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itute of Iberoamerican Studies
[ Article ]
iberoamerica - Vol. 27, No. 1, pp.137-164
ISSN: 1229-9111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0 Jun 2025
Received 08 May 2025 Revised 04 Jun 2025 Accepted 11 Jun 2025
DOI: https://doi.org/10.19058/iberoamerica.2025.6.27.1.137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ña) 북부의 식민화와 프레시디오(Presidio)

임상래**
**부산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교수. srlim@bufs.ac.kr
The Colonization of Northern Nueva España and the Role of the Presidio
Lim, Sang-rae**

초록

누에바 에스파냐의 북부 지역의 정복과 식민화는 거친 자연환경과 강력한 원주민의 저항으로 인해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여기에 유럽 열강의 부상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이 더해져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러한 도전에 대응하여 스페인 왕실은 효과적인 방어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프레시디오(presidio)를 설립하였고, 그 형성과 발전은 북부 지역의 지정학적 조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프레시디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션(misión)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미션과 프레시디오는 각각 독립된 기구였지만, 상호 의존적인 방식으로 작동하였다. 두 제도는 16세기 치치메카 전쟁과 그에 이은 평화 과정 속에서 함께 등장하고 발전하였다. 이들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북부 식민화의 추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프레시디오는 단순한 국경 방어 기지를 넘어, 스페인 식민정책의 핵심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초기에는 임시 군사기지로 출발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방어 요새로 정착되었고, 나아가 농업, 목축, 주거 기능을 갖춘 정착지의 기원이 되었다. 이처럼 프레시디오는 누에바 에스파냐, 특히 북부에서 스페인 제국의 통치 체제를 공고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식민화 기구였다고 할 수 있다.

Abstract

The conquest and colonization of the northern territories of Nueva España presented significant challenges due to its harsh environment and strong indigenous resistance. Later, it also faced political instability from emerging european powers. To establish effective defense, the Spanish crown created the presidio, whose formation and development were closely tied to the region's geopolitical conditions.

Understanding the presidio necessitates an examination of its relationship with the mission. In Nueva España, missions and presidios functioned as distinct yet interdependent institutions that emerged and evolved through the Chichimeca War and the subsequent peace process of the 16th century. These institutions maintained a complementary relationship and played a key role in promoting the colonization of northern Nueva España.

The presidio was not only part of the border defense system but also served non-military functions as a key tool of colonial policy. Starting as a temporary military outpost, it evolved into a fortress and later a settlement with agriculture, livestock, and housing. Thus, the presidio held military and political importance in Spain's colonial rule in northern Nueva España.

Keywords:

Nueva España, Presidio, Mission, Chichimeca, Colonization

키워드:

누에바 에스파냐, 프레시디오, 미션, 치치메카, 식민지화, 식민화

Ⅰ. 들어가는 말

멕시코 정복의 시작 시점은 스페인인이 메소아메리카에 도착한 1519년으로 보는 것에 이견이 없다. 1517년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가 유카탄을 탐험하여 스페인과 메소아메리카 간의 최초 접촉이 이루어졌고 2년 후 에르난 코르테스 원정대가 멕시코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정복이 시작되었다. 코르테스는 최초의 식민 도시인 베라크루스를 건설하고 시의회 격인 카빌도를 세웠으며, 이를 통해 멕시코 정복의 서막을 열었다(Escalante 2004, 62).

1521년, 코르테스의 군대는 테노츠티틀란을 함락시켜 스페인 왕실이 현재 멕시코 영토에 새로운 지배 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테노츠티틀란의 함락은 메시카(Mexica) 제국의 정복에 불과했으며, 여전히 탐험과 정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광범위한 지역이 남아 있었다. 특히 북부 지역은 가혹한 자연환경과 치치메카(Chichimeca)로 대표되는 강력한 원주민 저항으로 인해 정복과 식민화가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스페인에게 중요한 도전 과제였으며,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일종의 군사요새인 프레시디오(presidio)가 도입되었다. 프레시디오는 이후 스페인이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 지역에 식민 지배를 안정적으로 확립하기 위한 핵심 도구가 되었다.

프레시디오는 일반적으로는 요새화된 지역의 수비대를 지칭하였고 확장된 의미로는 일련의 방어선을 형성하는 야전 요새들을 지칭하기도 하였다(Gutiérrez 2005, 374), 누에바 에스파냐의 프레시디오는 중심지인 멕시코시티에서 멀리 떨어진 국경이나 변방에서 미정복 원주민을 상대하기 위해 배치된 군대나 그 주둔지를 지칭하거나 주둔 부대가 있는 성채나 요새와 같은 군사 시설을 의미하였다. 초기에는 원주민의 공격으로부터 식민지를 방어하는 군사적 성격이 강조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행정적, 경제적, 종교적 기능으로 그 역할이 확대되었다. 따라서 누에바 에스파냐의 프레시디오는 군사 주둔지일 뿐만 아니라, 원주민과의 교역, 선교 활동, 그리고 새로운 식민 정착지의 기반이 되는 복합적인 시설로 기능하였다1).

