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에서의 포르투갈 유대인과 종교재판
초록
16세기 포르투갈의 유대인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그들은 스페인 출신 유대인보다 이주 숫자에서 더 많았고, 상업 등을 포함한 다양한 경제 활동을 통하여 식민지 경제에 보다 더 기여하였다. 그리고 스페인 유대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재판에 희생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유대인 역사에서 포르투갈 유대인의 이런 중요성은 소홀히 다루어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본 논문은 이런 인식하에서 식민시기의 포르투갈 유대인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족적을 살핀다. 우선,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추방과 아메리카에의 이주 과정 및 브라질 정착, 유대인 사회의 형성과 사라짐, 네덜란드의 종교관용 정책에 따른 그들의 종교 활동, 그리고 상인, 노예무역, 금융업자로서 그들이 스페인 식민지에서 이룩한 경제 활동을 서술한다. 그리고 종교재판소의 포르투갈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당시의 이데올로기 및 정치, 종교적 맥락을 밝힌다. 본 연구는 포르투갈 유대인에 대한 종교재판은 종교적 이유보다는 식민당국이나 종교재판소의 경제적 동기에 기인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Abstract
In 16th century, the Portuguese Jews have migrated en masse to America in order to escape religious persecution. They were more in number than the Spanish-Jews, they further contributed to the colonial economy through a variety of economic activities, including commerce and trading, and they were sacrificed in Inquisition more than the Spanish-Jews. However, the presence of the Portuguese Jews in the Jewish immigration history of Latin America, indeed, has not been to much studied or was not dealt with in depth. In this respect, this paper reviews their traces during the colonial period, focusing on the Portuguese-Jews. First of all, this study explicates the expulsion from Iberian Peninsula and the migration process to America, the settlement in Brazil, the formation of Jewish community and that settled in Brazil and their religious activities in accordance with the tolerance policy by Netherlands and their economic activity which they achieved in the spanish colonies as merchants, slave trader and financiers. And this paper elucidates the persecution of the Jews by Inquisition, the ideology and the religious and political context at that time. Finally, this study reaches a conclusion that Inquisition against Portuguese Jews is due to the economic motives of the colonial authorities and the Inquisition, rather than religious reasons.
Keywords:
New World, Jewish Diaspora, Portuguese Jews, Inquisition, Cristianos Nuevos키워드:
신세계, 유대인 디아스포라, 포르투갈 유대인, 종교재판, 신기독교인Ⅰ. 서론
중남미의 유대인 디아스라나 이주 역사에 대한 국외학자들의 연구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는 중남미 거의 모든 나라에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고 또 유대인 또는 유대계 후손들이 지닌 경제적 힘과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그들이 발휘하는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 자연스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유대인 연구의 대다수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라틴아메리카가 독립한 후 유대인들이 대거 유입되는 19세기 이후를 주로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러시아 차르 제국의 탄압을 피해서 또는 나치 독일의 박해로부터 도망친 동유럽의 유대인(Askenashi)1) 들이 형성한 유대인 사회의 연구가 주류를 이룬다. 