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itute of Iberoamerican Studies
[ Article ]
iberoamerica - Vol. 22, No. 2, pp.25-57
ISSN: 1229-9111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28 Dec 2020
Received 29 Oct 2020 Revised 03 Dec 2020 Accepted 03 Dec 2020
DOI: https://doi.org/10.19058/iberoamerica.2020.12.22.2.25

뒤틀린 세상에 대한 기억과 비판적 전망

유왕무**
**배재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wmyoo@pcu.ac.kr
The Critical Vision and Memory of the Absurd World
Yoo, Wang-Moo**

초록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라틴아메리카 독재정권과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고발에 앞장 선 좌파 지식인이다. 공식적 역사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숨은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 파고든다. 그는 역사에 대한 기억을 중요시한다. 과거와 같은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끊기 위해서다. 본 연구의 주요 연구대상인 『포옹의 책』도 그런 글쓰기의 연장선에 있다. 이 작품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작가의 기억에 의존한다. 이야기 전개 내용에서도 일관성이나 통합성이 없고, 글의 길이도 일정치 않아 지극히 비정형적이고 파편적이다. 이는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라틴아메리카 현실을 형식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다. 그는 라틴아메리카 사회에 만연한 분리 시스템의 문제점을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한다. 나와 타자는 물론 과거와 현재도 분리시킨다. 역사에 대한 기억을 텅 비게 만들어서 역사의식을 마비시킨다. 이런 시스템은 편리한 통치를 위해 고착화 된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의 양상은 더욱 노골적이고 광범위해진다.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불안과 공포는 일상화된다. 하루하루를 희망 없이 견뎌내고 있는 현실이다. 갈레아노는 이 견디는 힘을 역사적 기억에서 찾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서 포옹할 때 미래의 새로운 역사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갈레아노는 단순한 현실 비판이나 냉소적 태도에만 머물지 않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제시한다.

Abstract

Eduardo Galeano is a left-wing intellectual who led the criticism and accusations of dictatorship and social absurdity in Latin America. It digs into the truth of hidden history that has not been revealed in official history. He values the memory of history to stop repetition of the unfortunate history of the past. The main research topic of this study, 『The Book of Embraces』, is also an extension of such work. Most of the stories in this work depend on the writer's memory. There is no coherence or integration in the content of the story, and the length of the text is not constant, so it is extremely informal and fragmented. This is a strategy to formally reveal the illogical and irrational reality of Latin America. He analyzes the problems of the separation system prevalent in Latin American society from various perspectives. It separates me and the others as well as the past and the present. It makes the memory of history void and paralyzes the consciousness of history. These systems are fixed for convenient governance. In this situation, the pattern of violence becomes more explicit and broad. The anxiety and fear of the Latin American public become commonplace. It is a reality of enduring daily life without hope. Galeano finds this enduring force in historical memory. He believes that when the past and the present meet and embrace, a new history of the future can be encountered. Galeano does not just criticize reality or cynical attitude but also suggests hope for the future.

Keywords:

Eduardo Galeano, 『The Book of Embraces』, History, Memory, Absurdity

키워드: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포옹의 책』, 역사, 기억, 부조리

Ⅰ. 서론

우루과이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 1940~2015)는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이다. 그는 1960년부터 1964년까지 주간지 「마르차(Marcha)」와 일간지 「에뽀까(Época)」의 편집장을 맡아 라틴아메리카의 현실 비판에 앞장섰다. 1973년에 우루과이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자, 그는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에서 오랜 기간 망명생활을 한다. 1985년 초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2015년 사망할 때까지 저술에 몰두하여, 라틴아메리카의 다양한 문제점을 촌철살인의 필체로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는 라틴아메리카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발전된 미래를 건설하기를 소망했다. 시대의식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갈레아노의 글쓰기가 역사에 대한 기억을 강조하며 사회비판이라는 큰 흐름을 끝까지 유지한 것도 결국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애정의 결과인 것이다.

본 논문의 주요 연구대상인 『포옹의 책(El libro de los abrazos, 1989)』도 그런 글쓰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기억의 힘을 빌려 과거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잊힌 역사를 바로 알리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는 라틴아메리카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 문제와 이미 일상화된 폭력과 공포의 문제를 주요 글쓰기 과제로 삼는다. 그는 현실을 자각하는 것이 현실 개혁의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현실을 더욱 냉철하게 고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포옹의 책』은 연대기, 시, 소설, 서사, 단편 등의 다양한 양식이 혼합되어 독특한 글쓰기 형태를 보여준다. 191개의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각 이야기마다 서로 다른 하나의 일화, 사색, 역사, 인물, 고민, 비판 등을 보여준다. 그러나 각 이야기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다. 기존의 규칙이나 관념에 대한 이견, 제도적 모순,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의 강압, 일상화된 폭력 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갈레아노가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비판적 역사의식을 이 작품에서도 계속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전의 작품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포옹의 책』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덜 격정적이고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것이다. 문제제기를 하지만 독자에게 결론을 강요하지 않고 독자 스스로 생각하고 추론하게 유도하고 있다. 이 작품의 테마도 다양하여 이야기 전개에서의 통합성을 찾기도 쉽지 않다. 지역적으로도 라틴아메리카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텍스트 곳곳에 산재해 있는 의미소들을 정리해보면 빈부격차, 사회 시스템의 부재, 군부 독재에 대한 두려움, 폭력의 그림자, 모순된 현실 등이 주요 요소임을 알 수 있다. 갈레아노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불안, 광기, 부조리, 탐욕, 소외, 불신 등을 세밀한 필체를 통해 감성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포옹의 책』의 모든 이야기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핵심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기억’이다. 이 작품은 작가 개인의 기억을 좇아서 역사를 기록하려는 의지를 반영한 결과물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의 진정성이 더 인정된다. 갈레아노 스스로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작품은 다른 사람들과의 인연, 기억 속 간직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사랑, 연대에 관한 책이다. 내 기억 속은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들은 나와 내 친구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생생한 이야기들이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다(Pizarro Anrique 2007, 4).

