆍ사회적ㆍ경제적으로 착취 받는 흑인여성, 인종민주주의 신화 하에서 고통 받는 인종적 차별을 인정했다. 이런 의미에서 단일화된흑인운동은 인종민주주의 이념에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인종차별을 극복하면서, 정치적으로 흑인의 자유를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인종민주주의 신화가 흑인에 대해 부정적이고 인종적인 고정관념을 내면화하도록 했고, 흑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부심을 갖지 못하도록 했으며, 흑인을 동원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인종민주주의에 의해서 주변화 된 흑인이 인종민주주의의 부정적인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했고, 백인화를 추구했던 흑인을 동원화 시키지 못하도록 했으며, 흑인운동으로서 단일화된흑인운동을 정당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했다고 비판했다. 한편으로, 단일화된흑인운동의 많은 활동가는 노동자당(PT)의 구성원이었지만, 노동자당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 개방적 조직으로서 단일화된흑인운동은 자신의 조직과 인종에 대한 입장을 같이 한다면, 그러한 정당과 개인후보자를 지지했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계급으로부터 인종의 의미를 분리시키려는 어려움으로 인한 전통적 좌파정당의 침묵은 단일환된흑인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계급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인종적 평등에 대한 좌파의 수용성이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2년 좌파인 노동자민주당(Partido Democrático dos Trabalhadores: PDT) 안에서 흑인운동을 인정했고 비슷한 경향은 또 다른 좌파정당인 노동자당(Partido dos Trabalhadores: PT)에서도 흑인운동을 인정하는 등 나름의 성과도 있었다(Treviño 2005, 111-113).
1985년 이후, 시민사회의 민주주의 복귀로 인해 흑인운동은 브라질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경험했다. 많은 흑인의 선거권 획득에서 지속적인 방해요소였던 문자해독력이 선거권 획득의 조건에서 처음으로 제거되면서, 직접ㆍ보편 선거가 출현하게 되었다. 보다 최근에 브라질은 참여민주주의와 함께 연방주와 시(市) 수준에서 민주주의의 경험이 증가했다. 1970-1980년대 정치공간이 점차적으로 개방되면서, 국민의 불만과 함께 국가의 억압수준이 축소되었다. 이에 자기 목소리를 내고 단체를 조직하기 위한 반대세력의 기회가 증가했다. 그러나 군부정권 만이 국내에서 정치개방을 촉진한 유일한 요소는 아니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권위주의적 정권은 시민사회의 등장과 함께 국제적인 영향력 하에 있었다. 국제적인 상황은 브라질의 민주적 개혁에 더욱 우호적으로 변모했다. 브라질에서 민주적 이행(1985)으로 인해, 진보정당과 정치인이 권력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인해 정당과 개인이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Treviño 2005, 124-125).
브라질의 흑인운동에서 가장 중요했던 시기는 1988년 노예해방 100주년 기념행사였다. 1888년 5월 13일 이사벨 공주가 “황금률”(Golden Law)에 서명함에 따라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1988년 문화부가 주관하는 “노예제 폐지: 신화 또는 현실?”에 대한 회의를 히우에서 개최하기로 했으나 흑인운동의 반대로 그 회의가 취소되었다. 흑인운동은 “흑인을 노예제에서 풀어주라”라는 정당성을 이사벨 공주에게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노예제의 폐지는 줌비(Zumbi dos Palmares) 같은 흑인후손의 저항운동으로 인해 성취했다고 주장했다. 1988년 5월 11일 5천명이 히우에 모여서 노예제 폐지 100주년 기념을 위해 시위했다. 그 시위의 핵심주장은 이사벨 공주를 더 이상 흑인운동의 영웅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흑인운동은 5월 13일을 노예해방의 기념일 대신에 흑인이 축하해야 할 기념일로서 11월 20일로 날짜를 변경하고 이름을 “줌비의 날”(Zumbi Day)로 지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흑인의식의 날”(Day of Black Consciousness)로 변경되었다(Mitchell-Walthour 2018, 15-18).
민주화 이후 1990년대 중반부터 흑인 NGO 단체가 설립되면서 흑인운동이 강화된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이제는 직업으로서 흑인단체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활동을 하기 때문에 보다 안정되고, 보다 체계적이며,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흑인운동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 시민단체와 해외 시민단체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 흑인 NGO 단체가 흑인운동을 강화했다고 할 수 있다(Gladys 2010, 164-168). 1995년부터 흑인운동은 인종정책에 대한 압력을 정부에 행사할 수 있었고 이에 브라질의 인종정책에서 주요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브라질 정부는 1996년 처음으로 브라질에서 인종차별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90년대 후반에 여러 정부위원회 모임은 흑인운동 활동가, 교수 등으로 조직되었고 정부는 인종 중심적 정책에 대해 논의했다. 이러한 결과는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된 “인종주의에 대한 더반 회의”(Durban Conference on Racism)의 보고서에 담겨져 있다. 이 보고서 중에서 인종전략적인 것으로써 대학입학에서 차별금지법을 제안했다. 그리고 2002년 인종-목표적 정책이 대학입학에서 수용되었다(Farah 2007, 945).