반면, 16세기 아메리카가 발견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유입된 유대인, 즉 독립 이전의 식민시기의 ‘세파르디’(Sephardi)2) 유대인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이는 관련 연구학자들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 시기 유대인에 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빈곤하다는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 시기의 유대인 연구를 어렵게 하는 자료의 부족 현상은 우선, 많은 유대인들이 종교재판의 박해를 피해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결혼을 통해 현지사회에 동화되면서 그들의 유대인 정체성이 사라진 데에 있고, 또 생존을 위해 자신들의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에서 식민시기의 유대인의 삶이나 사회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종교재판소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 기록도 많이 분실되고 종교재판소의 자의적인 왜곡으로 한계는 있지만 식민시기 중남미 유대인 연구에 관한한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놀랬던 것은 우선, ‘세파르디’의 또 다른 축인 포르투갈 유대인들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역할과 비중이 상당했으며, 한편으로는 이런 그들의 위상에 비해 관련 연구가 의외로 적거나 심도 있는 연구물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포르투갈 유대인의 아메리카 이주 숫자는 스페인 출신의 유대인보다 훨씬 많았고, 또 이들의 거주 반경은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브라질을 비롯하여 페루, 아르헨티나, 멕시코 및 카리브 제도 등 방대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여기서 포르투갈 유대인을 규정할 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경제 행위나 상업 활동이 스페인 유대인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선, 보다 강력했고 역동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식민시기 내내 종교재판의 최대 희생자는 바로 이 포르투갈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본 연구는 방금 언급한 포르투갈 유대인이 스페인 식민지에 기여한 역할에 비해 그들이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런 점에서 본 연구의 핵심은 그동안 아메리카 대륙의 유대인 이주 역사에서 간과된 포르투갈 유대인들을 전면으로 다루고 이를 통해 그들의 삶과 역사를 재조명하는데 있다. 본 논문은 그 성격상 어떤 논점을 제시하거나 논쟁적 질문을 던지지는 않지만 동 주제에 대한 국내외의 일천한 연구에 비추어 선도 연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선, 포르투갈 출신의 유대인의 추방 배경과 아메리카 이주 및 정착 과정을 살핀다. 특히 유대인 공동체의 형성과 해체는 네덜란드의 브라질 지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보다 치중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포르투갈 유대인들의 스페인 식민지 내에서 상업 활동을 스페인 왕실 및 상인과의 관계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종교재판소의 기능과 목적을 설명하면서 당시 식민지 사회와 포르투갈 유대인간의 정치, 종교적 맥락을 역사적 시각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특히 포르투갈 유대인에 대한 종교재판소의 탄압은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경제적 동기에서 기인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본 논문에서 보다 중점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Ⅱ. 포르투갈의 유대인과 신세계
1. 유대인 추방의 배경과 역사적 전개
스페인에서 반유대주의는 이전에도 횡행하였지만 그것이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스페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고서부터이다. 당시 반유대주의와 태동과 함께 인종의 순수성과 가톨릭 정교신앙에 입각한 척도가 스페인의 기본적 신념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의 추방은 푸엔테스가 언급한 것처럼 사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푸엔테스 1997, 255). 가톨릭 정통신앙과 피의 순수성을 기반으로 통일을 주도한 가톨릭 양왕은 유대인을 추방하거나, 탄압, 감시하기 위해서 그리고 스페인에 숨어사는 유대교도 또는 이단자와 기독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유대교로 돌아섰으리라 의심되는 유대인을 단죄하기 위해서 여러 법령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위해서 그동안 교황이나 주교에만 의지했던 종교재판소의 기능을 스페인 국왕에 복속시켜 강력한 재판기관으로 탈바꿈시킨다. 이제 종교재판소는 단지 유대인뿐만 아니라 개종자에게까지 탄압 대상을 확대하면서 점점 더 비대한 힘을 갖게 되었다(푸엔테스 1997).
1492년 3월 1일, 스페인의 가톨릭 양왕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유대인들은 4개월 이내에 기독교로 개종하든가 스페인을 떠나야만 했다. 이 칙령을 통해서, 스페인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강제적인 이민을 택했다. 그들은 스페인 북부의 나바로 왕국, 포르투갈, 프랑스,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및 터키로 흩어졌다(Pedrique 2012, 203).
포르투갈로 이주한 스페인 ‘세파르디’는 유대인 추방령이 곧 철회되고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스페인에 살던 집과 그들의 직업을 그대로 놔둔 채 여전히 유대 신앙을 지키고 있었다. 모세 율법의 절대적 신봉자였던 이들은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었지만 비밀리에 그들의 신앙을 지키고 있었다(Laikin Elkin 2014).