따라서 이 연구는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 지역의 프레시디오가 갖는 의미와 성격을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단순한 군사 기지를 넘어서 식민 지배 도구로서 어떻게 기능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먼저 누에바 에스파냐의 북부 지역이 갖는 고유한 지리·문화적 성격을 고찰하고 이를 기반으로 프레시디오가 수행한 군사적, 경제적, 사회적 기능을 종합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이 논문의 연구주제를 다룬 국내의 선행 연구는 이루어진 것이 없기 때문에 언급할 것이 없고 해외에서는 역사학뿐만 아니라 건축학, 군사학 등 여러 분과 학문에서 관련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프레시디오에 대한 연구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초기 프레시디오 연구는 군사사적 시각에서 출발하였는데 이 시기 대부분의 연구는 미국의 국경사 또는 서부사적 관점에서 프레시디오의 전략적 역할과 제도적 기원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대표적으로 Christiansen(1969), Faulk(1969), Wayne Powell(1987) 등의 연구가 있다. 그 이후 프레시디오는 단순한 군사시설이 아닌, 식민지 통치의 핵심 제도로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과 멕시코 학계에서는 치치메카 전쟁, 북부 지역의 정복 전략, 미션과의 관계, 도시화 과정, 건축 양식 등 프레시디오와 연관된 다양한 주제가 다루어졌다. 최근에는 프레시디오를 스페인 제국의 식민 지배 체제의 일부, 즉 국경 확장, 지역 통합, 교통로 연결, 경제권 형성의 거점으로 이해하려는 거시적 관점의 연구가 수행되었다. 동시에 문화유산학적 시각도 등장하여 프레시디오를 현대의 역사 정체성과 공간 기억의 일부로 재인식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요컨대, 프레시디오 연구는 초기의 군사사 중심에서 출발하여, 이후 제도적·공간적·사회적 해석으로 확장되었고, 오늘날에는 스페인 제국의 식민 체제와 문화유산의 관점에서 프레시디오를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프레시디오가 누에바 에스파냐, 특히 북부의 정복과 식민화 과정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또 원주민 개종과 식민화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미션(misión)을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조망한 연구는 많지 않다. 따라서 이 연구는 다양한 시각의 선행 연구들을 문헌 분석 방법을 통해 고찰하고 이를 통해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 지역의 프레시디오가 국경 방어를 위한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식민화 기구로서 비군사적인 역할도 수행했음을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연구 주제는 독창적이며, 이 논문은 학술적으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연구는 멕시코-미국 관계사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프레시디오는 오늘날 미국 남서부 여러 도시의 기원으로서 큰 의미를 갖는 역사문화 유산이다. 따라서 프레시디오는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의 식민화 기구에 국한되지 않으며, 미국 국가 형성 과정의 일부를 이루는 요소이기도 하다. 아울러 프레시디오는 미국 내 히스패닉 유산을 상징하는 중요한 역사적 건축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레시디오에 대한 양국적 시각의 심층적 분석이 향후 후속 연구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Ⅱ.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의 지리·문화적 특성

1. 북부의 지리적 개념과 경계

나중에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ña)라고 불린 오늘날의 중미에서 미국 남서부에 이르는 지역은 스페인이 도착하기 전 각기 다른 문화와 환경을 지닌 다양한 인구 집단이 살고 있던 곳이었다. 따라서 누에바 에스파냐는 환경적, 문화적으로 동질적이지 않았으며, 이러한 특성은 정복과 식민의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중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 지역은 다른 지역과 대비되는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북부 지역은 오늘날의 멕시코 북부와 미국의 남서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다2). 이 지역을 부르는 가장 일반적인 명칭은 ‘북’을 의미하는 노르테(norte)였지만 식민시대에는 셉텐트리온(septentrión)3)이라는 용어가 더 널리 사용되었다.

셉텐트리온은 중심 권력(멕시코시티)이 미치기 어려운 변방으로 간주되었으며, 원주민 부족의 위협과 식민지배의 어려움 때문에 위험하고 척박한 지역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개념이었다. 18세기 국경 경비를 감찰한 페드로 데 리베라(Pedro de Rivera)장군과 루비 후작(Marqués de Rubí)의 보고서에서 국경 지역을 설명할 때 이 명칭을 사용했고 탐험가나 선교사들의 보고서에서도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북부 지역을 기술할 때 이 용어를 사용했다(García 2017).

멕시코 중남부의 정착 농경 사회가 레르마(Lerma) 강(멕시코 중서부를 통과함)과 파누코(Pánuco) 강(멕시코 동부를 거쳐 멕시코 만으로 흐름)을 경계로 형성되었기에 그 이북 지역을 셉텐트리온으로 구분하기도 한다(Cisneros 1998, 57). 따라서 일반적으로 셉텐트리온의 지리적 범위는 오늘날의 멕시코 북부에 해당했지만, 이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플로리다에 이르는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스페인어 ‘티에라 아덴트로(Tierra Adentro)’도 누에바 에스파냐의 북쪽 지역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번역하면 ‘안쪽의 땅’이라는 의미인데, 아메리카의 탐험과 정복이 대서양 연안에서 내륙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티에라 아덴트로는 해안에서 떨어진 아직 알지 못하는, 위험한 지역이란 의미를 가졌다(Carrillo 2017, 98). 누에바 에스파냐의 정복과 식민은 멕시코 만 연안에서 멕시코 중남부를 거쳐 북쪽으로 진행되었기에 때문에 티에라 아덴트로도 지금의 멕시코 북부와 미국의 남서부를 지칭했다.

정복시대의 북부 지역의 지리적 범위를 정의하기 위해선 케레타로(Querétaro)와 사카테카스(Zacatecas)를 언급할 가치가 있다. 케레타로는 이 도시 이북 지역에 거주했던 치치메카 원주민을 제압하기 위해 스페인 군대가 주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또 치치메카 전쟁에서 스페인 지원군이 충원되는 전략적 중심지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케레타로는 ‘티에라 아덴트로의 목구멍(Garganta de la Tierra Adentro)’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 사카테카스는 ‘노르테의 어머니(Madre del Norte)’라는 별명을 가진 도시로, 1546년 은광이 발견된 이후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의 탐험과 정복을 촉진한 중심 도시로 발전했다(Vallebueno 2014; Fernández 2022, 133). 따라서 이 두 도시는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 식민화의 기점이자 거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북부를 지칭하는 또 다른 개념은 아리다메리카(Aridamérica, Aridoamérica)이다. ‘Arido’가 ‘메마른’이라는 의미를 가지듯이, 이 지역은 건조하거나 반건조한 기후를 띠고 있다. 또한, 사막과 고원지대로 이루어진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멕시코에서 가장 척박한 지역이다. 아리다메리카는 메소아메리카 북쪽에 위치하며, 따라서 그 지리적 범위는 메소아메리카와의 경계가 기준이 된다. 메소아메리카의 경계는 역사적 발전 과정에 따라 변동되어 왔으며, 초기에는 올멕 사회와 관련된 멕시코 만 연안, 게레로, 모렐로스 및 중앙 고원 지역을 포함하였다. 이후 마야 도시들과 몬테 알반이 메소아메리카에 통합되었고, 멕시코 서부의 나야리트와 시날로아 해안 지역은 6세기경 메소아메리카 문화권에 편입되었다(González 2010, 7; Matos Moctezuma 2000, 112). 따라서 아리다메리카는 일반적으로 시날로아 이북 지역으로 간주된다. 또 중미에서 미국 중부까지의 지역을 메소아메리카, 오아시스아메리카, 아리다메리카로 구분한 폴 키르히호프(Paul Kirchhoff)의 분류를 참고하면 메소아메리카의 북쪽 경계는 파누코 강까지로 설정되며, 이 경계 이북의 지역이 아리다메리카로 정의되기도 한다(Busto Ibarra 1997, 209).