갈레아노는 세월의 흐름 속에 묻힌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기억하고 재생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독재 정권의 탄압에 스러져간 이름 없는 대중, 뒤틀린 시스템에 의해 고통 받는 민중의 삶의 역사를 발굴해서 재조명하려고 애쓴다. 불합리하고 비이성적 시대를 살다간 대중의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포옹의 책』을 중심으로 갈레아노가 라틴아메리카의 척박한 현실에서 인간, 사회, 세계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표현하였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려는 전망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또한 갈레아노가 왜 역사에 대한 기억을 고집하며, 치열한 역사의식과 현실비판을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세상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고찰하고자 한다. 이는 갈레아노의 세계관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2장에서는 갈레아노가 역사에 대한 기억을 얼마나 중시하며, 그가 글을 쓰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볼 것이다. 3장에서는 대중의 분열을 꾀하는 거꾸로 된 시스템만 작동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부정, 부조리, 불평등 구조가 얼마나 만연하고 있는지, 이로 인해 대중은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 고찰해 볼 것이다. 4장에서는 공권력에 의해 탄압받는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불안과 공포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 실상을 살펴볼 것이다. 5장에서는 모순과 비논리의 라틴아메리카 사회 구조를 반영하기 위해 갈레아노는 어떤 글쓰기 전략을 구사했는지 분석해 본다. 이는 작품의 내용과 형식의 일체성을 알아보기 위한 노력이다.


Ⅱ. 역사에 대한 기억과 글쓰기

갈레아노는 역사에 대한 기억을 중시한다. 역사를 망각해서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에서 역사에 대한 기억은 “사치일 뿐(2004, 223)”이다. 권력이 “기억을 금지하도록 길들여왔기(2004, 224)”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피억압자는 억압자에 의해 날조된, 자기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진부한 불모의 추억에 동화하도록 무리하게 강요받아(1988, 17)” 왔다는 것이다. 매스컴과 교육기관도 권력자들이 “현실을 덮고, 기억을 지우며, 의식을 텅 비우게 만드는 데(1985b, 91)” 일조하거나 방조해왔다. 갈레아노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고행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과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과거가 현재에 대해 전혀 할 말이 없다면, 역사는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고 잠들어 버릴 수도 있을 것”1)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기억하며 역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과거의 저주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고, 현재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함정에 빠지지 않고 자유롭게 길을 가게하기 위해서(2004, 225)”이다. 즉 과거에 대한 기억은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능동적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2)

갈레아노는 공식 역사를 거부한다. 공식 역사는 “교과서에서 배신당하고, 교실에서 거짓으로 포장되며, 연표(年表)속에서 잠자고 있는 역사”이며 “숨이 끊어진 역사(2005a, 5)”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공식 역사는 “대중의 기억을 강탈(2004, 329)”하고 만다. 공식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림자’보다는 ‘빛’만을 강조한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만 조명하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무시한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찬란한 스펙트럼을 구체화하는 사람들은 “실제 역사의 주인공들, 배척당한 사람들, 속아 살아온 사람들, 지나간 현실과 지금 현실의 숨어 있던 주역들(2004, 339)”이다. 갈레아노 작품의 특징은 공식 역사에서 배제된 이런 하위주체들의 목소리를 되살려서 살아있는 역사를 생생하게 재생시켰다는 점이다.

『포옹의 책』에서도 다양한 하위주체들의 이야기를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녹여낸다. 이 작품도 문학작품이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적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이 책에서 니카라과 시인 호세 꼬로넬 우르떼초에게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역사책에는 거꾸로 보든 똑바로 보든, 불빛에 비추어 보든 투사된 빛에 보든, 어떻게 보든, 역사를 대하는 나의 사랑과 증오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106)”고 언급한 바 있다. 역사를 대하는 갈레아노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포옹의 책』은 “기억하다(Recordar): 라틴어 ‘re-cordis’에서 유래한 말로, ‘다시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다’는 뜻이다.”3)라는 제사(題詞)로 시작된다. 이에 대해 호세 라몬 곤살레스는 “이 제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단지 이미 지나간 과거가 ‘다시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는 뜻뿐 아니라 ‘과거에도 말(言)을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4)고 설명한다. 즉 이미 지나간 과거에도 ‘말’을 부여함으로써 그 과거를 다시 되살려낸다는 것이다.

갈레아노는 유달리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가다. 갈레아노가 1973년부터 이끌어온 주간지 「끄리시스」 시절부터 갈레아노가 의사소통을 위해 평범한 대중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우리는 대중들과 대화하고 그들에게 말을 되돌려주길 좋아했다. 문화는 곧 의사소통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벙어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신문화는 귀머거리가 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현실에 관한 텍스트들을 출간했지만, 무엇보다도 바로 그 말로부터 시작된 텍스트 또한 출간했다. 길거리에서, 들판에서, 지하갱도에서, 삶의 역사에서, 대중민요에서 주운 말들...(1987, 165).

『포옹의 책』에서도 그는 말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라틴아메리카의 군부 독재 시절은 역사의 암흑기였다. 역사를 지우려는 군부 정권의 시도는 지독했고 집요했다. 결국 모든 국민은 말을 할 수 없었고 모두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갈레아노는 우루과이 군부 정권 시절의 일화를 예로 들면서,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0여 년 전 우루과이에서 산 적이 있었던 맨프레드 막스-니프는 자신이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사실 하나를 내게 말해주었다. 개들은 앉아서 짖고 인간은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 후 우루과이 군부 독재는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혹은 말을 하지 말 것을 강요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세워나갔다. 개들이 서서 짖었는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언어를 가졌다는 것이 결국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과 똑같았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다(163).

독재 정권의 탄압으로 말이 무용지물이던 시절, 인간과 개가 다를 바가 무엇이냐는 자괴감의 표현이다. 오히려 개는 앉아서라도 짖을 수 있지만 인간은 언어를 가지고 있으나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개보다도 못한 삶을 살았음을 한탄하는 것이다.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갈레아노는 심지어 인간 존재 자체가 말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포도와 포도주>에 잘 드러나 있다.

포도 농장에서 일하는 사내가 고통스런 표정으로 마르셀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만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포도는...,” 그는 간신히 자신의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포도주로 만들어졌단다.”
나는 마르셀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포도가 포도주로 만들어졌다면, 어쩌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말이 바로 우리가 아닐까하는 생각 말이다(3).

만일 포도가 포도주로 만들어졌다고 가정한다면, 우리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말’이야말로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현실을 창조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인간은 말에 의해 규정되고 자신이 하는 말에 의해 모든 것이 평가된다. 파라과이 원주민들은 말에 영혼이 담겨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말이 신성하다고 믿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거짓말은 그 말이 지칭하는 사물을 모욕하지만, 참말은 그 영혼을 드러낸다. 그들은 영혼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들 속에 산다고 믿는다. 만일 내가 나의 말을 건네면 나 자신을 건네는 것이다. 언어는 쓰레기통이 아니다(2011, 133).