Ⅴ. 브라질에서 인종정치의 특징
5.1 브라질의 인종불평등
<표 1>에서 보듯이 브라질의 인종구성의 변화를 보면, 백인은 1872년 37%에서 1940년 64%로 최고 정점을 거쳐서 2000년에 54%의 비율을 차지했다. 혼혈인은 1872년 44%에서 시작해서 1940년 21%로 최저점을 거쳐서 2000년 40%까지 완만히 증가했다. 흑인은 1872년 19%로 최고점에서 시작하여 2000년 6%까지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표 2>에서 2000년의 인종과 지역에 따른 인구분포를 보면, 백인은 남부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그다음은 남동부 지역이다. 혼혈인은 북부와 북동부 지역에 주로 분포한다. 흑인은 북동부 지역에 가장 분포한다. <표 3>에서 소득분포를 보면, 하위 50%는 1960년 18%에서 2000년 11%로 완만히 감소했다. 상위 20%는 1960년 총소득의 54% 비율을 보였고 2000년에 64%의 비율을 보여주면서 완만히 증가했다. 불평등지수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표 4>에서 인종과 성별에 따른 평균소득을 보면, 백인 남성은 최소임금의 6.3배를 나타냈고, 백인 여성은 3.6배를 나타냈다. 백인 남성의 평균소득은 백인 여성의 1.7배이다. 백인 남성의 평균소득은 흑인 남성의 2.1배이다. 백인 남성의 평균소득은 흑인 여성의 3.7배로 나타났다.
<표 5>에서 1996년 인종과 성별에 따른 실업률을 보면, 브라질 전체평균은 6.9%이고, 남성은 5.7%, 여성은 8.8%, 백인은 6.6%, 흑인은 7.7%로 나타났다. 남성의 관점에서 실업률이 가장 낮은 곳은 남부지역이고, 가장 높은 곳은 중서부지역이다. 백인의 관점에서 실업률이 가장 낮은 곳이 남부지역이고, 가장 높은 곳은 중서부지역이다. 흑인의 관점에서 실업률이 가장 낮은 곳은 북동부지역이고, 가장 높은 곳은 남동부와 중서부지역이다. <표 6>에서 1998년 지역과 인종에 따른 빈곤층의 비중을 보면, 백인의 빈곤층이 가장 낮은 곳이 남동부지역이고, 가장 높은 곳이 북동부지역이다. 혼혈인의 빈곤층이 가장 낮은 곳이 남동부지역이고, 가장 높은 곳이 북동부지역이다. 흑인의 빈곤층이 가장 낮은 곳이 남동부지역이고, 가장 높은 곳이 북동부지역이다. <표 7>에서 1996년 인종과 성별에 따른 평균 교육연수를 보면, 브라질 전체평균은 5.3년이고 백인평균은 6.2년이며, 흑인평균은 4.2년이다. 브라질 전체평균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남동부의 평균 교육연수는 6년이고, 백인평균은 6.6년이며, 흑인평균은 4.9년이다. 브라질 전체평균에서 가장 낮은 지역인 북동부의 평균 교육연수는 3.9년이고, 백인평균은 4.8년이며, 흑인평균은 3.5년이다. <표 8>에서 1996년 15세 이상의 브라질 인구 중에서 인종에 따른 교육연수 비중을 보면, 브라질 전체에서 4-8년 구간이 42.4%로서 가장 높고, 12년 이상 구간이 7.5%로서 가장 낮다. 백인은 4-8년 구간과 9-11년 구간이 높았다. 혼혈인은 4-8년 구간이 제일 높고 1년 이하 구간이 그다음이다. 흑인은 혼혈인과 순서가 같다.
<표 9>에서 1997년 기대수명에서 백인은 70세이고, 비백인은 64세이다. 유아사망률은 백인이 37명이고, 비백인은 62명이다. 성인 문해율은 백인 92%이고, 비백인은 72%이다. 학교등록률은 백인 82%이고, 비백인은 73%이다. <표 10>에서 1996년 인종, 소득, 교육 정도에 따른 기대수명을 보면, 가장 낮은 소득 구간에서 기대수명은 백인이 59.5세이고, 비백인은 55.8세이다. 가장 높은 소득 구간에서 백인의 기대수명은 70.4세이고 비백인은 63.7세이다. 교육의 경우 1-4년 구간에서 보면, 백인의 기대수명은 66.2세이고, 비백인의 기대수명은 62.2세이다. 4년 이상의 구간에서 보면, 백인의 기대수명은 72.3세이고, 비백인의 기대수명은 66.6세이다. <표 11>의 설문을 보면, 브라질에서 흑인이 노예로서 자유롭게 된 것이 100년 전이다. 흑인의 삶이 백인의 삶보다 더 나쁜 것은 누구의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백인의 72%는 흑인에 대한 백인의 편견과 차별이 원인이라고 대답했고, 흑인의 72%도 동일하게 대답했다. 백인의 27%가 현존하는 기회를 사용하지 못한 흑인이 원인이라고 대답했고, 흑인의 27%도 백인과 동일하게 대답했다. 흑인과 백인 사이에 동등한 삶을 위한 기회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백인의 67%가 차별이 존재한다고 대답했고, 흑인의 67%도 차별이 존재한다고 대답했다. 백인의 33%는 흑인과 백인 사이에 동등한 기회가 존재한다고 대답했고, 흑인의 33%도 백인과 동일한 비율로 대답했다. 흑인이 향상된 직업과 삶을 위해 노력할 때, 인종차별이 그것을 방해하는가? 라는 질문에 백인의 77%가 “예”라고 대답했고, 흑인의 86%가 “예”라고 대답했다. 백인보다 흑인이 덜 동기부여 되어 있다고 대답한 백인은 16%였고, 흑인은 13%였다.
