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텍스트성으로 읽는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의 『시편』
초록
일반적으로 카르데날의 작품은 혼란의 도가니로 몰고 간 니카라과 혹은 중앙아메리카의 역사를 반영하여 다층적이고 복잡한 삶의 현실을 그린다. 그러나 그의 『시편 Salmos』(1964)은 니카라과나 중앙아메리카의 역사적 상황보다 더 폭넓은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문명화된’ 현대 사회가 양차 세계 대전과 냉전이라는 야만을 향해 나아간 20세기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시편』은 구약의 시편과 연결하여 현대 사회의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다룬다. 이 시집은 카르데날의 시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또한 그의 신앙을 드러내는 작품이며, 동시에 20세기 초반의 세계 역사를 상호텍스트로 사용하고 있기에, 서로 모순적으로 보이는 가톨릭 신앙과 정치화의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다뤄질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시편』의 지시물은 니카라과와 라틴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유럽과 서양의 역사적 상황과 상호텍스트성 관계를 이룬다. 또한 이 시집의 상호텍스트는 성경 시편과의 관계를 넘어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이나 십자가의 성 요한(San Juan de la Cruz)처럼 시편에 바탕을 두고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작가들로 확장할 필요도 있다. 이 글은 이 시집에서 드러나는 카르데날의 대표적 시학인 ‘외향주의 exteriorismo’를 상호텍스트성 관점에서 분석하면서, 20세기 전반의 정치 폭력과 전쟁, 그리고 현대의 지배권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Abstract
In general, Ernesto Cardenal's works embrace the convulsive history of Nicaragua or Central America and depict the multi-layered and complex reality of life. However, his Salmos(1964) should be approached from a broader perspective than the concrete historical situation of Nicaragua or Central America because it is mainly a strong critique of the twentieth century, which has been directed towards the barbarism of the two world wars and the cold war. Salmos, dealing with the suffering of oppressed people in modern society in connection with the psalms of the Old Testament, occupies a very important place in Cardenal's poetic world and is a work that reveals his faith.
The references in Salmos constitute the intertextuality with historical situations in Europe and the West as well as in Nicaragua and Latin America. In addition, the intertextual study of this collection of poems needs to be extended to the writers such as Thomas Merton or San Juan de la Cruz who intended to interpret and understand the world based on the psalms. This article analyzes Cardenal's representative poetics, exteriorismo, from the viewpoint of intertextuality as a means of understanding the political violence and dominant power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Keywords:
Ernesto Cardenal, Salmos, Exteriorismo, Intertextuality, World War키워드: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시편, 외향주의, 상호텍스트성, 세계대전Ⅰ. 들어가는 말
20세기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시인인 니카라과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은 다소 모순적인 인물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는 신부이면서 그의 가장 유명한 시는 메릴린 먼로를 노래한다. 그리고 반제국주의 산디니스타 시인이면서 미국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철저하게 영적이며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이지만, 그의 미학은 ‘현실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구체적이고 세세한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모순은 카르데날의 모습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비트족(베레모, 긴 머리)처럼 보이지, 사제(그는 절대로 검은 통상복을 입지 않는다)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카르데날의 작품은 니카라과 혹은 중앙아메리카의 혼란스러운 역사를 반영하여 다층적이고 복잡한 삶의 현실을 그린다. 이런 이유로 그의 작품을 다루는 대부분의 비평은 니카라과와 중앙아메리카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폭넓게 설명한다. 그러나 그의 시는 중앙아메리카라는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앞으로 일어날 인류의 미래를 투사하는 작품으로 확장된다. 이것은 그의 시어(詩語)의 힘이 정치 이데올로기의 선전 구호가 아니라, 신앙적·신화적·보편적 미학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또한 카르데날 시의 상호텍스트성을 서술하는 글도 적지 않은데, 이런 글들은 특히 『시편 Salmos』1)(1964)에 관심을 보이면서 구약의 시편과 연결하여 현대 사회의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다룬다. 이 시집은 카르데날의 시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또한 그의 독실한 신앙을 드러내는 작품이며, 동시에 20세기 초반의 세계 역사를 상호텍스트로 사용하고 있기에, 서로 모순적으로 보이는 가톨릭 신앙과 정치화의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다뤄질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카르데날의 『시편』은 니카라과나 중앙아메리카의 역사적 상황보다 더 폭넓은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문명화된’ 현대 사회가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야만을 향해 나아간 20세기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편』의 지시물은 니카라과와 라틴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유럽과 서양의 역사적 상황과 상호텍스트 관계를 이루면서, 세계대전의 재앙으로 인해 유럽 문명에 환멸을 느낀 라틴아메리카 사상가 세대2)의 비판적 입장과 같은 관점을 취한다(Rivera Vaca 2018, 80). 또한 이 시집의 상호텍스트는 성경 시편과의 관계를 넘어 카르데날의 스승이자 미국 켄터키주의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 원장이었던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이나 십자가의 성 요한(San Juan de la Cruz)처럼 시편에 바탕을 두고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작가들로 확장할 필요도 있다.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의 시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영적인 길, 혹은 구체적인 행동을 제시하면서 예언적이고 사회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특징과 더불어 이글의 분석 대상인 그의 대표작 『시편』은 신앙에 바탕을 둔 정치적 행위이며 뛰어난 상호텍스트성 미학을 지닌 작품이다. 이 글은 이 시집에서 드러나는 카르데날의 대표적 시학인 ‘외향주의(exteriorismo)’를 상호텍스트성 관점에서 분석하면서, 카르데날이 20세기 전반의 정치 폭력과 전쟁, 그리고 현대의 지배권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Ⅱ. 카르데날의 『시편』: 선행 연구의 다양한 관점
카르데날의 『시편』을 다룬 많은 연구는 성경 시편과 카르데날의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라이스 달리 데 트로코니스(Yrais Daly de Troconis)는 카르데날이 성경 시편의 의미를 변화시켜 새롭게 해석하여 현대적 맥락에서 중요한 여러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다룬다고 지적한다(1982, 10-12). 카르데날은 일반인에게 친숙한 언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이 도와주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힘센 억압자들의 위선적이고 부패한 말과 맞선 저항의 말이며, 이런 변화를 통해 기독교 혁명의 관점에서 성경의 시편과 현실을 새롭게 해석한다고 설명한다. 한편 도로시 쇨르(Dorothy Sölle)는 달리 데 트로코니스와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 같지만, 다른 관점을 강조한다. 쇨르는 카르데날이 성경 시편을 현재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을 표현하고, 성경 시편은 그런 목적을 위한 기반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시편』의 핵심 주제는 고통받는 민족과 결속하고 단결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2010, 336).