작가의 모습은 말에 의해 형성된다. 작가의 텍스트는 곧 작가의 모습이자 작가가 창조한 현실인 셈이다. 『포옹의 책』에서도 말은 현실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해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예술의 기능/1>에서 난생 처음 보는 바다를 더 잘 보기 위해 아버지에게 “바다를 봐야 해요. 아빠, 저 좀 도와주세요(3).”라고 외치는 꼬마 아이 디에고의 모습처럼 독자에게 라틴아메리카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엿보인다. 유머, 역설, 해학, 패러디 등 창조적 언어 사용과 파편적 글쓰기 방법을 통해 독자가 다양한 색깔을 지닌 라틴아메리카의 모습과 마주하게 만든다.

『포옹의 책』에서 보여 준 갈레아노의 글은 과거의 작품에서와 같이 정치적이거나 직설적이지 않다. 매우 부드럽고 간접적이다. 날 것의 현실보다는 신비로운 현실의 영역을 더 표현하려 노력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라틴아메리카 현실의 기존 질서를 바꾸고자 하는 갈레아노의 마음이 약해진 것은 아니다. 그럴수록 예술 활동이 더욱 진지하고 날카로워야 함을 주장한다. <예술의 기능/2>를 보자.

목동인 미겔 브룬은 수년 전에 파라과이의 차꼬 인디오들과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 어느 선교단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선교단은 현자로 추앙받는 마을 족장을 방문했다. 뚱뚱한 족장은 입을 꼭 다물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원주민어로 읽어주는 선교 내용을 듣고 있었다. 선교단 일행은 족장의 반응을 살피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족장이 입을 열었다.
“듣고 보니 긁어주는 말이로군. 참 많이 긁어주는, 썩 잘 긁어주는...”
이어 이렇게 덧붙였다.
“헌데 가렵지도 않은 곳만 긁어대고 있구먼(16).”

갈레아노는 현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말의 예술적 기능을 요구한다. 음악가는 선율로 문학가는 말로 그 예술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말은 저마다의 색깔을 지니고 자신을 빛내줄 주인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언어의 집에는 오래된 크리스털 병에 보관된 말들이 시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들은 시인들에게 스스로를 바치고 싶어 미치도록 갈망하고 있었다. 시인들이 자신들을 쳐다보고, 자신들의 냄새를 맡아보고, 자신들을 손으로 만져주고, 자신들을 혀로 핥아주었으면 하고, 시인들은 말들을 찾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7).

말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기능과 가치가 달라진다. 말은 예술이 될 수도 있고, “잊힌 자와 죽은 자들을 소생시키기(6)”도 하며, “환자를 치료하기(56)”도 한다. 사람의 생사마저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갈레아노가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갈레아노에게 있어 말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다. 그에게 “말의 재갈을 풀어내는 것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며 곧 라틴아메리카의 “경이로운 현실을 들춰내는 것(111)”이다. 그것이 그가 글을 쓰는 목적이기도 하다. 호세 라몬 곤살레스가 “『포옹의 책』은 현실과 현실의 부족함에 대한 코멘트이기도 한데, 말의 자유로운 역할에 대한 믿음을 잘 반영하고 있다(Ramón González 1998, 107)”고 평가한 것도 이와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갈레아노는 자유로운 말의 향연을 즐긴다. 그래서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갈레아노도 이런 평가에 만족한다. 그도 자신이 사상가, 역사가, 언론인, 평론가, 소설가, 에세이스트 등 다른 호칭보다 이야기꾼으로 불리길 바란다. 그는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그들에게서 들은 것을 다양한 형태로 변형, 재생시켜서 밖으로 드러내 이야기한다. 갈레아노에게 글쓰기는 말하기와 이야기하기의 연장선에 있다. 즉 이야기하기의 또 다른 방법이 글쓰기인 것이다. 그는 자유로운 언어 구사로 공식 역사에서 밝히지 못한 숨어있는 역사에 대한 기억을 하나하나 꺼내서 숨결을 불어넣어 되살려내려 노력한다.

나는 다만 삶의 신비와 사회의 비밀들, 은폐된 지대, 캄캄한 구석자리를 파고들 따름이다. 현실은 가면 뒤에 숨어 있기에. 나에게 사명이 있다면 이 가면 쓴 현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숨어 드러나지 않은 것을 쓰는 것이다.5)

위 글은 갈레아노가 ‘무엇을 글로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밝힌 대답이다. 그는 가면 뒤에 숨어있는 현실, “거울 너머 저 편에 숨어 있는 진실(2008, 556)”을 동시대인과 후손에게 전해 주는 것이 그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parecer)’과 ‘숨어 드러나지 않은 것(ser)’을 찾아 꾸준히 글로 쓰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갈레아노는 오백년 동안 기억이 유죄가 되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여기저기 오랫동안 숨어있던 역사적 진실을 캐기 위한 노력에 평생을 바쳐온 것이다. 갈레아노에게 글쓰기는 ‘기억’과 더불어 라틴아메리카의 억압된 현실에 저항하는 또 하나의 수단인 것이다.

갈레아노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지도 밝히고 있다. 그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과 친교를 위해, 고통을 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 그리고 행복을 나누기 위해 글을 쓴다(1985a, 105)”고 밝히면서, ‘다른 사람들(los demás)’이라는 말이 너무 애매모호하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우리는 자신과 비슷한 행운 혹은 불행을 가진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잠 못 드는 사람들, 반항아들, 이 땅의 비참한 사람들(1985a, 105)”을 위해 글을 쓴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갈레아노가 소외되고 억압받는 주변부 사람들의 권리와 가치 회복을 위해 글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발언이다. 그가 행동하는 지성의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갈레아노가 역사에 대한 기억을 왜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가 생각하는 작가의 임무는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누구를 위해 어떤 글을 쓰려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한 라틴아메리카의 어두운 현실을 온전히 드러내주는 언어의 기능과 그 언어에 영혼을 불어넣는 작가의 중요성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다음 장에서는 온전한 시스템이 부재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어떤 부조리와 부작용이 발생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Ⅲ. 분리 시스템

갈레아노는 세상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불꽃에 비유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독특한 불빛으로 빛나기 때문에 똑같은 두 개의 불빛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1). 세상의 다양성을 지적한 것이다. 다양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시스템을 통해 구조적으로 운용되어야 한다. 그 시스템이 부재하거나 설사 시스템이 있다 하더라도 제대로 작동을 안 한다면 혼란과 불안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라틴아메리카의 시스템은 정반대로 돌아간다.