한편, 포르투갈에서는 스페인과는 달리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없었다. 포르투갈에 유대인 박해가 일어난 것은 스페인 왕실과 포르투갈 왕실의 인적 결합의 부수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1496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왕은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의 딸인 이사벨 공주와 결혼하면서 스페인 왕실의 결혼 조건을 받아들여 포르투갈의 유대인 추방을 감행하였다. 그는 유대인에게 9개월의 유예 기간을 주면서 포르투갈에서 떠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입장을 번복하여 유대인의 도피를 금지시키고 대신 그들을 강제적으로 개종시킨다. 이에 따라 유대인들은 가톨릭 교회에 나가 강제적으로 세례를 받고 개종하였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기독교도임을 천명하면서 미사에도 참가했지만 비밀리에 그들의 신앙을 고수하게 된다. 한편, 마누엘 국왕의 뒤를 이은 주앙 2세는 스페인보다는 한참 뒤인 1536년 종교재판소를 세운다(Vainfas 2006, 12).3)
발견의 시대, 개종한 유대인, 즉 ‘콘베르소’(conversos)는 신대륙에 가 그곳에서 새롭게 정주코자 했지만 스페인 왕실은 유대인의 이주를 금지시킨다.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왕실은 정복 초기부터 아메리카에서 순혈주의 정책을 취했다. 1501년 이사벨 여왕은 오반도(Nicolas de Ovando) 이스파뇰라 총독에게 유대인이나 무어인, 이단자, ‘신기독교인’(cristianos nuevos), 종교재판에 회부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자식, 손자 등 후손들이 신대륙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교시를 내렸고,4) 카를로스 5세 역시 1522년 “최근에 개종한 유대인들”을 아메리카에서 색출하라는 칙령을 공포했다. 이런 일련의 금지령은 뒤에 인디아스법(Ley de Indias)에 삽입되는데, 이 법에는 약 3세기에 걸쳐 유대인 후손과 ‘신기독교인’의 정착을 반대하는 스페인 왕실의 적대감이 잘 드러나 있다.5)
신세계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거기에 거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범법행위를 한 불법 이민자들이었고, 잡히면 스페인 왕실이나 종교재판소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 유대인에 대해 자행된 가혹한 처벌을 두려워 한 수많은 개종자, 그리고 ‘의심스런 유대인’(crypto-judíos)은 신세계로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신세계에서 유대인이 자신의 신분이나 정체성을 숨겨야만 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은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고 어떠한 문서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그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종교재판소의 기록을 통해서이다.
한편, 포르투갈은 해양 탐험에서 스페인과 경쟁하고 있었고. 이미 아프리카를 통해 인도양 항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그리고 토르데시아스 조약(Tratado de Tordesillas)을 통해서 포르투갈인들은 신세계를 탐험할 수 있었다. 브라질이 발견되면서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스페인 유대인과는 달리 신대륙에 자유롭게 갈 수 있었다(Hidalgo 2011). 이런 배경에서 16세기 중반, 브라질이 건설될 때 최초로 그곳에 건너간 포르투갈인들의 다수는 개종한 유대인들이었다.
포르투갈의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스페인 식민지로 흘러 들어갔던 시기는 1580년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병합했던 시기로서 이 이주는 포르투갈이 스페인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난 1640년까지 이어진다. 반면에, 아메리카에 거주했던 스페인 유대인의 후손들은 이 시기에 이르면 거의 대부분이 스페인 식민지 사회에 동화되어 사라지고 만다. 이런 점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유대인은 처음부터 추방, 종교 개종, 아메리카의 이주 등에서 많은 차이점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스페인 왕실이 유대인의 아메리카 이주를 지속적으로 금지시켰다면 그에 비해 포르투갈의 정책은 보다 유연했다고 할 수 있다. 라이킨 엘킨(Laikin Elkin)은 그 이유를 당시 포르투갈은 새로운 식민지인 브라질을 경영하는데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이민을 금지하기보다는 이들을 식민지 경영에 투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2014, 11). 당시 포르투갈의 총인구가 백만여명에 지나지 않았음을 생각해 보면 포르투갈의 이런 정책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6) 한편,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한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민을 두고 금지와 허용을 반복한 것이었다. 포르투갈 역시 ‘신기독교인’의 브라질 이민과 관련하여 여러 번에 걸쳐 법을 바꾸었는데 이는 포르투갈 거주 유대인들부터 막대한 이민 허가 수입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였다(Metz 1992).