요약하자면, 브라질에서 백인 인구는 장기적으로 증가했으나 흑인 인구는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에 따른 인구분표를 보면, 백인은 남부와 남동부 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고 흑인은 주로 북동부와 남동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수입의 집중도를 보면, 하위50%는 장기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나, 상위20%는 장기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에 불평등지수도 장기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인종과 성별에 따른 평균소득을 보면,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의 격차가 제일 크다. 지역과 인종에 따른 빈곤층을 보면, 백인은 빈곤층 평균이 16.2%이고, 혼혈인은 26.3%이며, 흑인은 27.4%로 나타났다. 백인은 인구비중에서 가장 많지만 빈곤율은 가장 낮게 나왔고, 인구비중에서 흑인은 가장 적지만 빈곤율은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인종에 따른 교육연수 비중을 보면, 9년 이상의 교육연수가 백인은 31.2%, 혼혈인은 16.1%, 흑인은 13.6%로 나타났다. 3년 이하의 교육연수 비중을 보면, 백인은 25.1%, 혼혈인 42.9%, 흑인은 44.7%로 나타났다. 즉 9년 이상 교육 비중에서 백인이 가장 높고 흑인이 가장 낮게 나타났다. 인종, 소득, 교육정도에 따른 기대수명에서 백인이 전반적으로 높게 나타났고 비백인은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 인종에 대한 불평등의 의식평가를 보면, 전반적으로 인종적 편견과 차별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고 브라질인은 평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브라질에서 인종불평등이 존재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5.2 브라질의 인종차별
1995년과 2000년에 브라질의 성인을 대상으로 한 태도조사에서, 브라질의 노동시장에서 인종차별은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의 조사에서 히우 총인구의 54%가 브라질 사회에서 인종적 갈등이 상당하다고 했다. 1995년에 브라질의 전국조사에서 흑인은 혼혈인에 비해 고용과 승진에서 2배 이상으로 차별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대부분의 인종차별은 공식교육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으로써, 노동시장의 차별이 공식교육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나타났다(Telles 2004, 160). 즉 인종차별은 한편으로, 공식교육을 통한 노동시장에서 교육격차에 따른 차별이 발생하고, 다른 한편으로, 공식교육 과정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의 형성에 의해서도 인종차별이 발생한다.
브라질의 공식교육은 학생들에게 교육내용과 학교생활을 통해서 ‘존재와 지식의 식민성’을 형성시키고 있다. 브라질에서 노예제에 의해 백인은 우월하고 흑인은 열등하다는 의식이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백인이 우월하다’는 인식 즉 백인성(Whiteness) 그리고 ‘흑인은 열등하다’는 인식인 흑인성(Blackness)이 생성되었다. 브라질에서 백인성은 똑똑함, 멋짐, 깨끗함, 우애, 신뢰 등을 의미한다면, 흑인성은 멍청함, 우둔함, 더러움, 배신, 노예 등을 의미한다. 이에 브라질의 사회적ㆍ정치적 체제의 최상층은 자신의 정당한 특권을 위한 수단으로서 백인성을 사용했다. 검은 피부색의 소유자인 흑인은 낮은 사회적 위상의 기초가 되었고, 이에 흑인은 사회적 위계의 가장 낮은 곳에 남게 되었다. 브라질의 공식교육은 백인성의 선호와 흑인성의 폄하라는 광범위한 사회적 편견을 제도화 하고 있다. 즉 공식교육을 통한 식민성의 효과로서 첫째, 위계적인 인종적ㆍ문화적 분류에 따라 특권과 명예를 불균등하게 배분했다. 백인성은 높은 신분적ㆍ계급적 위상, 지적 능력, 발전, 근대성을 상징했다. 반면 흑인성은 낮은 신분적ㆍ계급적 위상과 함께 문화적 후퇴 등을 상징했다. 둘째, 브라질 역사, 세계관, 공동체 방식, 의미 형성, 문화적 실천 등에서 아프리카ㆍ흑인은 열등하고 전근대적, 민속적, 정적인 전통은 흑인의 문화와 혼합으로 취급했다. 식민시대에 기원했던 유럽중심적인 인식론적 관점은 백인과 유럽적 문화만이 정당하고 건설적인 생산자로서 인식되었고 유용한 지식, 역사, 문명의 생산자로서 평가되었다. 