하인리히 빌러(Heinrich Bihler)는 달리 데 트로코니스와 마찬가지로 성경 시편을 카르데날의 『시편』과 비교하면서, 두 작품의 특징을 부각하고는 주제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예를 들어 카르데날의 『시편』은 사회와 정치의 악을 드러내지만, 성경 시편은 종교성과 도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춘다고 밝힌다(2010, 204-205). 그래서 카르데날의 『시편』에서 적들은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언급되지만, 성경 시편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으로 적들을 그리며, 억눌린 자들의 묘사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호세 프로미스 오헤다(José Promis Ojeda)는 성경 시편과 카르데날의 『시편』이 보여주는 세계의 관계에 집중한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카르데날은 성경 시편의 현실을 현대 상황과 접목하면서 현대 사회의 상황에 맞는 어휘를 사용한다(1975, 18-20). 그러면서 성경 시편에서는 외침과 더불어 기도와 간청을 통해 하느님과 소통하지만, 카르데날은 단지 외침만을 사용한다고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성경 시편에서는 종교 행위의 방법으로 명상과 행위를 함께 사용하지만, 카르데날의 『시편』은 행위만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제프리 R. 배로우(Geoffrey R. Barrow)는 시편 103을 통해 찬미의 시를 분석한다. 그는 카르데날의 『시편』에는 탄식과 탄원의 시가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결론 내리면서, 찬미의 시는 사악한 힘에 대한 응답이며, 창조의 위대함을 강조한다고 말한다(1999, 561). 성경 시편 대부분과 달리, 시편 103은 정치적 지시물을 담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주님의 은총으로 만들어진 이상적인 세계를 제시한다. 그는 카르데날이 이것을 주님의 창조 행위로 보지 않고, 주님의 창조가 계속되는 과정으로 인식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친절을 입증한다(1999, 567-568)고 지적한다. 그리고 호르헤 첸 샴(Jorge Chen Sham) 역시 찬미의 시에 관심을 보인다. 그는 시편 150에서 시인의 목소리가 찬양할 때 사용하는 악기의 소리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밝히면서, 시의 구조와 악기의 소리와의 관계에 집중한다(2007, 25).
한편 다파즈 스트라우트(Dapaz Strout)는 이 시집의 윤리적 관점을 분석하면서 카르데날이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쓴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악은 주로 적에게서 발견되지만, 각 개인에서도 발견되며, 『시편』의 시적 주체는 “집단적 상황을 개인적으로 표현한다”(1975, 113)고 밝힌다. 그렇게 현대인의 상황을 그릴 뿐만 아니라, 사회의식을 고취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단결하며, 그들과 동일시하면서, 모든 형태의 억압과 전쟁과 범죄를 비판한다고 설명한다.
이렇듯 기존 연구는 카르데날의 『시편』에서 발견되는 중심 주제들을 적절하게 포착하여 분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성경 시편과 카르데날 『시편』의 유사성과 차이, 『시편』에서 사용되는 현대 라틴아메리카 사회를 반영하는 언어, 카르데날이 생각하는 악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는 『시편』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있다는 문제를 지닌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아직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시편』을 상호텍스트성 관점에서 살펴보고, 『시편』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두 편을 통해 카르데날의 시학을 심층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Ⅲ. 카르데날의 『시편』은 어떤 작품인가
카르데날은 1957년부터 1959년까지 미국 켄터키주에 있는 ‘겟세마니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있으면서, 그리고 멕시코의 쿠에르나바카(1959~1961)와 콜롬비아의 안티오키아에 있는 ‘라 세하(La Ceja) 그리스도 사제 신학교(1961~1965)’에서 사제 서품을 받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경 시편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콜롬비아 신학교에 있는 동안 그는 혁명가인 사제 카밀로 토레스(Camilo Torres)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다(Dawes 2004, 48).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매료되었지만3) 평화주의자였으며, 책과 여행을 통해 그 지역 원주민 문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다녔고, 원주민 공동체가 초기 기독교와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콜롬비아에 있는 동안 히브리어 성경 시편을 두 명의 베네딕토회 사제(헤로니모 신부와 로베르토 신부)와 함께 스페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Borgeson 1984, 57).