2. 신세계에서의 포르투갈 유대인
1580년, 후안 데 가라이(Juan de Garay)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두 번째로 건설된 시기, “신앙이 의심되는”(sospechosos de fe)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에 대거 정주했고, 또 일부는 리오 델라 플라타로 들어갔다.7) 16세기에 많은 포르투갈 유대인들이 리오 델라 플라타에 들어온 것은 브라질의 포르투갈 식민당국이나 교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현지의 스페인 여자들과 결혼하여 스페인인들과 이웃을 맺었고, 곧 상업과 농장 경영에 수완을 발휘하여 사회의 상층부로 진입한다. 스페인인들과 포르투갈 유대인간에 충돌도 있었지만 1세기 후, 포르투갈 유대인의 후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현지의 “주요 인사”(gente principal)들로 바뀐다.
이렇게 리오 델라 플라타에 포르투갈 유대인이 넘치면서 “포르투갈인”은 현지에서 “유대인”을 의미하게 되었다(Laikin Elkin 2014, 11). 사실, 포르투갈 유대인들이 리오 델라 플라타로 대거 유입하게 된 이유로 우리들은 이 지역이 16, 17세기 스페인 왕실의 입장에서 볼 때 경제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이 지역은 스페인 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종교재판소의 영향력이 다른 스페인 식민지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다.
이단심문이 아메리카에서 막 시작될 무렵, 브라질로 건너간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점으로 아프리카 노예들을 수입했고 포토시의 은을 수출하였는데 이들의 이런 상업 활동은 대부분 불법이었다. 17세기, 리오 델라 플라타의 밀수업자들 대부분은 유대인 또는 ‘콘베르소’였고 그들은 유대교를 여전히 신봉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유대인 상인들의 공격적인 상업 활동과 교역은 식민당국이나 경쟁자인 스페인 상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는데 이는 뒤에 종교적 박해의 구실로 작용하게 된다.8) 1606년 리오 델라 플라타 주지사는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는데 이는 바로 스페인 식민당국이 포르투갈 유대인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17세기에 포르투갈 유대인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구의 4분의 1을 점하고 있었고, 그곳의 경제는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Pedrique 2012, 206).
한편, 포르투갈의 유대인은 리오 델라 플라타를 통해 페루 부왕령에 속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다. 특히 이들은 포토시를 비롯하여 은광 산업이 번성했던 중앙 내륙 지방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해서 16세기 중반부터 리마와 그 주변 지역에 “신앙이 의심스러운”(sospechosos de fe) 포르투갈인들이 정주하기 시작한다. 이제 페루 부왕령은 브라질에서 들어온 ‘신기독교인’들로 가득하게 되었고(Núñez Sánchez 2004, 10), 리오 델라 플라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포르투갈인”은 “개종한 유대인”과 동일시된다. 물론, 페루의 포르투갈 유대인들 역시 활발한 경제 활동을 하면서 스페인 독점 상인들과 경쟁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브라질에 최초로 온 포르투갈 유대인은 가스파르 다가마(Gaspar Da Gama9)로 알려져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그는 식민자나 이민자가 아니라 1500년, 카브라우(Alvarez Cabral)의 브라질 원정대에 동행했을 뿐이다. 1502년, ‘신기독교인’인 노로냐(Fernando de Noronha)의 브라질 탐험대에도 일단의 포르투갈 유대인들이 합류하였다.10)