이와 같이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는 오늘날의 멕시코 북부와 미국 남서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지리적·문화적 다양성이 두드러졌다. 이 지역은 셉텐트리온, 티에라 아덴트로, 아리다메리카 등으로 구분되어 불렸고, 가혹한 자연환경과 유목·수렵 중심의 원주민 문화로 인해 스페인 식민 지배가 어려웠던 변방 지역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의 정복과 식민화 전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 지리적 특성과 치치메카 원주민

북부 지역의 기후는 극도로 춥거나 덥지 않았으나, 지역에 따라 일교차가 심했다. 다양한 식생이 분포해 있었고 해충이 많은 지역도 있었다. 이 지역은 동 시에라 마드레(Sierra Madre Oriental) 산맥과 서 시에라 마드레(Sierra Madre Occidental) 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산지와 경사지가 많다. 수량이 풍부한 하천도 있지만, 건조한 지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북아메리카 최대 건조 지대인 치와와 사막은 북부 지역의 가장 큰 지리적 장애물이었다. 사막 지형은 물을 구하기 어렵고, 원주민이나 산적의 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또한 가축 사료로 사용할 풀이 부족하고, 푸마나 코요테와 같은 사막의 야생동물은 목축업에 큰 위협이었다. 특히 오늘날 뉴멕시코의 라스 크루세스(Las Cruces)와 소코로(Socorro) 사이의 100마일 구간은 ‘죽음의 여정(Jornada del Muerto)’이라 불릴 정도로 험난한 지역이었다. 이곳은 물 부족뿐 아니라 우기(7~10월)에는 물이 범람하는 이중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Meza 2009, 17; Santos Salinas 2016, 1112).

이 지역의 원주민은 사냥, 채집, 이동 생활을 주로 하였으며, 농업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인구 밀도는 낮았고, 식량과 은신처를 찾아 광범위한 지역을 이동하며 생활했다. 부족 간의 접촉과 교류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특히 치치메카 원주민은 용맹하고 호전적인 특성으로 인해 스페인에 쉽게 정복되지 않았다.

치치메카 원주민은 나우아틀어로 ‘개의 혈통’, ‘야만인’, 또는 ‘흡혈인’을 의미하며, 중앙 고원의 북부 지역에 거주하던 수렵 및 채집 생활을 하는 유목 또는 반유목 원주민들을 지칭하는 비하적 용어로 사용되었다. 치치메카 원주민은 그란 치치메카(La Gran Chichimeca)4)라고 불리는 지역에 거주한 과마르족(Guamares), 사카테코족(Zacatecos), 과치칠족(Guachichiles), 테쿠엑스족(Tecuexes), 칵스칸족(Caxcanes), 호나스족(Jonaces), 파메족(Pames) 등 여러 부족 집단을 포괄하는 명칭이다(Noriega 2022, 52).

치치메카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한 설에 따르면 이들은 약 1170년경 미 콜로라도 강 유역에 정착하였으며, 이후 남하하여 멕시코 중앙 고원까지 이동했으나 지역 주민들에 의해 쫓겨난 원주민 종족의 후손으로 여겨진다(Enciclopedia de México 4). 메시카(아즈텍)인의 조상도 아즈틀란에서 남하하여 중앙 고원으로 이동했으며, 일부는 치치메카의 기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톨테카인들은 자신들을 ‘치치메카의 후손’으로 자처하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 동안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해 치치메카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였고 다른 지역의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노예가 이주하면서 혼혈이 이루어져 순수한 치치메카 후손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과마르족은 전사로서의 명성이 높았으며, 과치칠족은 붉은 색으로 몸과 머리를 칠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테쿠엑스족은 잔인한 전투 성향으로 알려졌고, 이 종족들은 오늘날 남아있지 않다. 사코테코족은 활을 능숙하게 사용하며 스페인 통치에 강력히 저항했다. 칵스칸족은 ‘정복자’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호나스족과 파메족은 비교적 온건한 성향을 보였다(Noriega 2022, 52).

치치메카는 명확한 지배 체계나 고정된 거주지를 가지지 않았다. 이들은 기동성이 뛰어나고 이 지역의 지리에 대해 정통하여 매복과 기습을 주요 전술로 활용하였다. 이로 인해 스페인군은 치치메카의 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는 훗날 치치메카의 저항이 장기화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북부 지역은 생태, 지리, 종족적으로 누에바 에스파냐의 중남부 지역과 뚜렷이 구별되는 성격을 지닌 곳이었다.