공무원은 제 역할을 안 한다.
정치가는 말은 많지만 알맹이가 없다.
유권자는 투표는 하지만 선출은 못 한다.
정보매체는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교육매체는 무지를 가르친다.
판사는 오히려 피해자에게 형을 선고한다.
군인은 동포들을 상대로 전쟁한다.
경찰은 범죄와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범죄를 저지르기에 여념이 없다.
도산(倒産)은 사회로, 이익은 개인에게 돌아간다(117).

보편적 인간생태계의 질서를 완전히 뒤집는 거꾸로 된 세상이다. 이 정도면 차라리 시스템이 작동 안하는 것이 더 좋을 정도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기가 막히게 잘 작동하는 시스템도 있기는 하다. 이른바 ‘분리 시스템’이다. 나와 타자를 철저히 구분하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개인은 개인으로만 머물게 만든다. 개인이 군중이 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한다. 그래서 “타인은 당신의 형제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다. 타인은 경쟁자이며, 적이며,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이거나 이용하기 위한 존재에 불과하다(69)”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분리 시스템은 “입 다물고 있는 사람들이 말 많은 질문자가 안 되게 하는 시스템이며, 의견을 듣는 사람들이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안 되게 하는 시스템이며, 홀로 있는 사람들이 뭉치지 않게 만드는 시스템이며, 영혼의 조각들조차 다시 맞춰지지 않게 만드는 시스템이다(109).” 이 시스템은 대중을 분열시키고 분리시킨다. 심지어 서로 의사소통조차 못하게 만든다. 감정과 사고도 분리시키고,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도 갈라놓는다. 과거와 현재도 분리시켜서 기억을 텅 비게 만들어서 역사의식을 마비시킨다. 통치를 수월하게 하려는 공권력의 도덕적 타락과 음모가 엿보인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분리 시스템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 만연한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부자와 가난한 자, 백인과 원주민,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등을 갈라치기 한다. 이는 권력층에서 보면 통치를 편하게 하는 시스템이지만 그 반대쪽에서 보면 고통스런 현실의 출발이다.

사람들이 먹을 것도 주지 않고, 사랑도 주지 않는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무수한 사람들을 빵조차 먹지 못하게 만드는 형벌일 뿐만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이 서로 껴안지도 못하게 만드는 무서운 형벌이다(69).

그 결과 시스템의 희생자들이 양산된다. 관료들은 제 할 일을 안 하고 특권만 누린다. 그들에게 대중은 봉사의 대상이 아니라 군림의 대상일 뿐이다.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탄압의 대상이다. 결과적으로 “경찰이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경제가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66).” 대중은 공권력뿐 아니라 경제체제로부터도 외면당한다. “체제는 기아와 공포를 증대시킨다. 바꿔 말하면 부는 점점 집중되고 빈곤은 점차 확대(1988, 18)”되는 것이다.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가난한 자들이 증가한다.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고대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대를 이어 가난하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당하기만 하는 ‘하찮은 존재들’,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다. 그들은 “비록 어떤 존재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59)”이며, “그들의 값어치는 그들을 죽이는 총알 가격보다 더 낮다(59).”

라틴아메리카 인디오는 대륙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대접을 받는 대표적 존재이다. 권력에 의해 공동체를 잃어버린 그들은 가난 속에서 근근이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에 대한 박해와 차별도 갈수록 심해진다. 고독한 삶의 주인공인 인디오들은 삐노체뜨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칠레인들에게 “당신들은 겨우 십 오년 동안 독재치하에 살고 있지. 우리는 오백년 동안이나 독재치하에 살고 있다네(119).”라고 말한다. 그들은 대륙의 주인이면서 오백년 동안 하찮은 대접을 받은 설움과 한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그토록 무시하는 시스템도 한 가지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무시라는 가면 뒤에는 늘 어떤 공포가 숨어있다는 사실 말이다. 즉 “‘그토록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요하리만치 생생한 이 목소리들은 과연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그들이 말하는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이 침묵할 때는 과연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라는 공포가 항상 숨어있다는 것이다(120).” 지배층은 침묵 속에서 지속적으로 외치는 하위주체들의 목소리에 항상 민감하게 신경을 써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더욱 분리 시스템에 집착하는 것이다.

피지배층과의 분리에 성공한 지배층은 외부 세력과 손잡고 국내자본을 축내는 데 앞장선다. 대중의 삶은 고단한데 지배층은 축재(蓄財)에 여념이 없다. 지배층은 라틴아메리카를 수탈의 대상으로 보고 끊임없이 공격하는 국제기구와 연합한다. 그들은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등의 국제 기술 관료들이 라틴아메리카의 방어막을 외부에서 효과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도록 트로이 목마처럼 내부에서 빗장을 풀어준다.6) 그 순간부터 선진국에 의한 라틴아메리카의 수탈이 소리 없이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지배층은 나라의 미래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현재 자신에 손에 쥐어진 달콤한 열매에 취하고 만다.

라틴아메리카 대중이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이미 오백년 전부터다. 그들은 풍부한 자원의 혜택을 누릴 새도 없이 가난해졌다. 경제성장 수치가 높아질수록 빈곤층은 증가했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자유를 누릴 겨를도 없이 군부독재에 시달려야 했고, 자유라는 미명하에 평등과 정의를 잃어버렸다. 그 대신 부정, 부조리, 불평등 구조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아야 했다. 갈레아노는 이런 왜곡된 사회구조가 대중을 절망에 이르게 한다고 개탄한다.

거꾸로 된 세상은 우리에게 이웃을 희망이 아닌 위협의 대상으로 보라고 가르치고, 우리를 외롭게 하며, 마약과 사이버 친구의 위로를 받게 한다. 잘못 날아온 총알 하나가 한 발 앞서 우리 생명을 단축시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굶어죽거나, 공포에 떨다 죽거나,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죽어야만 하는 인생이다. 그 불행한 결말 중에서만 선택해야 하는 자유, 그 자유가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자유인가(2004, 19)?

갈레아노는 불행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처지를 비관한다. 게다가 “현실을 바꾸지 말고 참으라 하고, 과거의 소리를 듣지 말고 잊으라 하며, 상상력으로 미래를 그리지 말고 받아들이라 강요(2004, 19)”하는 지배층은 더욱 공고화된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분리 시스템은 더욱 고착화된다.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고독’이 심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고독한 대중은 절망을 체감하고 소외감을 느낀다. 라틴아메리카 대중은 이제 더 이상 대륙의 주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자괴감을 안고 살게 된다.