『시편』은 카르데날이 콜롬비아에 체류하던 초기에 쓴 시집으로 1964년 콜롬비아의 메데인의 안티오키아 대학교에서 출간되었다.4) 거의 모든 유럽어로 번역되었고, 출간 부수도 꽤 많았다. 대표적으로 독일어 번역본은 15,000부 이상이 팔린 걸로 알려져 있는데, 시집임을 감안하면 거의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 시집은 독일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시편’으로, 미국에서는 ‘투쟁과 해방의 시편’으로, 프랑스에서는 ‘정치적 시편’, 이탈리아에서는 ‘억눌린 사람들의 시편’, 카탈루냐에서는 ‘아메리카의 외침’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렇게 언어별로 다른 제목이 붙었다는 사실은 유럽 국가들이 이 시집을 매우 중요한 책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시편』은 카르데날이 이 시집 이전에 발표한 모든 작품을 아우르고 있으며, 그의 문학적·영적·사상적 출처의 절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Urdanivia Bertarelli 1984, 105). 다시 말해, 이전의 시집들이 시인의 삶에서 중요했던 각각의 순간을 다루고 있다면, 『시편』은 이런 모든 순간을 하나의 책 속에 모아놓고 있지만, 동시에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하고 있다.
이 시집은 150개로 이루어진 성경 시편 중에서 26개의 시편을 다시 쓴 것이다.5) 시집의 기원은 수도원 기도 규정으로 성경 시편을 낭송하는 관습과 관련이 있다. 카르데날이 있던 켄터키주의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매일 기도 시간에 빠짐없이 시편을 낭송하거나 노래로 불렀다. 카르데날은 『시편』을 창작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힌다.
나는 미사에서 시편을 기도하는 최고의 방법은 모든 가난한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강제 노동하는 사람들, 혹은 집단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 또는 군사 법정에서 재판받은 사람들, 강제로 이주한 사람들, 정치적으로 박해 받은 사람들, 망명자들, 전쟁고아들, 고문받은 사람들, 모든 곳의 가난한 사람들, 니카라과를 염두에 두는 것임을 깨닫는다. 3천 년 전부터 매일 기도하는 이 시편, 이 가톨릭교회의 공식 기도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 수탈당한 사람들, 그리고 독재자들, “마치 빵인 것처럼, 우리 민중을 먹어 치우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 이런 성가에 내 관심을 두기 위해 나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2003, 214).
『시편』은 2차 세계대전(1939~1945)에 나치의 핍박 아래 있었거나 집단 수용소로 들어갔던 사람들의 고통을 언급한다. 이 시집에서 카르데날은 전쟁의 결과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정치와 경제 제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또한 냉전 시기에 일어난 일도 언급한다. 넓은 의미에서 이런 시들은 냉전 시대에 군사 독재를 경험한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여러 국가의 상황을 암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6) 1970년대에 기나긴 독재체제가 들어섰고, 이 체제들은 국민을 탄압하고 고문했으며, 파라과이의 스트로에스네르(Alfredo Stroessner) 독재나 아르헨티나 군사평의회, 혹은 칠레의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독재 아래서는 집단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일반적으로 카르데날의 시는 이런 군사 독재 경험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독자들에게 울림이 크고, 이런 이유로 『시편』은 수십 년 동안 많은 인기를 누리는데, 그것은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이 라틴아메리카 사회가 겪는 정치 상황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Shaw 2008, 57).
카르데날의 『시편』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하나는 탄식의 노래이고, 다른 하나는 찬미의 노래이다. 이런 분류는 근본적으로 주제를 토대로 이루어지며, 성경 시편에서 흔히 행해지는 구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것에 따르면, 이 탄식의 노래에는 4, 5, 7, 9(10), 11(12), 15(16), 16(17), 21(22), 25(26), 30(31), 34(35), 36(37), 43(44), 48(49), 57(58), 78(79), 93(94), 113(114), 129(130), 130(131), 136(137)이 속한다. 한편 찬미의 노래는 18(19), 103(104), 148, 1507)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탄식과 탄원의 노래는 카르데날의 『시편』을 지배하면서, 백성의 탄식과 탄원을 현재화하며,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시편』에서 카르데날은 문학과 신앙, 그리고 정치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인다. 여기서 그는 정치적 색채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완전한 거부는 그의 종교적 삶 속에서 표현되어 있고,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위한 정치 투쟁 의식도 그 안에 드러나 있다. 이런 역사적 현재성이 이 시집의 인기를 설명해줄 수 있는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된다. 즉, 종교성이 현재와 맞물리면서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비신앙인들에게도 호소력 있게 다가간 것이다(Urdanivia Bertarelli 1984, 108).
『시편』의 주제는 크게 세 개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탄압자들의 권력이고, 둘째는 억압받은 사람들의 고통, 셋째는 하느님의 전능함과 위대함이다. 첫째 그룹은 탄압자와 그들의 정당으로, 독재자, 사악한 지도자들, 군대, 폭력배, 선전, 대중매체, 전쟁 등으로 이루어진다. 둘째 그룹은 집단 수용소의 포로들, 고아들, 고문받은 사람들, 정치범, 특히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즉 돈 없는 사람들, 실업자들, 사회의 소외자들이다.
Ⅳ. 『시편』과 카르데날의 상호텍스트 시학: 외향주의, 시적 주체, 그리고 발화 순간
카르데날은 20세기 중반과 후반에 사실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콜라주 기법을 통해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는 시학을 확립한다. 다시 말해서, 카르데날은 에즈라 파운드의 영향을 받아, ‘외향주의’8)로 알려진 미학 이론을 발전시킨다. 특히 그는 파운드가 장르로서의 시를 파괴하고 모든 현실 요소를 ‘이야기 시(narrative poem)’의 일부로 흡수하면서 시의 발전에 이바지했다고 평가한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미학 신비주의, 즉 ‘1940세대’의 에르네스토 메히아 산체스(Ernesto Mejía Sánchez)와 카를로스 마르티네스 리바스(Carlos Martínez Rivas)가 추구한 ‘내관주의(內觀主義, interiorismo)’의 대립 개념으로 만들어진다. 이 시인들은 고상한 예술을 찾으며 니카라과의 사회정치적 상황 혹은 역사를 직접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Valle Castillo 2020, 320).