Ⅲ. 프레시디오의 형성과 건축적 특성

1. 치치메카 전쟁과 프레시디오의 형성

누에바 에스파냐의 북부 지역은 험난하고 위험한 곳이었다. 이 중 가장 큰 위협은 사카테카스 이북에 거주하는 호전적인 원주민들이었다. 16세기에 들어 이 지역에 광업이 발전하고 스페인인이 늘어남에 따라 원주민의 저항과 충돌이 빈번해졌고 그 결과 믹스톤(Mixton, Mizton) 전쟁(1540~1542)이 발발하였다. 강제 노동과 종교 강요, 엔코멘데로와 스페인 군인들의 잔혹한 억압이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칵스칸족과 사카테코족은 반란을 일으켜 험준한 지역인 믹스톤에 방어 거점을 구축하고, 스페인 군대와 동맹 원주민으로 구성된 진압군을 격퇴했다. 안토니오 데 멘도사 부왕의 지시로 정복자 페드로 데 알바라도가 재공격에 나섰으나 패배하고 그는 전사하였다. 스페인 군은 1542년 병력을 보강하여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믹스톤 언덕을 함락시키고 반란을 진압했다(Chávez 2021, 180)

믹스톤 전쟁의 진압으로 원주민의 조직적 저항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으나, 스페인의 진출이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로 계속되면서 본격적인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결국 누에바 에스파냐 식민사에서 가장 긴 전쟁인 치치메카 전쟁(1550~1590)이 발발하였다.

사카테카스에서 광산이 개발된 뒤, 1549년 사카테카스와 멕시코시티를 연결하는 도로가 개설되었다. 도로는 광산업의 발전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식량과 생필품의 공급을 받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도로 개설과 함께 스페인인의 정착이 늘어났다. 초기에는 치치메카 원주민과 선물을 주고받으며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치치메카 원주민은 자신들의 땅에 스페인인이 계속 늘어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았다. 1550년, 그들은 식량, 의복, 말, 무기 등 화물을 탈취하고 스페인인과 도로를 공격하는 전략으로 맞섰고, 이로 인해 치치메카 전쟁이 발발하였다. 식민 당국은 치치메카의 공격을 제압하기 위해 재정을 투입해 병사를 모집하고 군대를 창설했다. 또한 병사들에게 원주민을 포획해 거래할 수 있는 특권을 인센티브로 제공하고, 필요한 지역에는 프레시디오를 건설했다(Busto Ibarra 1997, 213-2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군은 치치메카의 공격을 제압하지 못했고 전쟁은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치치메카 전쟁이 장기화된 이유는 이 지역 원주민들의 다양성과 그들의 생소하고 복잡한 대응 방식 때문이었다. 치치메카 원주민은 부족별로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이들을 전면적으로 제압하는 것도, 반대로 이들과 협상을 진행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또한 이 지역의 지리 환경에 최적화된 원주민의 공격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들은 무기 사용에 능숙했고 전투 기술도 뛰어났다. 또 치치메카는 고정된 거주지를 가지지 않았기에 넓은 지역을 활용하는 전술로 싸웠다. 이들은 전면전 대신 기습, 매복, 교란을 통해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게릴라전의 대가였다.

결국 스페인은 치치메카를 무력으로 완전히 제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1590년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이른바 ‘매수된 평화(paz comprada)’라는 외교적 접근을 선택했다. 선교사와 미션을 중재자로 활용하여 치치메카 원주민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대신 식량, 옷, 금전 등의 물품을 지급하며 정착지와 군사적 보호를 제공하는 회유책을 시행하였다. 또 이미 개종한 원주민을 치치메카 지역으로 이주시켰다(Ibid., 214). 이러한 전략으로 북부 지역에서 가장 격렬했던 원주민 저항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원주민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스페인 식민 당국이 북부 지역을 완전히 평정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는 메시카와 비교할 때 대조적이었다. 테노츠티틀란 함락 이후, 메시카에 예속된 부족들은 빠르게 스페인에 복속되었고, 독립 부족들도 곧 항복했다. 당시 메소아메리카에는 수백 개의 세뇨리오5)가 존재했으며, 정복 이후 이들은 정복자에게 할당되었고 정복자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카시케를 통해 통치를 공고화하였다. 이로 인해 식민 지배 체제는 신속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북부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통하지 않았다. 치치메카족은 메소아메리카 부족과 달리 부족 간 복속 관계나 조공 체제가 존재하지 않았다(Escalante 2004, 65, 79).

프레시디오가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 지역 방어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소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당시 부왕이었던 마르틴 엔리케스는 1570년 치치메카의 공격으로부터 도로, 마을, 농장, 광산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에 프레시디오의 건설을 지시하였고 이전까지 지역 사회나 개인이 부담하던 병사들의 급여를 식민 당국이 왕실 재정으로 지급하기 시작했다(Wayne 1987, 25-27). 당시 세워진 프레시디오는 군사초소에 가까웠지만 이 시기 이후 스페인은 북부 지역 방어의 중요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이것은 프레시디오의 군사적 역할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프레시디오는 군사 기지에 그치지 않았다. 치치메카 전쟁 동안 원주민 대표와 스페인 식민 관리 간의 협상이 프레시디오에서 이루어져 정치적 역할도 수행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프레시디오는 점차 북부 지역 방어 체계의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프레시디오와 함께 미션도 치치메카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미션은 원주민들에게 식량, 안전, 교육을 제공하며, 비정착 원주민 집단을 스페인 식민 체제 내로 통합하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나아가 미션은 원주민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식민 당국이 효과적으로 원주민 사회를 통제하고 이들을 식민 사회로 통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프레시디오는 처음에는 스페인인의 통행과 정착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이후 북부 지역의 정복과 식민화가 본격화됨에 따라 이에 반대하는 원주민들의 저항과 공격이 격화되자,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고 지역의 안정화를 확고히 하기 위한 제도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2. 프레시디오의 병력과 건축의 특징

살펴본 바와 같이 프레시디오는 국경 지역의 정착민과 도로 통행을 보호하기 위해 16세기 중반 주요 도로를 따라 설치되었다. 초기에는 지역의 광산업자, 목축업자, 상인, 농장주 등 이해 당사자의 자금으로 건설되고 유지되었으나 이후에는 왕실 재정으로 운영되었다(García 2017). 그러나 운영 경비가 부족하여 인근에서 목축과 농업활동을 통해 부수적인 수입을 얻는 프레시디오도 많았다.