셋째, 인종적 그리고 문화적 혼합과 함께 인종민주주의는 교육자로 하여금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종차별과 인종불평등에 대해 다루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교육자는 인종차별적 언어와 행위를 다루는 것을 피하려 했다. 또한 일반적인 문제로서 인종차별주의는 최소로 다루려 했다. 결국 교육제도는 아프리카와 흑인 후손의 열등성, 배제, 불평등을 지속시키는 위계제를 공고화 하는데 일조했다(Da Costa 2014, 115). 이처럼 브라질의 백인성은 사회적 자본으로서 기능했다. 사회적 자본은 상호인식과 상호인정으로부터 제도화 된 지속적 관계망의 소유와 관련이 있는 현재적이고 잠재적인 가치가 있는 어떤 것(자본)이다. 계급전략으로서 사회적 자본인 백인성은 미래에 여러 분야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관계자본의 전환률(변환률)을 증가시키고 관계자본 규모의 크기를 확대함에 따라 교육ㆍ취업ㆍ승진ㆍ사회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 브라질에서 사용되었다(김달관 2018, 169). 즉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백인성은 브라질 사회에서 백인이 그 자체로 효율성이 높은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사회적 자본은 사회적 자본의 공동체적 관계망을 강조했다. 사람과 더 많은 사회적 관계를 맺을수록 더 많은 신뢰를 형성하게 되고, 이에 따라 사회적 자본은 사람 사이의 신뢰, 상호성의 원칙, 사회적 참여를 통해 개인에게 이로운 결과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자본은 서로 간의 상호적 인식과 인정의 공식적, 비공식적 관계에 따라 개인과 집단에서 발생하는 자원(자본)의 총합이라는 것이다(김달관 2018, 172). 또한, 호즈 프리맨(Hordge-Freeman)은 브라질에서 사회적 자본으로서 백인성은 정서적 자본(Affective Capital)이라고 했다(Hordge-Freeman 2015, 5). 정서적 자본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지지를 받기 위해 한 개인이 성취한 정서적, 심리적 자원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백인성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본으로 구성되면서 대체율이 높은 자본이 되었다. 이에 따라 하나의 자본은 다른 자본과 관계를 맺게 되면서, 이렇게 서로 관련된 자본은 한 개인이 사회에서 차지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결정했다. 현재도 브라질의 일상적 삶은 백인성/흑인성의 경계선 유지를 위한 상징으로 만연하다.
공식교육에서 내부 식민성의 효과와 관련하여, 미국의 흑인 작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은 식민성의 “미(美) 의식은 인류의 사상사 중에서 가장 파괴적인 사상” 중의 하나라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미의식은 시기와 질투를 유발시키고 불안과 환멸을 야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의 개념은 아름다움으로서 사람과 물건을 규정하면서 어떤 것의 가치 없음과 가치 있음을 결정한다. 또한 식민적 미의식의 위험은 미의 개념이 좋음과 나쁨, 기독교와 이교도, 깨끗함과 더러움, 도덕과 비도덕 같은 이분법에 억압적이고 협소한 규정으로 적용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가장 파괴적인 행위로서 미의식은 누가 사람이고 누가 사람이 아닌지 결정하도록 했다. 역사적으로 백인우월성의 출현은 식민시대의 이분법에 의존했다. 이런 이분법은 흑인을 타자로서 인종화 했던 만큼이나 폭력적이었다. 흑인의 “외모의 추함”(Ugliness of Appearance)에 대한 담론과 흑인의 “어리석음”(Stupidity)의 증거는 흑인의 노예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미적 그리고 도덕적 결핍이 있는 육체와 관련되어 있다. 인종적 평가에 대한 제도화 된 체계는 아프리카의 흑인을 무시하면서, 흑인의 육체를 나쁜 것으로 또는 불쾌한 것으로 경시했다. 이와 같은 피부색의 상징주의는 흑인의 육체가 위험하고 잠재적인 악으로서 유럽중심주의적인 종교개념에 의해 육화(肉化)되었다. 브라질에서 흑인 여성은 특정한 색깔을 사용할 권리가 부정되었다. 흑인 여성은 화려한 색깔의 머리띠로 머리를 장식하는 것, 화려한 색깔의 신발 또는 의복을 입는 것 등이 금지되었다. 이처럼 “타자”의 재현 또는 외모의 통제는 백인성과 미(美)개념 형성에 중요한 요소였다. 이런 방식으로 흑인을 추하게 만듦으로써 백인이 아름다울 수 있었다. 미에 대한 흑인 여성의 접근을 부정하려는 의도는 미에 대한 흑인 여성의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맥락으로 존재했다(Hordge-Freeman 2015, 73-74). 브라질에서 최종적인 미의 이상은 “푸른 눈의 금발”이었다(Hamilton 2001, 124).