신대륙에 포르투갈 유대인이 최초로 도착한 곳은 브라질이었다. 당시 포르투갈 왕실은 산타크루스(Santa Cruz, 브라질의 옛 식민지 이름)에 유대인이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1534년에 코에유(Duarte de Coelho)는 최초로 식민자들을 데리고 브라질에 갔는데 그들 중에는 다수의 유대인들과 ‘콘베르소’가 있었다. 이들은 마데이라 제도에서 가지고 온 사탕수수 및 만디오카를 재배하였고(Pedrique 2012, 206), 면화, 담배, 쌀과 같은 농작물도 경작하였다.11) 1624년경에는 약 5만명의 유대인, ‘신기독교인’ 이 브라질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들 대부분은 설탕공장을 소유했고, 상업에 종사했으며, 교육 및 저술 활동 외에 심지어 가톨릭 사제로도 종사하였다. 이들은 뒤에 무역, 금융을 독점하는데, 그들이 누린 특권으로 인해 브라질은 신세계에서 유대인 공동체의 심장부(Madre Patria)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적어도 한 시기, 그들은 브라질에서 스페인 유대인보다는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영위할 수 있었다. 브라질에서 이단심문 제도는 스페인 식민지보다는 거의 한 세기 뒤에 도입되는데 그것이 지체된 이유는 뒤에서 보겠지만 네덜란드의 브라질 지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Ⅲ. 포르투갈 유대인 디아스포라: 네덜란드와 브라질
1. 네덜란드 지배하의 유대인 사회
1581년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후, 유대인들에게도 종교적, 정치적 관용의 시기가 열린다. 16세기 말, 암스테르담은 유대인 종교,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물리치고 브라질에 진출하면서 유대인 사회에도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Metz 1992, 217).
아메리카 대륙의 유대인 이주 역사에서 유대인들이 최초로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을 드러내놓고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중반, 비(非)이베리아 세력인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점령하고부터이다. 네덜란드가 서인도회사(West Indies Company)를 앞세워 브라질의 북동부 해안가를 침략했을 때 네덜란드 거주 유대인들은 공격 작전의 참모로서, 그리고 군인으로서 원정대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 공격이 실패하면서 네덜란드는 잠시 후퇴했다가,12) 1625년 재차 브라질을 침략하여 페르남부쿠(Pernambuco), 올린다(Olinda) 및 레시페(Recife)를 점거하면서 약 30여년에 걸쳐 브라질을 지배하게 된다. 이때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 집단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구세계를 떠나 브라질로 건너가 그곳에 정주하였다. 그들은 페르남부쿠, 레시페에서 농업과 상업 및 금융에 종사하였고(Pedrique 2012, 207), 한때 이 두 도시는 유대인들로 인해 번영을 구가하였다.13)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점령 지역에 개신교회를 세웠고 유대인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쳤다. 이런 정세 변화로 브라질의 ‘의심스런 유대인’은 페르남부쿠나 레시페로 속속 이동,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자유롭게 유대교로 회귀하였고, 다수의 ‘신기독교인’들 역시 똑같이 유대교로 전환하였다.14)
당시 뉴네덜란드(New Netherland)는 유대인들에게는 매력적인 곳으로 바뀌어 유대인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1642년 랍비였던 이삭 아보압(Issac Aboab)15)이 이끄는 200여명의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이곳에 들어온 것은 그 중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네덜란드 식민당국의 허가를 받아 레시페에 유대인 회당을 세웠고, 이를 시작으로 마우리시아(Mauricia), 파라이바(Paraiba)에도 유대인 회당이 세워지게 된다.