프레시디오의 병력 규모는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 초기에는 6명을 최소 단위로 조직되었고 나중에는 20~50명의 군인이 주둔하였다. 그러나 규모가 커져서 18세기 말 산타페 프레시디오의 경우, 병력 수(가족과 하인 포함)가 2,000명이 넘기도 했다(Fernández 2022, 208).

프레시디오 주둔 부대의 병력은 주로 국경 지역 출신이 많았다.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청은 정규군 병력을 멕시코시티가 아닌 국경 방어에 할당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주로 국경 지역 출신을 주둔군으로 충원하였다. 장교와 일부 병사들은 백인이었지만, 병력의 대다수는 혼혈인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인근 지역 출신이었다. 이는 국경 방어가 지역 사회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Christiansen 1969, 32).

병사들의 무기나 무장은 왕실 재정의 한계 때문에 열악한 경우가 많았다. 무기는 대부분 노후화되어 있었고, 무기의 수급과 유지 보수는 원활하지 않았다. 가죽 갑옷과 방패6)는 낡아서 방어 기능이 거의 상실된 상태였다. 보급품은 멕시코 중심부로부터의 긴 운송 거리로 인해 지연되기 일쑤였다(Christiansen 1969, 36).

<그림 1>

1770~1780 프레시디오 분포출처: Luis(2006)에서 재편집.

프레시디오는 군사 전략상 중요한 지역에 분포하였다. 원주민 공격과 봉기에 대응하기 위해 세워지고, 이동하고, 때로는 폐쇄되기도 했기 때문에 프레시디오의 설립과 위치는 원주민과의 전선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Gómez 2019, 150). 따라서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에서 프레시디오의 설립과 분포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16세기 중반 본격적으로 도입된 프레시디오는 북부 지역에 대한 식민 지배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숫자가 증가하였고, 아래 지도에서처럼 18세기 후반에는 일종의 국경 방어망을 형성하며 북부 지역에 약 40여 개가 존재하였다.

프레시디오는 주로 사방 경계에 유리한 높은 지대에 세워졌고 식수뿐만 아니라 가축 사육을 위해 반드시 강이나 샘과 같은 수원과 인접한 곳에 입지하였다. 우물을 파거나 빗물을 모으기 위한 저수 시설을 설치하기도 했다. 주변에 농경과 목축에 적합한 토지가 있는 곳이 선호되었다(Arnal 2009, 110).

프레시디오의 설계는 대부분 유사했다. 기본적으로 성채의 형태로 설계되었는데 초기에는 사각형 둘레에 성벽을 두른 작은 성의 형태로 건축되었고 두 개에서 네 개의 모서리에 원형의 감시탑이 배치되었다. 성벽은 땅에 통나무를 고정시킨 울타리 형태로 세워졌으나 이후에는 돌을 사용하여 건축했고, 때로는 근처에 남아있던 원주민 건축물의 벽을 재활용하기도 했다. 지붕은 목재로 틀을 세우고, 그 위에 판을 덮고, 진흙 또는 석회로 마감을 했다(Carrillo 2017, 106; Arnal 2009, 109).

초기의 프레시디오는 일종의 흙벽돌인 아도베(adobe)7)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거의 남아있지 않고 이후 세워진 프레시디오는 석조 기둥을 사용하여 구조적 강도가 강화되었다. 프레시디오가 군사 건축물인 만큼 장식적 요소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Carrillo 2017, 104, 106; Noriega 2022, 188-190).

프레시디오의 크기는 3,600m2(60m x 60m)부터 122,500m2(350m x 350m)까지 다양했지만 평균적으로 10,000m2 정도였다. 화살이나 총알의 충격을 견딜 수 있도록 벽의 두께는 최소한 1미터가 되었고 높이는 3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벽에는 총을 쏠 수 있는 총안이 설치되었고 사방을 경계하기 위해 망루를 세웠다(Carrillo 2017, 104).

프레시디오는 군사적 목적과 일상 생활을 위한 여러 시설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수장8)의 주택, 병사 숙소, 예배당, 탑, 축사, 창고, 무기고 등이 있었다. 예배당은 병사들이 신앙심을 통해 군인과 주민으로서 이상적인 자질을 갖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교회, 창고, 탑은 주로 프레시디오의 모서리에 만들었고 무기고는 외부 공격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프레시디오의 중앙에 배치하였고 축사는 대개 프레시디오 외곽이나 성벽에 붙여지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프레시디오의 내부나 외곽에 정착민이나 원주민의 거주지나 피난처가 추가되어 구조가 복잡해졌다(Carrillo 2017, 113; Arnal 2015, 223).

프레시디오에서 마구간과 축사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특히 말은 평상시뿐만 아니라 전시에 무기나 식량 등을 운반하기 위한 군사적으로 중요한 동물이었다. 또 적대적인 원주민들은 말은 주요 약탈 대상으로 삼았다. 이런 이유들로 말의 사육과 관리는 철저히 이루어졌다. 프레시디오에 배치된 병사의 수는 평균적으로 30~50명이었는데, 규정상 일인당 4~10마리의 말이 보급되도록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많게는 수백 마리의 말들을 관리하기 위한 큰 축사가 필요했다. 이 경우, 마구간은 프레시디오 외곽에 건설되었으며, 주변으로 돌담이나 벽을 세웠다. 양과 소도 중요한 가축이었다. 주로 식량 조달에 위한 것이었지만 원주민과의 물물교환을 통해 필요한 식료품을 얻는 용도로도 중요했다. 따라서 가축 사육은 필수적이었으며, 병사들이 이를 직접 담당하거나 원주민 노동력을 이용하기도 했다(Carrillo 2017, 115, 116).