낮에는 해가 없고 밤에는 달이 없는 바로 그런 날에는 어떤 곳도 진정으로 내가 머무는 곳이 아니며, 그 어느 것에서도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내 자신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어디 있다고 해서 진정으로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157).

낮에 해가 없고 밤에 달이 없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대중은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마땅히 있어야 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무능함, 기억상실, 체념만이 있을 뿐이다. 존재감의 결여, 존재의 불안은 결국 신에 대한 원망을 넘어 신의 존재를 의문시하고 부인하기에 이른다. 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기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콜롬비아 보고타. 국립대학을 돌아 나오는 곳:
‘신은 살아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다른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다:
‘순전히 기적이다(87).’

멕시코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적 같은 존재인 ‘신’보다는 눈에 보이는 ‘영웅’ 슈퍼바리오(Superbarrio)에 더 열광한다. 게임 캐릭터 슈퍼마리오를 연상시키는 슈퍼바리오는 멕시코의 전통 레슬링 루차도르(luchador) 복장을 하고 있다. 앙가발이 모습의 배불뚝이 슈퍼바리오는 전형적인 멕시코인의 모습이다. 그는 1985년 9월 멕시코시티 대지진 당시 이재민 구호를 위해 맹활약하면서 깜짝 등장해서, 멕시코시티 사람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다.7) 그의 활동은 다양하고 눈부시다. 그는 “도시 구석구석에서 경찰과 맞서거나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조한다. 그는 여성의 권리신장이나 대기오염 반대시위에 앞장서는가 하면, 국회에 진입하여 정부의 비열함을 폭로하기도 한다(112).” 그는 이제 가난한 멕시코시티인들의 영웅이다. 대중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기 때문에 대중이 그에게 열광하는 것이다. 대중의 옆에 누군가가 함께 있어준 역사가 없는 고독한 대륙이기에 더 그러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라틴아메리카에서 분리되고 거꾸로 된 시스템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이제 너무 당연한 자연의 법칙과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오백년 동안 그래왔듯이 멈추지 않고 반복된다. 갈레아노는 이를 대중의 건망증 탓이라고 지적한다(8). 그래서 이제 망각의 늪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한다. “기억의 쓰레기를 감출 수 있는 양탄자는 없다(98)”고 역설한다. 역사를 기억하여 반복의 사슬을 끊자는 것이다. 그래서 ‘비극은 엉터리 연극처럼 반복 된다(109)’거나, ‘비극은 비극으로 되풀이 된다(109)’라는 불길한 예언을 비웃어주자는 것이다. 고독의 역사를 청산하고 폭력과 공포의 세계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비정상적인 시스템 하에서 라틴아메리카 대중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다음 장에서는 라틴아메리카 대중이 느끼는 폭력에 대한 공포, 불안이 어느 정도이며, 이를 벗어날 전망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Ⅳ. 폭력과 공포의 일상화

갈레아노가 글을 쓰는 주요 목표 중 하나가 라틴아메리카에 산재된 폭력의 실태를 고발하고 폭력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는 것이다.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민중을 위로하고 그들의 삶 속에 내재된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사건의 양상이나 사건의 전개 등을 세밀히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은 아니다. 『포옹의 책』에서도 폭력의 실태를 사사건건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폭력의 분위기와 공포에 젖은 대중의 심리 상태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공권력의 오·남용이 대중의 일상에 얼마나 큰 공포와 불안, 두려움을 야기하는지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공포의 문화는 인디오가 노예가 되었던 식민 시절부터 유래된다. 인디오는 곤충으로 분류되었고, “인디오의 피부 색깔은 ‘파리인류학회’가 고안한 색채 분류법의 29번과 30번에 해당되었다(128).” 인디오가 대농장에서 도망가다 잡히면 석유가 흥건히 젖은 국기에 둘둘 말려서 산 채로 불태워졌고, 반란을 일으킨 인디오는 혀를 절단 당한 채 말을 하도록 집요하게 고문당했다(128). 인디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국가경제를 유지하던 나라들에서도 그들을 무용지물로 취급하고 선진국에서는 그들을 발전을 저해하는 방해물 취급을 했다(2004, 61).

인디오는 당시 인구의 다수를 점하고 있었으면서도 가장 소외된 소수계층으로 전락했다. 약 백년에 걸친 학대와 학살로 인디오는 멸종위기에 이른다. 후손들은 인디오의 멸종을 안타까워한다.

내 조상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누구를 숭배해야 하는가? 어디에서 내 원료품을 찾을 수 있을까? 내 첫 번째 아메리카 조상은......인디오......초창기의 인디오였다. 그런데 당신들의 조상들이 그들의 살갗을 산 채로 벗겼고, 나는 고아가 되었다.8)

고아의식에 가득 찬 인디오들은 그 때부터 “군중에 대한 공포, 고독에 대한 공포, 지난 일에 대한 공포, 앞날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삶에 대한 공포(갈레아노 2004, 95)”와 함께 살게 된다. 그 이후로 인디오들은 지금까지도 식민시대를 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식민주의에 길들여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식민주의’는 당신이 노예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천성적으로 무능력하다고 믿도록 만든다. 당신은 말을 해서도 안 되고, 어떤 행동을 해서도 안 되며, 심지어 존재해서도 안 된다고 믿도록 만든다(145).

제도와 공권력에 완벽히 길들여진 노예의 모습이다. 기억을 해서도 안 되고 역사를 알아서도 안 된다. 그들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현 구조를 받아들이고 순응해야 한다. 생각을 해서도 안 되고 느껴서도 안 된다.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로 살아야 한다. 이런 ‘공포의 문화’는 결국 가정에까지 스며든다. “강탈, 모욕, 협박, 머리 때리기, 뺨 때리기, 몽둥이찜질, 태형, 컴컴한 방구석, 냉수욕, 의무적 금식, 강요된 배식, 외출 금지, 생각의 표현 금지, 느낌의 실행 불허, 공적 수치심(129)” 이런 것들이 가정의 질서를 유지해주는 벌칙과 형벌이다. 두려움과 공포가 지배의 수단이다. 가정의 약자인 여성은 행동을 제약당하고 아이들은 무조건 복종만을 강요한다. ‘불복종’과 ‘자유’에 대한 징벌이 가족 문화의 근간이다. 그들에게 불복종과 자유는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 사항이다. 그러니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면 오히려 당황스럽고 두렵기까지 하다. 마치 철창 속 어느 토끼처럼 말이다.