내관주의와 달리 외향주의9)는 인용문, 일화, 개인 여담, 신문 기사 조각, 통계 자료 등을 시의 내용으로 흡수하고 통합한다. 또한 병치법과 상호텍스트성, 동시성, 그리고 대립적 구조를 사용하며, 이런 점에서 외향주의는 상호텍스트성에 바탕을 둔 시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외향주의는 현실의 지시물을 모두 시 속에 통합하며, 분명하고 단순한 언어를 사용해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파고든다. 파운드의 외향주의가 사상적 원동력으로 파시즘을 수용한 것과는 달리10), 카르데날의 원동력은 해방신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렇게 외향주의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정치 부패, 타락, 사회 부정과 부패에 관한 카르데날의 생각을 짜 넣고 초기 교회의 가르침을 유지하는 공동체적 해결책을 제안하는 방법이 된다(Dawes 2004, 44).
이렇게 사회고발이 주를 이루는 시는 시인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드러내면서 단성적이 되기 쉽다. 하지만 페루의 비평가 안토니오 코르네호 폴라르(Antonio Cornejo Polar)는 카르데날의 시에는 외향주의와 더불어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하고 결합하며, 시적 주체가 변화하고, 발화 순간이 확장되면서 다성적 텍스트를 만든다(1990, 205)는 점에 주목한다. 시적 주체는 일인칭 단수이지만, 동시에 집단의 목소리를 대표하며, 그래서 때로는 일인칭 복수형으로 주님에게 말한다. 이런 목소리는 성경 시편의 시적 주체인 다윗과 같은 기능을 하며, 따라서 상호텍스트성 관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카르데날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우리/ 당신의 백성은/ 당신을 영원토록 찬미할 것이며/ 세세손손/ 당신을 노래하오리라.”(시편 78, 163)
이 시적 주체는 자신을 힘들고 험한 상황을 경험하는 공동체 일부로 여긴다. 그래서 개인적인 외침이지만 집단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건 하느님에게 보호해달라는 죄수들의 목소리이고 탄압자들에 대한 고발이며 사회의 외침이다. 그래서 『시편』의 몇몇 시에서 시적 주체는 일인칭 단수형과 복수형을 번갈아 사용한다. “제가 어려움에 부닥쳤으니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이 잔치를 벌이고/ 축배를 하는 동안/ 우리는 밤에/ 약탈당한 집에서 우나이다/ 우리는 식탁에서 초상집 분위기이나이다”(시편 30, 155-156) 이렇게 성경 시편과 마찬가지로, 일인칭 단수나 복수로 표현하면서, 한 사람이 혼자 기도할 때와 흡사하거나, 혹은 일인칭 복수로 기도하면서 나머지 사람들의 소망과 감정을 표현한다.
시적 주체의 발화 장소와 시간은 주로 유럽의 1930년대와 40년대에, 즉 2차 세계 대전 기간이다. 그래서 집단 수용소(시편 16, 시편 43, 시편 113)나 가스실(시편 21과 시편 43) 같은 언급이 등장한다. 또한 핵무기(시편 4, 시편 148)와 방사능(시편 19)도 언급하며, 이런 역사적 지시물은 분명한 상호텍스트성 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시적 주체는 다른 주체로 표현되며, 발화 순간의 장소는 다양해진다. “저는 구속복을 입고 소리칩니다/ 밤새 정신병자 수용소에서/ 가망 없는 환자들 병실에서/ 전염병 환자 격리 병동에서/ 노인 수용소에서 소리치고,/ 정신병원에서 땀으로 범벅 되어 몸부림치며/ 산소 텐트에서 질식하고/ 경찰서에서/ 수비대 연병장에서/ 고문실에서/ 보육원에서 울고/ 저는 방사능에 오염되었지만/ 아무도 오염되지 않으려고 제게 다가오지 않나이다.”(시편 21, 154) 여기에서 시적 주체는 정신병자, 환자, 노인, 죄수, 고문받은 사람, 고아 등의 목소리를 대표한다. 성경 시편에서도 발화 주체가 다윗 한 사람에 국한되지 않고, ‘코라의 자손들’이나 ‘낙담하여 주님 앞에 근심을 쏟아 붓는 가련한 이’ 등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정신병원이나 보육원, 혹은 양로원 같은 장소는 제3제국의 시기뿐만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도 될 수 있다. 이렇게 시적 발화의 순간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설 수 있다.
카르데날의 시들은 양차 세계 대전의 시기를 언급하지만, 암묵적으로 세계의 다른 지역과 다른 시기로 확장될 수 있다. 즉, 『시편』은 하나의 목소리지만 모든 사람을 위한 목소리이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주민에게 말하는 목소리이다. “모든 백성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들 세상의 모든 주민은 귀 기울여 들어라/ 평민과 귀족이여/ 프롤레타리아와 백만장자들이여/ 모든 사회 계층이여”(시편 48, 160). 그래서 시적 주체는 시편의 메시지를 오늘날의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로 확장한다. 『시편』의 특징 중의 하나는 ‘화자의 복수성’인데, 이것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고, 시적 표현이 억압의 보편성에 바탕을 두게 한다(Borgeson 1984, 58).