브라질에서 인종차별은 백인과 유색인뿐만 아니라, 유색인과 다른 유색인 사이의 관계도 포함한다(Sheriff 2001, 84). 뿐만 아니라 같은 부모의 형제자매라도, 인종적으로 다른 형제자매가 있는 경우 그리고 부모-자식, 형제간, 자매간, 형제-자매간에도 많은 인종적 갈등이 발생했다(Hordge-Freeman 2015, 104). 똑같은 형제라도 경제적 성공여부와 교육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집단으로 구분되면서 갈등이 발생했다. 즉 브라질에서 피부색에 관한 갈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러다 보니까 백인을 부르는 호칭은 몇 개 되지 않지만, 흑인을 부르는 호칭은 1976년 연구에서 135개의 서로 다른 호칭이 존재함을 밝혀냈다. 이처럼 흑인을 부르는 다양한 호칭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회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써 흑인이라고 해도 좀 더 밝은 피부색을 의미하는 다른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갈등을 회피하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흑인에 대한 호칭은 ‘완전한 흑인’이 아니고 싶은, 또는 ‘완전한 백인’이 되고 싶은 희망을 반영한다(Reichmann 1999, 8). 브라질의 일상에서 인종은 민감한 문제로서 일반적으로 피부색이 중요하지만 머리카락의 형태, 머리카락의 색깔, 눈의 색깔, 눈의 모양, 코의 모양, 입술의 모양, 엉덩이의 형태 등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물라타(Mulata)와 흑인의 차이점으로서 피부는 둘 다 검은 피부색으로 공통점이 있지만, 머리카락을 빗으로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곱슬머리이면 흑인이고, 약간 곱슬머리이거나 직모인 경우에 물라타로 구분된다.6) 이것은 피부색이 검은 브라질 여성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물라타라는 정체성이 흑인보다 더 긍정적이고 경제적으로도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브라질 여성은 물라타의 신분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Judith 2004, 118). 지역적으로 특히 브라질 북부의 여성에게는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물라타라는 정체성은 직장, 연애, 친구관계, 임금 등에서 보다 좋은 조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브라질의 여성은 경제적으로 사정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최소임금의 1/10에 해당하는 비용을 치르면서, 4주에 한 번씩 미장원에 가서 꼭 머리를 손질한다(Hordge-Freeman 2015, 86-93). 이처럼 외모에 의한 인종차별은 다양하다. 예를 들면, 1980년대까지 “용모단정”(Boa Aparência)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흑인을 차별했는데, 용모단정의 실질적 의미는 ‘오직 백인 만’이라는 의미의 순화된 표현이다. 심지어 ‘좋은 건강’(Good Health), ‘좋은 치아’(Good Teeth), ‘모습이 남 앞에 내놓을 만한’(Presentable) 등은 실제로 고용광고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이것의 실제적 의미는 고용에 있어서 흑인과 혼혈인을 제외한다는 의미였다. 직접적인 ‘인종차별’에서 간접적인 ‘미적 차별’(Aesthetic Discrimination)로 차별방식의 변화는 인종민주주의 이념의 등장으로 지속적이었다(Telles 2004, 160).
앞의 예에서 본 것처럼, 물라타와 흑인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가난한 집안의 흑인 여자아이는 물라타와 흑인의 차이를 구별한다면, 부자인 집안의 백인 여자아이는 물라타와 흑인을 따로 구별하지 않고, 물라타를 흑인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했다. 즉 부자인 집안의 백인 여자아이는 흑인과 백인으로만 인종을 구별했다. 부자인 집안의 백인 여자아이는 ‘밝은 혼혈인’(Morena Clara)을 백인의 일부로 구분하고, ‘어두운(검은) 혼혈인’(Morena Escura), 물라타, 흑인 등을 모두 흑인으로 구분했다. 부자인 집안의 백인 여자아이에게 물라타와 흑인의 진정한 차이점은 피부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ㆍ부ㆍ예의바름 등에 있는 것이다. 물라타란 직모를 가진 흑인, 부자인 흑인, 예의 바른 흑인에게 듣기 좋으라고 부를 때, 물라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물라타라는 호칭은 흑인보다 안전하고 덜 공격적인 호칭이다. 왜냐하면, 흑인은 노예제 시대에 가난한 사람이었고 노예였기 때문에 흑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격적이고 무례한 호칭일 수 있으나 물라타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라타는 보다 애정 어린 느낌이 있고 덜 공격적인 호칭이라 할 수 있다(Judith 2004, 119-121).
브라질에서 인종차별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에서 모두 발생한다. 공적 공간에서 교육, 소득, 건강, 대우 등에서 인종차별은 정부기관에 의해 확인되었다. 밝은 피부색의 보유자가 교육의 관점에서 보다 검은 피부색 보유자보다 더 선호되는 국가의 사회적 상호행위에서 만연하다. 또한 흑인과 백인 사이에 소득 불평등이 2003-2010년 동안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으로 백인노동자가 흑인 노동자보다 1.8배 더 많이 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학교육을 받은 백인은 2006년 흑인ㆍ혼혈인과 비교했을 때, 백인은 4배 이상의 소득 격차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보다 검은 피부색을 가진 자는 경찰의 폭력적 사건에 휘말릴 가능성이 백인보다 더 높았다. 높은 사회적 지위에(엔지니어, 변호사, 의사 등) 있는 흑인도 직장에서 인종차별을 겪는데, 이 경우는 주로 외부인에 의한 인종차별이다(Mitchell-Walthour 2017, 680-681). 다른 예를 들면, 중산층 흑인이 중산층 백인과 함께 다른 중산층 백인 모임에 가면, 중상층 흑인을 다른 중산층 백인에게 소개할 때는 꼭 이름과 함께 직업 또는 직책 또는 중산층의 상징을 언급한다. 그러나 중산층 백인을 소개할 때는 이름만 소개한다(Telles 2004, 232).