어느 날 아침, 인도산 토끼를 선물 받았다. 토끼는 철창 우리에 갇힌 상태로 집에 도착했다. 정오가 되자, 나는 철창문을 열어 준 뒤에 외출했다.
집에 돌아왔다. 해 질 무렵이었는데, 토끼는 그 때까지 철창 우리 속 막대기 옆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자유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99).

철창에 익숙해진 토끼에게 갑자기 자유가 허락되자 토끼는 자유를 낯설어하고 두려워한다. 라틴아메리카 인디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스스로 알아서 복종하고 알아서 구속된다. ‘공포의 문화’가 깨지지 않게 스스로 단속한다. 가정 내부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식민주의’를 공고히 한다.

가정에서의 억압은 결국 사회 전체로 확장된다.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식민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공권력이 모든 무기를 휘두르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눈에 보이는 식민주의’는 누군가를 불구로 만들고도 시치미를 떼거나 능청을 떨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다. 게다가 “대중이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존재하는 것 자체를 금지할 수(145)”도 있다. ‘눈에 보이는 식민주의’는 인간의 생각과 행동 모두를 통제할 정도로 막강하고 잔혹하다. 하지만 머뭇거리지 않고 거침이 없다. 그러니 라틴아메리카 사회는 어디를 가도 식민주의가 눈에 보일 정도로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공권력의 탄압은 군부 독재 시절에 더욱 가혹했다. 권력의 억압적 사용은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었다. 우루과이 군부 독재 시절 교도소에서 행해진 징벌의 종류가 이를 잘 보여준다(49). 까까머리 수감자가 식당에 들어오기 전에 머리를 빗지 않거나, 꽃무늬가 그려진 타올을 사용하면 독방수감이고, 군견을 모욕해도 역시 독방 신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교도소 이름이 자유를 뜻하는 ‘리베르따드(libertad)’이었다.

칠레에서는 군부 독재를 비판하는 「아날리시스(Análisis)」의 기자 호세 까라스꼬가 납치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는 조작된 삐노체뜨 장군 암살 기도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어느 날 새벽 자기 집에서 체포되었는데, 몇 시간 후 산띠아고 근교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20). 독재정권은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국가에서 법적으로 금지된 사형을 사실상 시행하고 있던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법과 무관하게 사전 모의까지 하면서 살인을 자행한 것이다.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도 범죄대열에 합류한다. 라틴아메리카 경찰은 방탄조끼, 권총, 자동소총으로 중무장하고 길거리를 누빈다. 그들이 저지르는 납치, 고문, 총살은 무죄다. 멕시코시티 범죄의 60%는 경찰이 저지른 것이고 베네수엘라 국민 90%는 경찰이 범죄를 저지른다고 굳게 믿고 있다(2004, 99). 아르헨티나인과 우루과이인 중에서 유사시 경찰의 도움을 받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차라리 사격 클럽에 등록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사람도 있었다(2004, 98). 브라질의 경찰 간부는 “경찰은 부패하기 위해 창설되었다”고 공언하기도 했다(2004, 99). 경찰은 고문이 주특기다. 고문으로 자백을 이끌어내는 건 그저 습관이며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경찰이 고문하는 대상은 주로 힘없는 일반인이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고 법적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고문 덕택에 그들은 저지르지도 않은 죄목으로 갇혀 있다. 고문은 “정보를 캐내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권력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128).”

그렇다고 해서 일반인이 억울함을 호소할 방도도 없다. 만일 “자신이 고문당했다고 고발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경찰은 몇 배나 더 잔인하게 그들을 다시 고발할 것(2004, 107)”이기 때문이다. 누구와 의사소통하기도 어렵다. 독재 정치 권력은 개인이 말 그대로 개인으로 남아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즉 “교도소에서든, 병영에서든, 어디서든, 각각의 개인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남아주길 원하는 그들에게 의사소통은 곧 죄악(11)”이었던 것이다. 분리되어야 통치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라틴아메리카 식민시대에 원주민 가정에서 시작된 ‘눈에 보이지 않는 식민주의’가 현대에 이르러 ‘눈에 보이는 식민주의’로 더욱 공고히 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식민시대의 유산으로 이어져 온 공포의 문화가 라틴아메리카 사회 구석구석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가정 내에서건 사회에서건 공포와 두려움은 있지만 인권은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거꾸로 된 시스템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분위기다. 설사 그가 국가 인권위원회 회장이어도 마찬가지다.

1987년 말, 아밧 고메스는 인간의 생명이 8달러의 값어치도 안 된다고 고발했다. 그러나 그의 고발 기사가 콜롬비아 메데인 시의 한 일간지에 보도되었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암살된 것이다. 엑꼬르 아밧 고메스, 당시 그는 인권위원회 회장이었다(88).

이쯤 되자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공포와 불안은 극에 달한다. 공권력에 의한 공포는 이미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된 것이다. 공포와 두려움이 대중의 일상을 지배한다. 대중은 “입을 바싹 말리고,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온 몸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98)” 두려움을 껴안고 살아간다. 그들은 말하는 것도 두려워하고 듣는 것도 두려워한다. 행동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매일매일 죽음을 부르는 공포와 마주친다. 그러니 라틴아메리카 대중은 “살아있었지만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눈을 깜빡거렸지만 초점을 잃고 있었다. 눈물조차 말라버린 얼굴에는 전쟁의 모든 것과 인간의 모든 고통이 담겨 있었다(15).”

이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공포가 일상화되었다. 대중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체화하며 살아가고 있다. 갈레아노는 “우리는 아침 식사로 ‘공포’를 먹었고, 점심때도 ‘공포’를 먹었으며, 저녁 식사 때도 역시 ‘공포’를 먹고 살고 있다(242)”고 밝히고 있다. 일상에 노출된 대중의 공포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희망 없이 힘들게 견디고 있는 것이다.