그렇다면 『시편』의 시적 주체는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시편』의 시적 주체는 하나의 이름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그의 메시지는 세 수신자를 향하고 있다. 26개의 시편으로 이루어진 『시편』에서 주님은 14편에서 수신자로 나타난다. 주님을 향한 시적 주체의 외침과 간청은 제목에서도 드러난다.11) “당신을 부르짖사오니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시편 4, 145), “제 불평을 들으소서”(시편 5, 146), “주님, 제 정당한 사연을 들으소서”(시편 16, 151) 등이다. 시적 주체는 자유와 정의를 요구하며 기도한다. 그래서 “주님, 저를 해방해주소서”(시편 7, 147). “주님,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소서”(시편 11, 149), “주님, 제게 정의를 베푸소서”(시편 25, 154)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렇게 주님은 수신자나 지시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시적 주체는 부정을 참고 견디는 일반 사람을 향해서도 말한다(시편 11과 시편 36). 혹은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암시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시적 주체는 직간접적으로 세계 지도자들을 향해 말한다(시편 5, 시편 11, 시편 48). 이 수신자들은 탄압적인 정부의 지도자, 핵폭탄을 가진 지도자, 돈 많은 사람, 유명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시편』은 주님뿐만 아니라 여러 수신자에게 말하며, 심지어 몇몇 시에서는 여러 수신자에게 동시에 청원하면서, 다성적 작품이 된다.
Ⅴ. 『시편』의 상호텍스트성 분석: 시편 1과 시편 136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의 『시편』은 수천 년 전의 생각을 20세기의 것으로 현재화하면서 성경 시편과 밀접한 상호텍스트성을 이룬다. 성경 시편은 그리스어 ‘프살모스psalmos’에서 유래하는데, 이것은 하프 혹은 비파 같은 현악기의 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를 가리킨다. 즉, 시편은 찬양과 노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전봉순 2015, 18). 그래서 성경 시편은 노래하거나 낭송할 수 있는 기도문이기도 하다. 카르데날도 『시편』에서 “당신은 정의로우시니 저는 당신을 찬양하리다/ 제 시와 제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리다”(시편 7, 147)라고 말한다.
카르데날은 성경 시편과 그의 시집 『시편』의 관계를 이렇게 밝힌다. “나는 켄터키주에 있는 겟세마니의 우리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수련 사제로 있었다. [⋯⋯] 수도원에서 나오자 나는 『시편』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른 언어가 아닌 지금 시대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Pérez López 2019, 15)라고 밝힌다. 카르데날은 미사에서 시편을 기도하는 최고의 방법이 모든 가난하고 불쌍하고 소외된 주변인들을 염두에 두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성가로 부르는 시편을 이해하려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런 방식으로 성경 시편을 ‘번역’했다. 카르데날은 이런 글쓰기를 성경 시편의 ‘현재화’라고 규정한다(2003, 214). 이렇게 ‘번역’ 혹은 ‘현재화’를 통해 성경 시편에 근본적으로 충실하며, 성스러운 텍스트를 존중하면서도, 오독의 두려움에 제약받지는 않는다. 시인의 자유로운 현재화는 몇몇 행을 제거하거나 축약하기도 하고, 의미를 바꾸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1. 시편 1: 성경 시편과 카르데날 『시편』의 방향 제시
『시편』에서 시편 1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이 시집을 지배하는 탄식이나 탄원의 노래, 혹은 찬양의 노래에 속하지 않으면서, 시적 주체의 위치, 즉 시인의 목소리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고, 작품이 제시하는 진실과 거짓에 관한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며, 작품의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인들의 행복과 악인들의 멸망을 대립시키면서, 시인은 성경 시편에서 말하는 행복의 의미를 보존한다.
성경 시편 1과 카르데날의 시집 『시편』의 시편 1은 다음과 같다.
[성경 시편 1] 1.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2.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3.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4. 악인들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아라. 5. 그러므로 악인들이 심판 때에,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감히 서지 못 하리라. 6. 의인들의 길은 주님께서 알고 계시고 악인들의 길은 멸망에 이르기 때문일세.
[카르데날의 시편 1] 행복하여라! 당의 구호를 따르지 않고/ 당원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며/ 폭력배들의 자리에 앉지 않으며,/ 군사 법정의 군장성들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 행복하여라, 자기 형제를 염탐하지 않고,/ 학우를 고발하지 않는 사람./ 행복하여라, 상업 광고를 읽지 않고,/ 그들의 라디오 방송을 듣지 않으며,/ 그들의 구호를 믿지 않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으리라. (시편 1, 145)
카르데날의 시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1행~4행)은 이 시집 전체의 정치색을 설정한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5행~6행)은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지 말아야 하는 형제애/우애의 가치를 제시한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7행~9행)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것, 즉 읽지 말아야 할 상업 광고, 라디오, 구호를 언급한다. 이 시의 강력한 이미지는 주로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 현실을 성경 시편의 메시지로 번역하면서 구성된다. 당의 구호, 폭력배들, 군사 법정의 군장성들, 염탐, 광고, 구호, 부정부패와 전쟁, 소비주의 정신, 이런 것들의 거부는 천국으로 가는 열쇠로 제시된다.