1642년, 네덜란드 지배의 브라질에서 처음으로 인구조사가 행해졌는데 전체인구는 12,703명이었다. 이들 중 2,899명은 자유 백인시민으로서 그 절반 이상은 유대인이었다(Laikin Elkin 2014, 15). 이 지역에서 유대인들은 교역이나 상업 분야에서 막강한 경쟁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네덜란드 지배하의 브라질에서는 설탕산업은 여전히 번성하고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및 설탕공장을 경영하고 있었고 노예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1618년에서 1619년, 포르투갈 종교재판관들의 브라질 방문 기록을 보면 브라질 ‘콘베르소’의 다수는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사회와 지속적으로 접촉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세계무역의 중심지였고 네덜란드의 상대적 관용으로 인해 포르투갈 및 스페인 출신 유대인들은 네덜란드로 많이 이주하였다(Laikin Elkin 2014, 12). 한편, 일부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와 브라질 양쪽에 가족이나 친척을 두고 있었는데 이것은 네덜란드와 브라질 간의 교역을 증진시키는 이점으로 작용하였고 브라질 거주 ‘확신 유대인’이 정통 유대교의 본질을 유지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17세기 중반, 브라질의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그들이 이룩한 부를 통해 브라질 사회의 상층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들은 포르투갈 정부의 “피의 순수” 정책에 따라 일체의 공직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식민정부 및 공공기관의 관리로 등용되기도 했다.16) 당시 브라질 사회에는 부와 권력을 갖추면 누구라도 일종의 귀족 계급인 ‘영주’(fidalgo)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유대인의 경우, 그것이 법적으로는 허용되지는 않았지만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구기독교인’(cristianos viejos)과의 결혼을 통해 그들의 신분을 상승시켰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 및 경제적 조건에 맞추어 적절한 생존 전략을 취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점은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상업이나 금융업으로 성공하여 브라질 식민사회의 상층부에 속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17세기 바이아에 거주했던 ‘신기독교인’ 중 12%는 제화공, 이발사, 음악가, 제빵업자, 선원을 포함해 하층 계급에 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러 다양한 인종이나 신분, 계급의 사람들과 결혼을 하면서 브라질 식민사회의 역사에서 지워지고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이 시기 브라질의 종교재판에 연루된 사람들은 유대인 전체 노동인구 중 36%를 차지했던 상인이거나 아니면 ‘이동상인’(commercial travelers)이었다. 특히 후자는 브라질, 포르투갈, 네덜란드 및 당시 국제 설탕무역의 또 다른 중심지였던 함부르크를 여행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이동상인’이라는 직업을 이용하여 외국에 거주하거나 도망을 칠 수도 있었고 이를 통해 이단심문을 피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이전에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던 일부 유대인들은 도망 대신 브라질로 귀환하는데 이는 자신들이 이룩한 부를 지키려는 욕구가 더 절실했기 때문이었다(Metz 1992).
이런 점에서 볼 때, 포르투갈 유대인들이 이단심문의 위협 속에서도 브라질에 계속 머물었던 것은 그들의 자발적인 결정에서 나온 것이고, 또 이들이 유대교와 가톨릭, 두 종교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한 것은 강제가 아닌 그들의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Laikin Elkin 2014, 12).
2. 유대인 공동체의 형성과 해체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종교 관용정책에 따라 브라질 북동부를 중심으로 거주했던 유대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브라질의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의 이런 관용정책에 부응하여 식민당국에 협력했는데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군대에 입대한 것은 그 중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반 나소(Johan Maurits van Nassau) 브라질 주지사 통치 시절, 다수의 유대인들은 네덜란드 군대에서 복무했고 네덜란드의 4개 군대 중 하나는 순전히 유대인으로만 구성되었다. 한편, 칼뱅주의자 설교사였던 이 지사는 유대인과 가톨릭 교도들을 개신교로 개종시키려고 했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1636년, 바이아를 필두로 파라이바 등 유대인 거주 지역에 유대인 회당이 세워졌고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Pedrique 2012).
유대인 공동체는 네덜란드의 유대인 공동체와 유사하게 잘 조직되어 있었다. 이 공동체 안에는 일반 학교, 그리고 탈무드나 토라를 가르치는 전통 교육기관인 ‘야시바’(yashiva), 유대인들만의 묘지, 자선기금 모금함인 ‘세다카’(sedaca)17)가 있었다. 이 공동체 조직의 최상부에 있는 이사회가 유대인 공동체에 속한 모든 유대인들의 삶을 통괄했다. 유대인들은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이 공동체가 요구하는 규칙이나 규정을 준수해야만 했고 세금도 의무적으로 내야만 했다.