갈레아노는 이 견디는 힘을 ‘기억’에서 찾고 있다. 역사의 실체를 기억하고 후세에 전하자는 것이다. 후세로 하여금 라틴아메리카에 만연한 ‘공포의 문화’를 반복하지 않고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들은 우리를 그들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242).”라고 큰 소리로 자랑스럽게 외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상화된 공포와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다음 장에서는 비논리적 사회구조를 가진 라틴아메리카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갈레아노가 『포옹의 책』에서 보여준 글쓰기 전략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이는 갈레아노가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Ⅴ. 파편적 글쓰기 전략

갈레아노의 작품 중에서 『수탈된 대지(Las Venas Abiertas de América Latina, 1971)』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대부분 짧고 단문이며 읽기도 편하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은 에세이, 기사, 증언, 허구화된 역사, 단편 소설, 서사시, 연대기 등과 같은 전통적인 장르로 구별하기 어렵다. 그의 글은 전통적 분류를 벗어난 새로운 혹은 일탈된 담론의 장르를 생산해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는 라틴 아메리카의 독특한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공고히 하고 현대인이 처한 정치, 사회적 어려운 상황에 대한 고민의 결과라고 판단된다. 『방랑자(Vagamundo, 1973)』, 『우리의 노래(La Canción de Nosotros, 1975)』, 『사랑과 전쟁의 낮과 밤(Días y noches de amor y guerra, 1978)』 등 그의 대다수 작품에서는 구체적인 시대와 인물이 등장한다. 작가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는 증언형식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개인의 기억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집단의 기억과 증언, 고발이다. 그래서 방대한 주변 인물을 대거 등장시킨다. 디아나 빨라베르시치가 지적한 대로 “여기서 이야기 하는 모든 것은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작가는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쓰고 있다. 어떤 이름들은, 소수이긴 하지만, 살짝 바뀐 것도 있다(Palaversich 1995, 85).”

갈레아노의 실험적 글쓰기 형식은 이후에도 지속되는데 『불의 기억(Memoria del fuego, 1982~1986)』 3부작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에서 보여준 새로운 형식은 전통적인 장르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갈레아노도 이를 인정하여 제 1권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수많은 존재의 목소리를 전하는 나의 목소리가 어떤 글에 속하는지는 모르겠다. 소설인지 수필인지 서사시인지 증언인지 연대기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사실 별 상관도 없다. 평론가들은 장르를 나누지만, 나는 그런 경계를 믿지 않는다(2005a, 6).

우리가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포옹의 책』은 어찌 보면 『불의 기억』보다 더 새롭고 혁신적이다. 『불의 기억』은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인물과 사건 위주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대부분의 글이 역사적 사료와 기록의 도움을 받고 있다. 서술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통사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시간적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포옹의 책』은 역사적 기록이나 사료와는 거리가 먼 제재들을 바탕으로 한다. 191개의 이야기가 대부분 작가의 기억에 의존한다. 소재도 작가의 주변부 이야기들이다. 일인칭 시점의 서사는 작가 지인들의 삶이나 그들과 연관된 이야기, 그런 상황에서 파생된 감정의 변화 등을 이야기 한다. 그런가 하면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심각한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기도 하고, 사회적 부조리를 시니컬하게 꼬집기도 하고, 공포와 억울함을 호소하는가 하면, 용기에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주변의 신변잡기를 늘어놓기도 하고, 작가 미상의 그래피티를 옮기기도 하며, 심지어는 꿈을 꾼 내용도 등장한다. 아르게다스, 후안 헬만, 어스킨 콜드웰, 빠블로 네루다, 후안 까를로스 오네띠, 훌리오 꼬르따사르 등 유명 동료 작가들에 관한 글도 있다. 아내 엘레나의 꿈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자신의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 등 신변잡기를 다루기도 한다.

이 작품의 이야기들은 주제나 이야기 전개 내용에서도 일관성이나 통합성도 없다. 기껏해야 <신학/1>, <신학/2>, <신학/3>과 같이 동일한 제목에 몇 개의 숫자를 붙여서 표시할 뿐이다. 그렇다고 숫자가 표시된 제목의 이야기들이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시간적 연속성도 없다. 이야기 하나하나 모두 독립적이고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 글의 길이도 일정치 않다. 긴 이야기는 두 페이지 정도 되지만 짧은 것은 한 줄짜리 이야기도 있다. 극단적 비정형성과 파편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글쓰기 형태는 기존의 라틴아메리카 작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이고 전위적인 형식이다. 이는 파편적이고 혼란스러운 현실을 다양한 형식으로 반영하려는 작가의 의도적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옹의 책』은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잘 이룬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찬 세상을 고발한다. 그래서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중심축은 <뒤틀린 현실에 대한 기억과 고발>이라는 의미 있는 구조이다. 그러나 직설적 고발의 형태가 아니라 역설과 아이러니, 비유, 패러디 등의 서사전략을 구사하면서 감성적으로 접근한다. 독특하고 창의적인 언어구사가 압권이다. 이 작품은 “역사적 현실에 근거하면서도 과감하게 추상하며, 핵심을 찌르는 은유, 촌철살인의 해학, 현실을 비꼬는 반어법, 간결한 역설, 비유적인 압축 등의 기법으로 효과를 극대화시키며 현실을 형상화하는 창조성이 돋보이는 작품(2007, 17)”이다. 압축된 이야기 전개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수용능력을 이끌어내는 효과도 기대된다. 동시에 독자에게 사회의식과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도록 유도한다. 게다가 작가가 직접 그린 삽화는 독자의 이해와 상상력을 극대화시킨다. 그렇다면 갈레아노가 이 작품에서 보여준 파편적 글쓰기 전략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자신의 조각들을 긁어모아 하나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왜 글을 쓰겠는가? 우리가 학교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교육은 우리를 발기발기 찢어 놓았다. 우리에게 육체로부터 영혼을, 마음으로부터 이성을 떼어놓을 것을 가르쳐왔다(107).

갈레아노는 괴리되고 분리되고 뒤틀린 현실세계를 통합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인의 정체성은 “박물관의 전시물이나 유리 조각이 아니라 날마다 일어나는 놀라운 모순들의 통합(112)”임을 알고 있다. 심지어 그는 “그런 모순이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믿음(112)”이라고 역설하기도 한다. 그래서 갈레아노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모순투성이 조각들을 모아서 통합하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갈레아노는 ‘감각적 사고(sentipensante)’를 지닌 가장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이 단어는 콜롬비아 해안가 어부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성과 감성의 일치, 육체와 정신의 일치를 의미하는 말이다(107).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가장 단적으로 잘 드러내는 단어이다. 이처럼 특유의 ‘감각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갈레아노의 글쓰기는 파편화되고 유리되고 분열되고 분리된 현실을 단일화하고 통합하고 화합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111)”임을 인정하며 우리 모두에게 현실을 바꾸기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갈레아노가 『포옹의 책』에서 보여준 파편적 글쓰기는 모순되고 부조리하며 비이성적인 현실을 형식적으로 구현한 것임을 살펴보았다.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키며 의미 있는 구조를 완성시키고 작품의 총체성을 완성시키려는 갈레아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Ⅵ. 결론