사적 생활에서 인종차별은 가족 안에서 발견된다. 많은 이종혼혈과 함께 인종적 유토피아의 명성을 브라질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히우 지역의 연구에서 이종혼혈의 족외혼 부부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음이 밝혀졌다. 게다가 이종혼혈의 족외혼 부부를 조사할 때, 족외혼 부부의 가족은 흑인 배우자에 반대하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또한 가족 내에서, 피부색에 따라 자녀들을 다르게 대우했다. 부모들은 검은 피부색의 자녀보다는 보다 밝은 피부색의 자녀에게 더욱 투자했다. 부모들은 밝은 피부색을 가진 자식의 육체적인 특징을 격려했고, 보다 어두운 피부색을 가진 자식에게는 관심을 덜 보였다. 이처럼, 사적 영역에서조차 인종적 편견은 흑인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또한 친구와 가족 사이에 많은 인종차별 행위는 인종차별행위로서 보다는 ‘농담’의 형태로 발생한다. 농담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으로, 인종적으로 의식이 깨어 있는 흑인은 인종차별에 보다 민감하고 어두운 피부색을 가진 자보다 전반적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이 높다. 흑인은 혼혈인 보다 피부색에 기초한 차별 경험을 인정할 가능성이 더 높다(Mitchell-Walthour 2017, 681-682).
1988년 신헌법에서 인종차별을 범죄로 규정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종차별은 비방, 중상모략으로 처벌했다. 그러나 1997년 형법의 개정을 통해 인종차별을 인종범죄로 규정하여 엄격히 처벌하도록 했다(Alfredo 2003, 134). 1997-1998년 동안에 상파울루에서 인종차별은 직장 내에서 36%로서 가장 많이 발생했고, 2위는 소비로서(24%) 일상생활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종차별이었고, 3위는 이웃, 주거건물로서(21%) 이웃 간의 주거건물에서 발생한 인종차별의 분쟁이었다(Alfredo 2003, 135). 인종차별로서 인종적 모욕은 어떤 상태에서 발생하는가? 일반적으로 인종적 모욕은 갈등기간에 또는 갈등이 발생하려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또한 인종적 모욕은 갈등의 마지막 단계에서 사용하는 무기이다. 어떤 동기와 갈등에서 인종적 모욕이 발생하고 어떤 상황에서 인종적 모욕이 발생하는가?(Alfredo 2003, 140-142). 첫째, 관련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긴장이 발생하고 어떠한 이유로 인해 상당히 피곤했을 때, 인종적 모욕이 발생한다. 특정한 순간에 쌍방 중에서 일방이 화가 난 상대방에게 체계적으로 창피를 주기 위한 방식으로서 인종적 모욕을 사용한다. 둘째, 일상적인 말싸움 중에, 논거의 수단이 바닥나고 그럴듯한 위협을 할 때, 희생자가 받아들이지 않거나 또는 동의 획득에 실패한 경우, 인종적 모욕을 희생자에게 주면서 말싸움을 끝내려고 사용한다. 이 경우 인종적 모욕은 말싸움에서 갈등으로 이행을 보여준다. 인종적 모욕의 표현은 희생자의 피부색에 따라 검은 피부색을 가진 자에게 불쾌함과 거만함의 표현으로서, 인종적 반감의 태도라는 특징이 있다. 셋째, 공격자의 혐오를 유발하는 실수를 희생자가 일으켰을 때, 인종적 모욕이 발생한다. 공격자가 인종주의적 성향이 있는 경우, 불필요하게 적대적인 경우, 이전의 사건에 의해 동기가 있는 경우, 이런 상황에서 인종주의적 모욕이 발생한다. 넷째, 갈등이 없는 경우에도, 공격자와 희생자 사이에 인종적 분리를 표명하는 극단적 방식으로서 단순한 인종적 모욕이 발생한다. 이것은 사회적 분리에 대한 요구이다. 다섯째, 실수를 한 경우, 비난하기 위해 또는 그러한 실수를 고치려는 입장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위험요소를 갖고 있는 주체는 규칙을 이행하도록 할 의무가 있는 자이거나 사무실에서 그들의 의무를 실행해야 하는 즉 사회적 약자인 흑인들이다. 인종적 모욕을 하는 공격자가 남성인 경우가 여성보다 많고 그러한 피해자는 여성이 더 많게 나타났다. 모욕을 하는 공격자의 피부색은 백인이 압도적이고 피해자의 피부색은 압도적으로 흑인으로 나타났다(Alfred 2003, 144).
Ⅵ. 결론
브라질은 현존하는 인종불평등과 함께 자유로운 다인종사회, 평등사회를 진흥하는 인종민주주의 이념이 아직도 양립한다. 건강한 흑인유산의 인정 없이, 또는 현존하는 인종불평등과 차별의 인정 없이 인종민주주의 이념에 반대하기 위해 흑인공동체를 동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브라질에서 유럽계 통치엘리트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흑인운동은 유럽계 소수 엘리트의 지배에 대해 다양한 방식의 저항을 보여주었다. 노예제 시기 동안에 이러한 전략은 킬롱부를 형성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노예제 폐지 이후, 흑인은 브라질 사회에서 차별적 현실에 직면하여 흑인유대감의 발전과 유지를 위해 투쟁했다. 특히 많은 예술가와 흑인활동가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방식으로 흑인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시도하면서, 브라질 사회에 흑인후손의 긍정적 이미지를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브라질 엘리트는 ‘브라질 정체성’에서 흑인의 문화적 요소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Faith 1995, 3-4). 이러한 과정에서 브라질이 민주화되면서 흑인공동체는 계급보다는 인종에 중심을 두는 방식으로 정치적 저항운동으로 변모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런 시도는 2002년 차별철폐 제도로서 할당제를 이루어 내는 성과를 이루어 내기도 했다.