각 부분은 ‘행복하여라’라는 말로 시작한다. 모세는 “이스라엘아, 너는 복되어라.”(신명기 33:29)라는 말로 축복했고, 다윗은 “사람아, 너는 행복하여라”(시편 128:2)라는 말로 축복한다. 그렇지만 카르데날의 시는 사람에게 집중한다. 이 작품에서는 하느님이 나타나지 않고, 카르데날의 개입이 눈에 띈다. “악인들의 뜻”은 “정당의 구호”가 되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는 “당원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며”로, “오만한 자들의 자리”는 “폭력배의 자리”로 바뀐다. 이것의 의미는 “군사 법정의 군장성들과 함께하지 않는”이라는 행이 덧붙여져 강조되고 반복된다. 이렇게 의인과 악인을 대립하면서, 카르데날의 시는 현재화를 통해 재의미화, 즉 번역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당시 세계대전과 냉전의 상황,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상황도 시 속으로 들어온다.
카르데날의 『시편』은 두 부류의 사람을 대립적으로 제시하고, 이런 구조는 시 전체를 지배한다. 카르데날의 시편 1에서 정당은 민중을 대표하지 않는 조직이자 억압자와 이해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정당은 피해야 할 것이고, 심지어 두려워해야 할 것이 된다. 이 시편의 첫 행에 나타나는 이런 생각은 다른 시편에서도 약간의 변화만 있을 뿐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정당은 독재자들, 폭력배들, 민중을 탄압하는 경찰 조직의 모임 장소로 나타난다(시편 4:3, 시편 5:4-5, 시편 15:7, 시편 25:10-11). 카르데날은 대중 정당뿐만 아니라, 좌익 정당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판한다. 마찬가지로 폭력조직과 군대는 피해야만 할 현실이며, 시적 주체는 그런 현실에서 해방해 달라고 요구한다(시편 7:1-2, 시편 9:61-62). 이런 군대는 권력 지향적이며 부패하고 탄압적이며 외국 열강의 도구가 되어 민중을 수탈하는 데 이용되는 그런 조직이다.
정치와 상업 광고 역시 지배 수단으로 작용하여 피해야만 할 대상이라는 언급은 다른 시편에서도 반복된다(시편 4:3-4, 시편 5:14, 시편 11:5). 이것은 카르데날의 정신적 지주인 토마스 머튼의 “그들의 신문을 읽지 마십시오. [⋯] 그들의 라디오 너머에 있을 수 있다면 기뻐하십시오.”(머튼 1992, 62)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만일 이런 충고를 따른다면 이 시의 중심 이미지인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을 것이다. 이 시에서 시냇물은 오염되지 않은 진실을 상징한다. 즉, 선전의 반대이다. 진실은 시간 속에 영속한다. 이런 나무는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대중매체를 통해 유포되는 거짓말을 읽지 않고 듣지도 않으며 믿지 않는 사람이다.
한편 ‘행복하여라’처럼 성경 시편의 문체를 이용한 대표적인 예로는 시편 4를 들 수 있다. 이 시편은 “주님 당신의 평온한 얼굴로/ 폭탄 위에 빛을 비추소서”를 비롯해 “주님 당신의 평온한 얼굴로/ 폭탄 위에 빛을 비추소서”, 그리고 “주님, 저희 위에 당신 얼굴의 빛을 비추소서”라고 말한다(시편 4, 145). 여기서 카르데날이 『시편』에서 구현한 근본적인 특징을 볼 수 있다. 그가 말하는 ‘번역’은 기본적으로 단어를 바꾸고 현재의 구체적인 의미를 덧붙여 재의미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성경 시편 1과 『시편』의 시편 1의 전개 과정을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카르데날의 시편 1에서는 성경 시편 1의 2절이 완전히 제거되는데, 그는 명상을 통해 주님과 관계를 맺는 것을 제거하고, 독자를 역사 속으로 데려가 주님이 인간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게 한다. 그리고 성경 시편 3절은 첫 부분만 사용되고, 뒷부분은 제거된다. 시인은 그 대목만 잘라내어 자기 시의 중심 이미지로 사용한다. 성경 시편과 카르데날의 시는 모두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한 약속을 포함한다. 즉, 의로운 사람들은 현재 보이지 않는 열매까지도 믿음을 갖고 기다릴 수 있지만, 카르데날의 작품은 그에 대한 보상이 초월적이고 사후가 아니라 현세에 도착한다는 점에서 성경 시편과 차이를 보인다. 또한 악인들의 처벌과 관련된 성경 시편의 4절과 5절, 그리고 6절 역시 사라지고, 대신 더러운 권력과 공모한 여러 요소를 열거한다. 이런 ‘변화’는 현대 사회의 악을 고발하고 불경한 행위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에게 축복이 내릴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우면서도 위협적이지 않은 채 정의의 길로 이끌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2. 시편 136: 성경 시편의 충실한 번역
보니 M(Boney M)의 노래 ‘바빌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로 널리 알려진 이 시편은 역사적 지시물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이 성경 시편은 기원전 587년의 예루살렘 파괴를 다루며, 따라서 역사를 상호텍스트로 삼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카르데날이 자신의 스승으로 삼았던 토머스 머튼과 십자가의 성 요한도12) 이 성경 시편을 바탕으로 시를 쓰면서 성경 시편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을 개진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그래서 성경 시편과 카르데날의 시편, 그리고 토머스 머튼과 십자가의 성 요한의 네 판본13)에 나타나는 핵심적인 차이를 살펴보면서, 카르데날이 이 시편을 선택한 이유를 알아보고자 한다.