레시페의 유대인 집단 역시 그들의 공동체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유대인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히브리어 교사와 낭송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정통 유대교를 가르치고 전수할 랍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앞서 언급한 이삭 아보압과 라파엘 다길라르(Moses Raphael d'Aguilar) 두 지도자가 1642년 레시페에 오게 된다. 이때 주르 이스라엘(Zur Israel) 회당, 마겐 아브라함(Magen Abraham) 회당이 각각 레시페와 마우리시아에 세워진다.
이렇게 네덜란드의 유대인에 대한 관대한 정책으로 브라질의 유대인들은 스페인 식민지의 그 어느 유대인 공동체보다도 더 정통 유대교 신앙을 잘 계승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점은 네덜란드 식민당국이 처음부터 유대인에 대해 종교적 관용을 베푼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이곳에 들어온 칼뱅주의자 네덜란드 선교사들이 네덜란드의 유대인에 대한 관용 정책에 반대했고 유대인 회당을 폐쇄해 줄 것을 식민당국에 지속적으로 요구한데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역대 네덜란드 주지사나 식민당국은 최대한의 교역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 유대인의 탁월한 상업적 능력과 경제력을 이용했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종교적 권리를 허용하게 된다(Metz 1992).
브라질 유대인 공동체의 번성이 네덜란드의 비호 아래 이루어졌다면 그 해체 역시 네덜란드의 행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30여년간 이어진 네덜란드의 브라질 지배가 끝나면서 유대인들의 운명은 다시 바뀌기 시작한다. 1654년, 네덜란드가 포르투갈과의 전쟁에서 패했고 유대인들도 네덜란드인과 함께 브라질을 떠나야만 했다. 이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카리브 지역,18) 베네수엘라의 쿠라사우19) 및 기타 지역으로 흩어졌다. 1654년 이들 중 일부가 브라질을 떠나 뉴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북미 최초의 유대인 공동체를 세운다.
3. 브라질 유대인과 이단 심문
브라질의 ‘신기독교인’ 중 일부는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지만 그들 대부분은 여전히 유대인 의식이나 전통을 비밀스럽게 고수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가톨릭 교도들에 의해서 경멸적으로 불렸던 ‘마라노스’(marranos)로서 ‘의심스런 유대인’이었다. 브라질의 경우,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되면서 누에바에스파냐나 페루와는 달리 종교재판소는 공식적으로 설립되지 않았다. 다만, 바이아의 주교가 포르투갈 왕실로부터 이단심문 권한을 부여받아 이교도에 대한 종교재판을 진행하였고 1591년 이후에는 포르투갈의 종교재판관들이 주기적으로 브라질을 방문, 종교재판을 대행하였다.20) 당시 ‘고발’(denunciación)이라는 수단은 종교재판의 청문회를 열 수 있는 근거였고, 고발당한 사람들은 체포되어 이단심문을 받기 위해 포르투갈로 호송되었다(Metz 1992, 217).
포르투갈이 네덜란드가 점령한 도시들을 탈환하면서 반유대주의 정서에 기반을 둔 종교재판이 새롭게 전개되었다. 네덜란드가 브라질에서 물러나자 유대인들은 배신자, 또는 이교도로 몰려 교수형에 처해졌고 살아남은 수백명의 유대인들, 다시 말해서 기독교 개종자였다가 다시 유대교로 돌아선 사람들은 리스본으로 송환되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Laikin Elkin 2014).21)
1650년과 1700년 사이, 25여명의 유대인들이 포르투갈로 송환되어 재판을 받았고 18세기 초에는 수백명의 브라질 거주 ‘신기독교인’들이 이단심문을 받았다. 1769년에는 18명이 교수형으로 처형되었고 한 사람은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 하나를 지적하자면 종교재판의 결과로 포르투갈 유대인 상인들이 사라지면서 브라질 식민지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유대인이 경영했던 설탕산업은 일시적으로 가동을 멈추었고 브라질과 포르투갈간의 무역은 중지되었다.