프레시디오의 형태나 구조는 이후 필요에 맞게 변하였다. 주둔 병력이 늘어남에 따라 규모가 커졌고, 탑의 수가 최대 6개까지 늘어난 곳도 있었다. 초기에는 정사각형 형태가 주를 이루었으나 이후에는 직사각형, 팔각형, 다이아몬드형 등 다양한 형태로 건축되었다.

이처럼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의 프레시디오는 전략적 요충지에 건설된 사각형 또는 다각형의 성채로, 두꺼운 성벽과 감시탑,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병영, 예배당, 무기고, 축사 등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군사적 방어와 지역 사회의 보호를 고려하여 세워진 요새이자 방어 기지였다.


Ⅳ. 프레시디오와 식민화 정책

1. 프레시디오의 사회·경제적 역할

프레시디오는 기본적으로 군사 시설물이었지만 그중 일부는 주변의 정착민이나 미션을 지원하는 사회적 기능도 있었다. 예를 들어, 프레시디오의 대장간과 목공소는 말의 안장과 고삐, 무기, 수레바퀴 등을 제작하고 수리하는 군사적인 필요를 위한 시설이었지만 원주민과 정착민의 정착과 자립을 위한 생활 기구도 제작하였다(Carrillo 2017, 117).

프레시디오의 중앙 마당 또는 광장, 흔히 ‘파티오 데 아르마스(patio de armas)’로 불린 이 공간은 다양한 용도를 가진 일종의 다목적 시설이었다.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군사 훈련, 병력 점검, 군대 정렬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모임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가축을 모으는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또 이곳은 사회적·상업적 활동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어 식량 분배, 축제, 시장, 교육 및 오락 활동이 진행되었다. 이외에도 야외 미사, 공지 사항 전달, 그리고 공개 재판 등 중요한 행사들이 이곳에서 행해졌다(Arnal 2009, 109-110).

프레시디오에는 여행자를 위한 숙소 또는 휴식 공간이 있었다. 여행자들은 프레시디오뿐만 아니라 농장, 파라헤9), 여관 등에서 묵을 수 있었으나 프레시디오는 안전성면에서 가장 장점이 있었다. 또 왕실 파견 관리를 위한 전용 숙소가 있는 프레시디오도 있었다. 이런 시설은 카사 레알(Casa Real), 즉 일종의 세관으로도 사용되었다. 카사 레알은 각 프레시디오의 이름을 붙여서 그 지역을 관할하는 세관의 역할을 하였다(Carrillo 2017, 114).

프레시디오는 원주민의 통합과 자립을 위한 일종의 교육 센터이기도 했다. 원주민에게 파종, 재배, 수확 등의 농사법을 가르쳤고 바느질과 직조술을 교육하였다. 아도베와 목재로 집을 짓는 법, 요리법, 그리고 도자기 제작 기술을 가르쳤다. 또한, 개인위생에 대한 교육도 이루어졌다. 또 일부 프레시디오는 동력이나 수력을 이용한 제분소를 세워 밀가루와 원주민 주식인 마사(옥수수 반죽)를 만들었다(Carrillo 2017, 117).

프레시디오에는 작은 규모의 예배당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원주민을 대상으로 다양한 종교 활동이 이루어졌다. 예배당은 규정상 프레시디오 외부에 세워야 했는데 이는 인근 마을이나 미션의 원주민들이 스페인 군대와 가톨릭을 하나라고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Arnal 2009, 113).

18세기 프레시디오는 군사 기지일 뿐 아니라 자체가 정착촌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 지역에서 두드러졌는데, 군인 가족은 그 군인이 복무한 프레시디오 인근에 정착하는 규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지역이 안정화되면 제대하거나 부상 등으로 복무가 어려운 병사와 그 가족이 프레시디오 주변에 정착하며 자연스럽게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병사들은 군사적인 보호가 더 시급한 지역의 프레시디오로 재배치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프레시디오는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그 결과 국경선은 점차 북쪽으로 확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18세기 국경 방어선은 뉴멕시코 북부까지 확대되었다(Carrillo 2017, 106), 이런 점에서 프레시디오는 북부 지역의 식민화를 촉진하고 국경을 더 북쪽으로 견인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프레시디오는 북부 지역의 경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18세기 초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중상주의 정책은 식민지 인구의 증가하는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여기에 북부 지역의 경제 침제가 겹쳐져 생필품 밀수와 밀매가 만연하였다. 특히, 유럽산 제품의 밀수가 크게 성행하여 식민지 경제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당시 유럽 강대국들은 산업 발전을 촉진시켜 점점 더 많은 잉여 생산물을 새로운 시장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프레시디오에 대한 물자 공급은 만성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에, 수장과 장교들은 밀매에 가담하며 때로는 중개자로, 때로는 중개인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문제는 18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개입으로 더욱 심화되었고10) 이는 프레시디오의 주요 골칫거리로 자리 잡았다.

프레시디오 병사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공식적 권한은 수장에게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지역의 상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많은 경우 이를 통해 자신의 지위와 이익을 강화했다. 도로 운송의 위험성, 물자의 부족, 그리고 거리적 제약으로 인해 수장과 상인들은 담합하여 상품 가격을 임의로 책정하고 과도한 이익을 취하기도 했다. 지역에 평화가 정착되면 프레시디오는 그 지역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로 발전하였고 프레시디오 수장은 비공식적이지만 그 지역의 대 상인이 되기도 했다. 자신의 군사적 사명에 헌신한 수장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이들은 검보다 저울에 더 능숙한 인물이었다. 18세기 수장 직책은 돈으로도 구매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소노라의 프레시디오 수장 자리는 12,000~14,000페소에 거래되었으며 이렇게 투자한 금액을 회수하기 위해 수장은 유능한 상인이자 때로는 착취와 횡령을 서슴지 않은 인물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만을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 프레시디오 수장은 국경 지역을 시장 경제에 편입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Calvo 2000, 34). 역설적으로, 그는 군사 지휘관이면서 동시에 국경 경제의 개척자 역할을 한 셈이었다.