[성경 시편 136] 1. 바빌론 강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2.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3.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 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4.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5.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6. 내가 만일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 7 주님, 에돔의 자손들을 거슬러 예루살렘의 그날을 생각하소서. 저들은 말하였습니다. “허물어라, 허물어라, 그 밑바닥까지!” 8. 바빌론아, 너 파괴자야! 행복하여라,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너에게 되갚는 이! 9. 행복하여라, 네 어린 것들을 붙잡아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
[카르데날의 시편 136] 바빌론 강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바빌론의 마천루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강물에 비친 불빛을,/ 바빌론의 나이트클럽과 술집의 불빛을/ 그 음악을 들으며/ 우리는 우네.// 강기슭의 버드나무에/ 우리는 비파를/ 가엾은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우네.// 포로를 데려온 사람들은/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우리말로 된 노래를,/ 시온의 민요를 부르라고 했네./ 남의 나라 땅에서 어찌/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리고,/ 암에 걸리리라!// 내가 만일 그들의 기쁨보다/ 그들의 모든 잔치보다/ 예루살렘을 으뜸으로 두지 않는다면.// 폭탄으로 무장한 바벨이여!/ 파괴자여!/ 행복하여라, 네 어린 것들을 붙잡아/ - 네 실험실의 피조물들을 -/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169~170)
카르데날은 회고록 『잃어버린 삶 La vida perdida』에서 미국 켄터키주의 겟세마니 수도원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을 많이 읽었으며, 그걸 영적 지침서로 여겼다고 밝히고(2003, 17), 그 말은 『혁명의 성스러움 La santidad de la revoulción』에서도 반복된다. 또한 신비주의 시를 쓰겠다는 생각에서도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카르데날의 「시편 136」과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시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시편에 대한 로망스」는 매우 다르고, 따라서 영향이나 명시적인 상호텍스트성 관계를 맺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두 개를 비교하며 분석하면, 예술적 관점에서 카르데날이 이 시편을 선택한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성경 시편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다시 말해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수(幽囚)를 다룬다. 이것은 구체적 지시물이 있다는 것, 즉, 유수나 추방을 상상해서 만든 시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이 시편의 중심 주제는 유배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고향 땅에서 쫓겨나 남의 땅에서 노예가 된다. 이렇게 유배되면서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압제자에 대한 증오와 저주는 가중된다. 이런 현상은 바빌론이 압제를 상징하는 도시이며, 이것과 맞서 저주가 이루어지는 장면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성경 시편 136은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며,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부르는 찬가도 아니고, 슬픔에 젖은 기도도 아니다. 이것은 슬프고 애달픈 노래이며, 여기서 바빌론의 사악함과 하느님 왕국의 평화인 예루살렘은 대립한다.
한편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시는 신비주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성경 시편의 ‘우리’를 ‘나’로 바꾸고서, 사랑하는 연인(‘너’)에게 말하듯이 부재의 고통을 서술한다. 일인칭 시적 주체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리고 죽음을 소망한다. 회상은 기억의 달콤함과 이별의 고통이라는 대립 관계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시적 주체는 ‘비파’가 아니라 ‘악기’를 버드나무에 걸어놓았다고 말하면서, 악기 이름으로 알 수 있는 역사적 맥락에서 해방된다. 성경 시편에서는 바빌론 유수라는 역사적 사건이 구체적으로 다뤄지지만, 십자가의 성 요한은 역사적 맥락과 관련된 언급을 모두 삭제한다. 그렇게 시인 ‘나’와 당신 ‘주님’만 남고, 그들은 부재에 관해 신비적이고 역동적인 대화를 나눈다. 성경 시편과 비교하면, 의미가 상당히 바뀌고, 내면적으로 재해석되면서, 그렇게 주님의 신비와 가까이 있을수록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진정한 영광이 오로지 주님 덕분이라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런데 토마스 머튼은 물질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인간을 깊이 해석하고자 한다. 그래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과 더 흡사하다. 머튼은 카르데날에게 신비주의의 새로운 개념을 전하는데, 그것은 역사 속에서 하느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Urdanivia Bertarelli 1984, 112). 머튼의 판본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시편과 매우 다르다. 머튼의 시에는 ‘포로들 - 시편’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그리고 라틴어 인용문이 나오는데, 이 말은 ‘내가 어떻게 타인의 땅에서 유배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라는 뜻이다. 이 언급만으로도 성경 시편 136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머튼은 도시를 다스리는 부패한 왕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를 바빌론처럼 등장시킨다. 이런 소개 이후 머튼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제거했던 부분을 되살린다. 그것은 도시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복 받을 것이라는 대목이다. 그는 “행복하여라, 네 어린 것들을 붙잡아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 하느님의 아이들은 죽었다, 오 바빌론이여”(Merton 1980, 211)라고 쓰면서, 성경 시편의 가장 잔혹한 이미지를 경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버드나무에서, 아시리아는 우리 노래를 죽였네.”(Merton 1980, 212)라고 고발적인 어조로 말하면서 성경 시편과 명백한 상호텍스트성 관계를 이룬다. 그런 다음 머튼은 ‘기억의 저주’를 선택하지만, “내가 만일 그대를 잊는다면, 명상이여!”(Merton 1980, 212)라고 바꾼다. 여기서 시온은 명상의 길이 되고, 이런 방식으로 머튼은 내면의 삶을 배양하는 본질을 강조하며, 부패의 번식은 비싼 대가를 치른다. 마지막 행은 환시의 도시 시온을 그린다.