브라질의 인종정치에서 가장 피해를 보았던 흑인운동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사회문화 운동에 주력하는 문화정치의 한계를 느끼고 정치구조의 변화를 시도하는 정치문화로 전환을 시도했다. 따라서 브라질도 에콰도르와 볼리비아처럼 탈식민적 개혁에 중심을 두는 탈식민적 정치(Decolonial Politics)를 고려해야 한다. 탈식민적 정치는 노동(신분), 지식생산체계(인식), 권위의 형성(가부정적 그리고 제도적), 상호주관적 관계(존재/비존재) 등과 인종구분이 위계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체제에서 권력의 식민적 기반과 경쟁하는 것이다. 권력의 식민적 기반은 ‘타자’를 규정하고 무시하며 불균등한 통합을 시도한다. 권력의 식민적 기반은 이상적이고 우월한 것으로서 백인성을 정당화하고 제도화하기 위해 세계관, 문화, 인종을 위계적으로 질서 지웠다(Da Costa 2014, 3). 이에 탈식민적 정치는 타자의 인식, 타자의 지식과 이해의 원리 등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타자의 경제, 타자의 정치, 타자의 윤리를 배경으로 하는 식민성의 경험으로부터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브라질은 역사적으로 이종혼혈, 인종민주주의, 할당제, 타 인종에 대한 관용, 인종의 애매성 등이 존재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면서 다문화성을 도입했다. 실제에 있어서 브라질은 인식하든 하지 않든지 간에, 식민 시대부터 다문화 사회였으나, 신자유주의의 도입으로 다문화성이 표면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문화성이 수용된 지 약 20여 년 동안 인종불평등과 인종차별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다문화성은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다원성과 불평등한 통합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 역사는 식민시대가 시작되면서 다문화사회였으나, 사회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관점에서 에콰도르와 볼리비아는 상호문화성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에콰도르와 볼리비아는 200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대표적으로 탈식민적 국가개혁을 시도한 국가로서 다국민국가(Estado Plurinacional)와 상호문화성을 신헌법에 규정하고 있다. 원어로는 에콰도르에서 케추아어로 수막 카우사이(Sumak Kawsay)로 표현되고 볼리비아에서 아이마라어로 수마 카마냐(Suma Qamaña)로 표현되고 있다. 상호문화성은 기본적으로 타자를 대등하게 인식하면서 평등한 다원성과 평등한 통합을 지향한다. 상호문화성은 타자를 대등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타자의 인정여부가 중요한데, 이때 상호문화성의 도덕적인 측면이 발생한다. 그리고 타자를 인정하고 불평등한 상황을 평등한 상황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국가개혁이 필요한데, 이때 상호문화성의 정치적 측면이 대두된다. 즉 상호문화성은 궁극적으로 문화적 측면을 중시하겠지만, 그러한 과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상호문화성의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 탈식민적 정치의 하나로서 상호문화성은 하나의 문화, 하나의 인종, 하나의 정체성, 하나의 언어, 하나의 국민에서 복수의 문화, 복수의 인종, 복수의 정체성, 복수의 언어, 복수의 국민 등으로 이행으로서 유일보편성에서 다(多)보편성 및 이(異)보편성으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김달관 2011, 27).
Acknowledgments
여러 논문심사자의 유익한 논평으로 인해 본 논문의 내용이 더 좋은 논문으로 나오게 된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참고문헌
-
Kim, DalKwan(2011), “Reforma Descolonial del Estado en Ecuador: Desde Estado Nacional a Estado Plurinacional”, Iberoamerica, Vol.13, No.2, pp.1-31.
김달관, 「에콰도르의 탈식민적 국가개혁: 국민국가에서 다국민국가로」, 이베로아메리카. -
Kim, DalKwan(2015), “Decolonial State Reform in Bolivia: From Multiculturalism to Plurinationalism”, Latin America and Caribbean Studies, Vol.34, No.2, pp.75-116.
[
https://doi.org/10.17855/jlas.2015.06.34.2.75
]
김달관, 「볼리비아의 탈식민적 국가개혁: 다문화성에서 다국민성으로」, 중남미연구 -
Kim, DalKwan(2017), “Political Transition Factors from Brazilian Military Regime to Civilian: 1964-1985”, Revista Iberoamericana, Vol.28, No.3, pp.75-114.
김달관, 「브라질 군정에서 민정으로의 정치적 이행요인들: 1964-1985」, 이베로아메리카연구. -
Kim, DalKwan(2018), “Race and Inequality in Brazil: Whiteness as Social Capital”, Journal of International Area Studies, Vol.22, No.3, pp.165-208.
[
https://doi.org/10.18327/jias.2018.10.22.3.165
]
김달관, 「브라질의 인종과 불평등: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백인성」, 국제지역 연구. - Alberto Paulina(2011), Terms of Inclusion,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 Alfredo, Antonio(2003), “Racial Insult in Brazil”, Discourse & Society, Vol.14, No.2, pp.133-151. [https://doi.org/10.1177/0957926503014002484]
- Alvarez, Sonia et al.(1998), Cultures of Politics, Politics of Cultures. Revisioning Latin American Social Movements, West View Press.