갈레아노는 “현실을 변혁시키는 제 1조건은 현실을 아는 것이다(1988, 17)”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실에 대한 깊은 인식으로부터 발전되지 않고서 정치, 사회적 변혁을 이룬 적은 없다(1985c, 134)”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과거를 기억하고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라도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 망각을 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거울 너머의 역사’, 진실의 역사를 만날 수 있으며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자들이 그들만의 역사가들을 따로 가지기 전에는, 수렵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냥꾼들만을 찬양할 것이다(104).”라는 아프리카 속담 하나를 제시한다. 승자의 역사는 왜곡된 역사다. 승자의 역사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패자도 숨김없는 자신들의 역사를 써내려가야 한다. 진실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패자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갈레아노는 이 작품에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소수의 권력자들에 의해 다수의 대중이 모욕당하고 착취당하는 현실을 고발하며, 기존 질서에 의해 세워진 불합리한 ‘시스템’에 의한 권력남용의 역사와 인권 착취의 사례들을 예시한다. 이를 밝히기 위해 자신이 잘 알고 있거나 체험하였던 역사, 전통, 인물, 사건, 감정, 꿈 이야기 등을 동원한다. 각각의 이야기가 발생한 장소와 관련 실존인물의 이름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글쓰기 전략은 작가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된다.

갈레아노는 뒤틀린 세상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용기를 내고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인류의 엄청난 다수는 보고 듣고 침묵할 권리 외에는 가진 게 없다. 한 번도 발표된 적 없는, 꿈꿀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아주 잠시라도 이성을 잃는 것은 어떨까(2004, 346)?”라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용기를 낼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또 다른 세상을 꿈꾸며 혐오스러운 오늘을 넘어선 곳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자(2004, 346)”며 새로운 미래 건설에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갈레아노는 구체적으로 집단공동체를 통해 또 다른 가능한 세상을 예고한다.

생산과 삶의 공동체 양식인 집단공동체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메리카적인 전통이다. 아메리카 건설 초기 시대의 전통이지만 새로이 다가오는 신세계를 예지하는 양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121).

갈레아노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단순한 비판이나 냉소의 수준에만 머물지 않는다. 부조리와 공포가 지배하는 현 상태를 바꾸려는 대안도 제시하려 노력한다. 그에게 역사란 눈을 뒤로 돌려서 바라보는 예언자이다. 지난 일을 통해, 지난 일을 거울삼아,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다(Campanella 1979, 237).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희망적이며 미래지향적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자생적으로 발전된 집단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미래사회 건설이 가능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오늘의 어려움에 주저앉지 말고 내일을 지향할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어제와 오늘이 만나 서로를 인정하고 포옹하는 유일한 곳이 있다. 바로 내일이다(121)”라고 설파한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 ‘포옹’하는 순간 따뜻한 미래가 열린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갈레아노에게 “‘역사’는 과거만이 아니다. 그가 역사에서 살려낸 과거는 생생한 현재이며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름 없이 그저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은 사람들이 비로소 자기 이름을 갖고 의미 있는 존재로 되살아난다(2008, 6).”

갈레아노는 현재 라틴아메리카의 아픔에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우리는 ‘희망에 거역하는 죄야말로 용서도, 구원도 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라는 까를로스 끼하노(Carlos Quijano)의 말이 얼마나 옳은 것인지 날마다 곱씹어봐야 한다.”9)고 역설하며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노래한다. 갈레아노가 폭력을 말하는 것은 그 반대편에 있는 평화를 말하는 것이며, 그가 시대의 어둠을 이야기 하는 것은 시대의 새로운 빛을 원하기 때문이다. 갈레아노가 시대적 폭력과 공포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도 결국 평화와 희망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가 희망하는 내일은 거꾸로 된 시스템이 바로 서고, 인종차별과 빈부격차도 없으며, 불안과 공포도 없고, 입에서 태어난 말이 자유롭게 허공을 날아다니는 세상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가 온전히 인정받는 세상, 인간 생태계의 질서가 올바로 복원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갈레아노의 희망이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9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9S1A6A3A02058027).

Notes

1) Eduardo Galeano(1999) El libro de los abrazos, Montevideo: Ediciones de Chanchito, pp. 109. 이후 이 작품의 인용은 본문에 해당 쪽수만 표기하고, 그 외 갈레아노 작품은 연도와 쪽수만 표기할 것임.
2) 이러한 갈레아노의 생각은 루이스 세뿔베다가 가지고 있던 기억에 대한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세뿔베다에게 기억이란 시간이 멈추어 버린 절대 변하지 않는 세계이다. 그는 <절대 잊지 말라, 용서도 하지 말라>는 말을 삶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그래야 현실을 담대하게 마주할 수 있으며 후손에게 떳떳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갈레아노와 세뿔베다는 모두 기억을 중시한다. 두 사람 모두 군부 쿠데타를 피해 망명 작가 생활을 한 공통점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공식적인 역사보다는 비공식적인 역사를 더 중시하며,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했던 많은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과거를 기억하려 노력하며, 역사를 알지 못하는 민족은 과거의 실수를 다시 반복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역사 바로 알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두 사람 모두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선택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루이스 세뿔베다의 역사와 기억에 관하여는 유왕무(2020), “소외되고 일그러진 세상의 기억을 찾아서”, 이베로아메리카연구, Vol.31, No.2, pp.107-131를 참조).
3) 갈레아노는 “예전에는 ‘기억하다’라는 말은 ‘깨어나다’와 같은 뜻으로도 쓰였고, 라틴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 그 의미 그대로 쓰고 있기도 하다(갈레아노 2004, 226)”고 말한다.
4) José Ramón González(1998), La estrategia del fragmento, El libro de los abrazos de Eduardo Galeano, Valladolid: Universidad de Valladolid, pp.104.
5) 이민아(2005), 행동하는 지성,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및 에두아르도 갈레아노(2005b). 『불의 기억』 II, 박병규 역, 따님, p.7에서 재인용.
6) 신자유주의 시장 개방으로 국제금융기구와 국제 기술 관료들이 라틴아메리카에 미친 정치, 경제적 영향과 결과에 대해서는 유왕무(2015),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작품에 나타난 신자유주의의 폭력성」, 비교문화연구, Vol.41.
8) 마크 트웨인(1881) 「뉴욕 타임스」 및 에두아르도 갈레아노(2004),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조숙영 역, 르네상스, p. 60에서 재인용
9) 우루과이 좌파의 승리에 대한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글https://blog.naver.com/konewer/60007846082(202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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