카르데날의 시편 136은 성경 시편과 여기서 살펴본 두 시편과는 다소 다르다. 여기서 두 작가 중 하나는 성인이며, 다른 하나는 존경받는 신학자인데, 사제직을 정지당했던 카르데날의 판본이 셋 중에서 성경 시편에 가장 충실하다는 점이 관심을 끈다. 카르데날은 시의 목소리로 ‘우리’를 유지하는데, 그것은 그다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상호텍스트로 작용하는 성경 시편에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하는 신앙의 길은 내면을 표현하고, 시편 작가의 믿음처럼 하느님 백성의 역사 속에서 구현된다. 우선 시작 부분에서 카르데날은 첫 행을 충실하게 번역하지만, 이후 현재형 동사를 통해 작지만, 본질적인 변화를 꾀한다.
카르데날의 시편에서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주님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은 하느님 왕국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앉아 울고 있다. 그러면서 남의 땅에서 이방인이 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부정하고 부패한 사회에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 머튼의 시처럼 바빌론이 나타난다. 그곳은 현대 도시이지만, 이제는 어둡고 음산하지 않다. 그곳은 마천루 사이에, 환한 불빛 속에 있으며, 나이트클럽과 시끄러운 음악이 있는 곳이다. 그곳은 소비주의가 만연한 기술 사회이다. 카르데날의 시 1연 마지막 행에는 “우리는 우네”가 나오고 2연의 마지막 행에서도 “우네”가 나오면서, 눈물을 강조한다. 그리고 강기슭에서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시에서는 성경 시편의 첫 두 행을 완벽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의미도 보존된다. 하지만 현재 속에서, 즉 강제로 추방된 사람 혹은 오늘날의 피난민과 연결되어 재의미화된다. 그리고 성경 시편처럼 버드나무에 걸어둔 비파의 모습도 언급된다.
성경 시편의 3절, 다시 말해 포로를 잡아간 사람들이 포로에게 노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조롱이다. 카르데날의 작품에는 그들을 잡아 온 사람들이 요구한 노래를 “우리말로 된 노래”, 즉 시온의 민요라고 말한다. 여기서 카르데날은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사람의 어조와 그 말에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의 말투를 그대로 옮긴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고서 이 작품의 핵심 질문이자 머튼의 시에서 ‘헌사’처럼 사용한 글이 나온다. “남의 나라 땅에서 어찌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
이후 성경 시편은 배신자가 받는 형벌로 나아간다. 카르데날 역시 그것을 그대로 재생하면서 같은 죗값을 보여주지만, 더 현실적으로 그린다.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리고,/ 암에 걸리리라!” 그러고는 “내가 만일 그들의 기쁨보다/ 그들의 모든 잔치보다/ 예루살렘을 으뜸으로 두지 않는다면”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유혹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언급한다. 이 지점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이내 느낌표가 붙은 두 개의 행이 나온다. 그리고 성경 시편의 8절이 보여주는 ‘잔혹한’ 행복으로 나아간다.
아마도 이것은 종교적인 면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기의 『시편』이 구약 시편의 잉여물을 청산하고, 주님의 교리로 세상의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복수의 법을 언급하거나 시사하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카르데날은 신랄한 복수를 보여주는 성경 시편의 7절을 생략하고, 8절을 다음과 같이 재의미화한다. “폭탄으로 무장한 바벨이여!/ 파괴자여!/ 행복하여라, 네 어린 것들을 붙잡아/ - 네 실험실의 피조물들을 -” 이렇게 카르데날의 이 시편은 성경 시편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구성되지만, 의미를 완전히 변화시키고 현재로 옮겨와 심오한 의미를 유지하게 한다.
Ⅵ. 맺는말
카르데날의 스승 토머스 머튼은 세상을 보는 개인적 관점과 그것이 세상 안에서 유효하도록 성경 시편을 개작해보라고 조언하고, 카르데날은 그 조언을 따랐다. 이 기법은 또한 에즈라 파운드에게서 배운 방식, 즉 머나먼 기록을 사용하는 방법과 부합했다. 성경 시편을 기도하면서 카르데날은 마음속으로 그 내용을 ‘번역’했으며, 라틴아메리카와 현대 세계의 현재 상황과 구약의 상황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려고 했고, 그 결과물이 『시편』이었다.
카르데날은 성경 시편의 문체를 채택해 우리 시대의 상황을 말하면서, 20세기에 인간을 괴롭히며 불안하게 만든 많은 문제를 말하는 현대의 기도문을 작성한다. 부정과 고문에 대한 두려움, 권력자들의 수탈,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 집단 수용소, 원자폭탄으로 위협받는 세계, 핍박받는 사람들과 수형자의 고통, 광고와 음모와 책동, 은행가들의 탐욕, 무기에 대한 집착 등이 기도문에 담긴다(Mañú Iragui 1990, 38). 그는 손가락으로 악의 주선자들을 가리키며 고발하고, 동시에 슬픔에 빠진 희생자들과 하나가 된다.
이렇게 『시편』은 백성의 고통을 공유하고 고발하려고 한다. 카르데날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 앞에서 절망에 빠진 민중의 구원과 해방을 찾는다. 이 해방은 역사적이고 현세적이다. 구티에레스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 구원하시고 [⋯] 인간은 창조계의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인간 노력으로 성취된 것도 모두 역사 안으로 흡입된다.”(1977, 172) 그래서 카르데날의 『시편』은 당대의 사회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 사회는 주로 2차 세계대전 동안의 유대 백성의 고통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 민족은 고통받는 모든 민족을 상징하고, 따라서 니카라과와 라틴아메리카 백성도 마찬가지로 세계 역사 안으로 들어오며, 이렇게 역사는 보편화된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22년도 울산대학교 연구비에 의해 연구되었음.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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