또 병사들도 지역경제를 구성하는 일원이었다. 프레시디오의 군인은 계약제로 복무하였는데 20년 장기계약을 맺기도 했다. 월급이 충분하지 않아서 여행자의 경호원으로 일하거나 프레시디오 주변 땅을 경작하여 잉여 농산물을 판매하여 추가 수입을 얻기도 했고 또 지역경제의 중요한 소비자이기도 했다(Cardelús 2008, 121).

이처럼 프레시디오는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 지역에서 개종과 정착을 지원하며, 지역 경제의 형성과 발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2. 프레시디오와 미션의 협력과 갈등

미션은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 국경지역 식민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제도였다. 이 지역에 대한 선교는 1500년대 후반 프란시스코 선교회가 개인 포교 활동으로 시작하였고 이후에는 미션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이 이루어졌다. 프란시스코회보다 늦었지만 예수회도 적극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선교를 전개하였다. 프란시스코회는 타라우마라(오늘날의 치와와)와 텍사스 지역의 원주민을 선교하여 식민 체제에 편입시켰고 17세기 예수회와 함께 치와와에서 200개 이상의 미션을 건설했다(Velásquez 2010, 244; Arnal 2006).

선교사들은 미션을 세우고 여러 방법으로 원주민에게 접근하였다. 선물을 통해, 또는 먼저 개종한 원주민을 통해, 또는 미션의 농작물과 가축들을 통해서 원주민들을 설득하였다. 원주민이 미션에 거주하면 가톨릭 교리와 일반 교육은 물론이고 농작법과 수공예 기술 등 직업 교육을 시켰다. 미션의 구조는 예배당을 중심으로 개종 원주민이 사는 집과 학교, 창고, 작업장이 있고 외부에는 축사와 경작지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미션이 세워지고 주변으로 식민자의 정착이 늘어나서 마을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미션의 중앙 정원은 마을의 광장이 되었다(Cardelús 2008, 25). 이처럼 미션은 원주민을 개종시키고 이들을 스페인 문화에 편입시키는 대리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며,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 지역의 식민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주체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에서 원주민 저항은 강력하고 지속적이었다. 특히 치치메카 원주민은 가장 큰 위협이었다. 호전적인 원주민이 수시로 출몰하여 미션과 정착촌은 항상 불안했다. 따라서 16세기 후반 선교회의 활동이 확대되면서 군대와 종교가 협력하는 식민화 전략이 추진되었다. 군인과 선교사가 함께 원주민 지역으로 들어갔고 미션과 프레시디오는 인근에 함께 세워져 미션-프레시디오의 협업 시스템은 북부 지역 식민화 정책의 기본 구조가 되었다(Moncada Maya 2016, 63).

이론상으로만 보면, 군대와 종교로 이루어진 이 식민화 ‘듀엣’은 원주민을 정복하고, 개종시켜, 스페인 문화로 동화시키기에 훌륭한 도구로 보였다. 17~18세기에 선교사들은 더 북쪽의 황야로 나아가 기독교의 복음을 전했으며, 개종한 원주민들은 미션에 모여 스페인화 교육을 받았다. 선교사들은 프레시디오의 보호를 받았으며, 군대는 원주민들을 위압하거나 필요할 경우 원주민들에게 교리를 강제로 교육할 힘을 제공했다. 병사들의 가족도 프레시디오로 이주했고, 상인들은 물품을 팔기 위해 찾아왔으며, 농부와 목축업자들은 주변 땅을 분배받아 정착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착지가 프레시디오와 미션 주변에 성장할 것으로 기대했고 점차 북부 국경 지역은 완전히 스페인 식민체제에 편입될 것으로 여겨졌다(Faulk 1969, 22).

그러나 이러한 예상이 항상 맞아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피마족, 오파타족, 파파고족, 푸에블로족 등 정착 원주민에게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치치메카 원주민뿐만 아니라 아파치나 코만치 등 비정착 원주민들은 미션 생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정착 원주민도 반란을 일으키거나 선교사들을 죽이고 미션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프레시디오와 미션 간에 대립이 생기기도 했다. 프레시디오 수장들은 빈번히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사익을 추구했으며, 수장 직책이 금전으로 거래되고 투자금 회수를 위해 부정행위가 저질러지는 일도 빈번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목격한 미션 선교사들은 프레시디오와 수장을 비난하며 양측 간에 마찰이 발생하기도 했다(Calvo 2000, 34). 18세기 바하 칼리포르니아 반도는 진주 생산의 중심지로, 진주는 지역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진주 채굴을 위해 미션과 프레시디오가 협력했으나, 예수회는 프레시디오에 진주 채굴권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는 프레시디오의 본래 군사적 임무와 목표에 상충된다는 이유에서였고, 이로 인해 양측 간에 갈등이 빚어졌다(García 2017).

이와 같이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에서는 스페인인과 미션을 보호하기 위해 프레시디오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따라 본국과 식민 당국은 미션과 프레시디오를 지리적으로 인접한 곳에 설립하여 상호 협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프레시디오와 미션의 협력 체계는 내부적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군사와 선교라는 역할을 바탕으로 상호 균형을 유지하면서 17~18세기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를 방어하고 식민화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정책 기구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다.


Ⅴ. 맺는 말

살펴본 바와 같이 누에바 에스파냐의 북부 지역은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가장 광대한 지역이고 중심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또 건조한 사막과 고원지대가 주를 이루는 가장 메마르고 거친 지역이었다. 더불어 북부 지역에는 치치메카족이나 아파치족 등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원주민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비정규전 전술에 능해 스페인 군대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처럼 이 지역은 가혹한 자연환경과 원주민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정복과 식민화가 매우 어려운 곳이었다.