- Augusto, Sales(2014), “Affirmative Action and Political Dispute in Today's Brazilian Academy”, Latin American Perspectives, Vol.41, No.5, pp.141-156. [https://doi.org/10.1177/0094582X14544279]
- Bailey, Stanley(2002), Brazilian Racial Attitudes: Patterns, Determinants, Consequences, Ph. D. Dissertation of the University of Califonia at Los Angeles.
- Benedito, Vera(2005), The Quest for Afro-Brazilian's Equal Opportunity: The Articulations of Affirmative Action Policies and Programs by Afro-Brazilian Advocacy Organizations and the State in Brazil, 1990-2004, Ph. D. Dissertation of the Michigan State University.
- Butler, Kim(2000), Freedoms Given, Freedoms Won: Afro-Brazilian in Post-Abolition São Paulo and Salvador, Rutgers University Press.
- Caldwell, Kia(1999), Ethnographies of Identity: (Re)Constructing Race and Gender in Contemporary Brazil, Ph. D. Dissertation of 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 Da Costa, Alexandre(2014), Reimagining Black Difference and Politics in Brazil, Palgrave Macmillan. [https://doi.org/10.1057/9781137386342]
- Da Silva, Sérgio et al.(2004), “Paving Paradise. The Road from “Racial Democracy” to Affirmative Action in Brazil”, Journal of Black Studies, Vol. 34, No. 6, pp.787-816. [https://doi.org/10.1177/0021934704264006]
- Daniel, Reginald(2006), Race and Multiraciality in Brazil and the United States: Converging Paths?,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 Faith, Kimberly(1995), A Luta Continua. Afro-Brazilian Mobilization within the Context of Racial Democracy: O Movimento Negro 1978-1994, Ph. D. Dissertation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at Los Angeles.
- Farah, Luisa(2007), “Does Money Whiten? Intergenerational Changes in Racial Classification in Brazil”,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Vol.72, December, pp.940-963. [https://doi.org/10.1177/000312240707200605]
- Ferreira, Aparecida(2004), Addressing Race Ethnicity in Brazilian Schools: A Study of EFE Teachers, Ph. D. Dissertation of the University of London.
- Furuichi, Satomi(1999), On Understanding Racial Inequality in Brazil, Ph. D. Dissertation of 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 Gladys, Bernd(2010), Brazil's New Racial Politics, Lynne Rienner Publishers.
- Hamilton, Charles et al.(2001), Beyond Racism. Race and Inequality in Brazil, South Africa, and the United States, Lynne Rienner Publishers.
- Hindert, Nicole(2016), The Jeito of the Brazilian Mulata: Race and Indentity in a Racial Democracy, Ph. D. Dissertation of George Mason University.
- Hordge-Freeman, Elizabeth(2015), The Color of Love. Racial Features, Stigma, and Socialization in Black Brazilian Families, University of Texas Press.
- Judith, Jennifer(2004), Reading Race: Adolescent Girls in Brazil, Ph. D. Dissertation of the University of Arizona.
- Larkins, Erika(2015), The Spectacular Favela: Violence in Morden Brazil,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Magalhães, Lilia(2006), Race and Quotas, ‘Race in Quotas’: The Struggle over Racial Meanings in Two Brazilian Public University, Ph. D. Dissertation of New School University.
- Mitchell-Walthour, Gladys(2018), The Politics of Blackness. Racial Identity and Political Behavior in Contemporary Brazil, Cambridge University Press. [https://doi.org/10.1017/9781316888742]
- Monk, Ellis(2013), Color, Bodily Capital, and Ethnoracial Division in the U.S. and Brazil, Ph. D. Dissertation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y.
- Reichmann, Rebeca(1999), Race in Contemporary Brazil: From Indifference to Inequality,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 Reiter, Berd(2003), Racism, Democracy, and Civil Society in Brazil: Comparing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with Neighborhood Associations in the State of Bahía, Ph. D. Dissertation of the City University of New York.
- Rice, Eric(2002), Freezing Culture in the Tropics: The Race of Resistance in Bahia Candomble, Ph. D. Dissertation of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 Sansone, Livio(2003), Blackness without Ethnicity. Construting Race in Brazil, Palgrave Macmillan. [https://doi.org/10.1057/9781403982346]
- Selka, Stephen(2007), Religion and Politics of Ethnic Identity in Bahia, Brazil, University Press of Florida. [https://doi.org/10.5744/florida/9780813031712.001.0001]
- Sheriff, Robin(2001), Dreaming Equality, Color, Race, and Racism in Urban Brazil Rutgers University Press.
- Sousa, Leone(2006), The Myth of Racial Democracy and National Identity in Brazil, Ph. D. Dissertation of the New School University.
- Telles, Edward(2004), Race in another America: The Significance of Skin Color in Brazil, Princeton University Press. [https://doi.org/10.1515/9781400837434]
- Treviño, Mónica(2005), Race, Hegemony, Mobilization: What Roles for the State and for Civil Society? The Transformation of Racial Politcs in Brazil, Ph. D. Dissertation of the McGill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