또 호전적인 원주민의 공격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신흥 열강이 스페인 패권에 도전하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움직이는 국경(frontera móvil)’이었다(Cisneros 1998, 57). 따라서 본국 입장에서 이 지역에 효과적인 방어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고 이러한 필요에 따라 프레시디오가 설립되었다. 이처럼 프레시디오 형성과 발전은 이 지역의 생태적이고 지정학적 조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프레시디오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션과의 관계와 그 맥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실 미션과 프레시디오는 이교도 적을 개종시키고 그들의 공격을 차단하려는 스페인 레콩키스타의 역사적 기억과 인식에서 기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에바 에스파냐의 미션과 프레시디오는 16세기 치치메카 전쟁과 그 화평 과정을 거치면서 성립되고 발전한 독자적인 산물이었다. 두 제도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 지역의 식민화를 촉진하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미션은 빈번하게 원주민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선교사들이 희생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프레시디오는 군사력으로 선교사와 정착 원주민을 보호하는 방어 기지 역할을 하였고 미션은 점령된 지역에서 원주민들을 복음화하고 정착 생활 방식을 가르치는 데 주력할 수 있었다.

이처럼 프레시디오와 미션이 상호 협력 관계를 유지했지만 갈등과 마찰이 발생하기도 했다. 프레시디오의 수장이 사익을 추구하거나 직책 거래 등 부정행위를 저지르면서 마찰이 빚어졌으며, 바하 칼리포르니아에서는 진주 채굴권을 두고 서로 대립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시디오는 군사적 방어의 역할을, 미션은 종교적·교육적 역할을 담당하며 국경 지역에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따라서 프레시디오는 북부 지역의 환경·문화적 조건과 미션과의 상호 관계라는 두 가지 맥락을 종합적으로 고려함으로써 보다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프레시디오가 국경 방어 체계로서 수행한 성과를 평가하는 것도 그 의의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실제로 프레시디오는 군사 기구로서 여러 제약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군수품의 보급은 부족하였고, 본국과 식민 당국의 지원은 충분하지 않았다. 병사들의 장비와 훈련은 열악하고 군기와 사기는 높지 않았다. 또한 이 지역 원주민의 저항은 완고하였고 유럽 열강의 도전은 지속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시디오는 임시 군사 거점으로 시작하여 국경 지역을 방어하고 국경을 확장하는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프레시디오가 거둔 군사적 성과는 오히려 놀라운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프레시디오는 열악한 상황과 조건 그리고 군사적인 한계 속에서도 국경 방어와 식민지 확장의 핵심 기구로 기능하며, 미션과 협력하여 정착지 형성과 식민 체제 성립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프레시디오는 단순한 방어 시설을 넘어, 스페인의 식민 정책을 수행하는 전략적 도구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8S1A6A3A02081030).

Notes

1) 프레시디오는 그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성격 때문에 우리말로 온전히 옮기기 어렵다. 가장 근접한 번역은 ‘군사 요새’이지만, 이 역시 개념의 전체를 포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프레시디오’라는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며, 그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향후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2) 누에바 에스파냐의 북부는 초기에는 ‘치치메카 영토’로 알려진 오늘날의 멕시코 북부 지역을 의미했고 이후 정복이 확대되면서 멕시코-미국 국경 지역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17세기에는 북부의 범위가 현재의 미국 남서부까지 확장되었으며, 18세기 후반에는 루이지애나를 합병하면서 최대 영토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가장 먼 지역인 뉴멕시코는 ‘극북(Far North)’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연구도 이러한 지리적 범위를 기준으로 북부를 정의하고자 한다.
3) 셉텐트리온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사용되던 지리적 용어로 북쪽 또는 북쪽 지역을 의미한다. 어원은 라틴어 septentriones인데, 이는 북쪽 방향을 알려주는 큰곰자리(북두칠성)의 일곱 개 별을 의미한다(Septentrión, Online Etymology Dictionary).
4) 현재 멕시코의 두랑고, 코아우일라, 할리스코, 사카테카스, 산루이스포토시, 과나후아토, 케레타로 주에 해당함.
5) 세뇨리오(señorio)는 부족영지 또는 작은 국가나 정치체로, 다양한 수준의 자치권을 보유했다. 약 500개 이상의 세뇨리오가 있었고, 이 중 틀락스칼라처럼 독립적인 세뇨리오도 있었지만 다수는 메시카의 삼각동맹에 공물을 바치며 예속되어 있었다(Escalante 2004, 63).
6) 원주민들과의 전투에 효과적인 두꺼운 가죽(cuera) 갑옷을 착용하여 프레시디오의 군인은 ‘가죽 병사(soldados de cuera)’라고 불렸다.
7)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에서 가장 일반적인 건축자재는 흙이었다. 흙은 구하기 쉽고 다루기 편리하여 건물을 신속하게 지을 수 있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건축 자재였다. 그러나 강도와 내구성이 낮다는 단점을 가졌다.
8) 프레시디오의 장인 카피탄(capitán)은 수장, 대장, 지휘관, 사령관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 연구는 카피탄이 군사 지도자뿐만 아니라 지역의 행정 책임자의 성격도 있기 때문에 포괄적인 의미인 ‘수장’으로 옮기고자 한다.
9) 파라헤(paraje)는 스페인어로 ‘장소’ 또는 ‘임시 숙영지’를 의미하는데 ‘카미노 레알 데 티에라 아덴트로’(Camino Real de Tierra Adentro, 현재의 멕시코시티와 뉴멕시코 주 산타페를 연결하는 식민 시대의 중요 교역로)에 설치된 일종의 여행자 쉼터였다. 10~15마일 간격으로, 물의 공급이 가능하고. 가축들에게 먹일 사료를 구할 수 있는 곳에 파라헤를 두었다(Lim 2023, 313).
10) 18세기 초에는 프랑스의 불법 교역이 아메리카 식민지 경제의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18세기 말에는 영국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 지역에서 상업적 갈등과 경쟁에 돌입했고 이로 인해 생필품 밀매가 프레시디오에서도 성행하였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는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원주민들과의 교역도 지속적으로 확대했다(García 2017).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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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ine Etymology Dic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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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1780 프레시디오 분포출처: Luis(2006)에서 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