1773년, 포르투갈 왕실은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을 박해했던 모든 법들을 폐기시킨다. 이 칙령으로 인해 브라질의 ‘콘베르소’는 더 이상 종교재판에 회부되지 않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브라질에서 유대인 박해는 종료되고, 남은 브라질의 ‘콘베르소’는 결혼을 통해 현지사회에 동화된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 의식과 전통을 버리고 가톨릭 교도로 바뀌어 갔다. 18세기 말이 되면 브라질에는 유대인 ‘콘베르소’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브라질에 유대인 이민이 다시 들어오게 되는 것은 브라질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고 난 1822년 이후이다.
Ⅳ. 종교재판과 포르투갈 유대인
1. 포르투갈 유대인과 해상 무역
포르투갈 출신의 유대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면서부터 일찍이 신세계에 도래했지만 그들의 존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158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앞서 언급했듯이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병합한 시기에 해당한다. 한편, 아메리카에 진출한 포르투갈 출신의 ‘신기독교인’들은 상업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17세기 아메리카 식민지 사회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도 언급한 바 있다.
포르투갈의 ‘신기독교인’ 상인들 중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농장이나 광산을 소유했고 반(半)금융업자(semi-rentista)나 부동산업자로 바뀌었다. 누에바에스파냐에서 거점을 둔 포르투갈 상인들은 카르타헤나, 마라카이보, 캄페체(Campeche), 아바나, 마닐라 상품들을 베라크루스나 아카풀코 항구를 통해서 교역했고, 리마에 거점을 둔 포르투갈 유대인 상인들은 노예무역과 포토시의 은을 교환하는 무역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푸에르토 벨로(Puerto Bello), 파나마, 카르타헤나, 아카풀코 항구를 통해서 해상 무역활동을 주도하였다. 한편, 카르타헤나의 포르투갈 상인들은 카리브 해의 여러 항구에서 노예무역을 주도하였다(Quiroz 1986).
한편, 포르투갈 유대인과 누에바에스파냐의 유대인들은 마닐라, 아카풀코 및 페루의 카야오 항구를 잇는 갤리언 무역22)을 통해서 하나의 경제 네트워크를 구성하였다. 태평양을 통해서 이루어진 이 국제무역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상호간의 경쟁으로 인하여 스페인 제국에 의해서 엄격히 규제되었고 통제되었다.
메츠는, 스페인 왕실이 포르투갈 유대인에 가졌던 불신의 근거는 첫째, 그들이 지닌 “의심스런 신앙”을 지녔다는 종교적 이유에서, 둘째로는 그들이 스페인의 적국인 영국과 네덜란드와 교역을 하고 있다는 정치적 이유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Metz 1992, 213). 이런 맥락에서 갤리언선을 통한 카야오와 아카풀코 사이의 교역은 1604년 스페인 왕실의 허가(permiso) 규정에 따라 1년에 단 한차례만 이루어졌고(Legarda 1955, 354), 그것마저도 1634년에 공포된 칙령으로 인해 완전히 금지된다(Schurz 1918). 그리고 스페인은 페루 부왕령이 갤리언 무역을 통해 커다란 이득을 보게 되자 마닐라와 카야오간의 직접 교역을 금지시켰다. 스페인이 취한 이런 모든 조치는 스페인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제국 내의 은과 같은 귀금속을 지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서성철 2013, 145).
그러나 스페인의 이런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 무역은 스페인 당국의 감시를 피해 불법적으로 지속되었는데 이런 위험스런 상황 속에서도 이 무역을 담당한 사람들이 바로 포르투갈 출신의 유대인들이었다(Quiroz 1986).
아프리카 노예무역이나 갤리언 무역은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스페인 식민지 내외에서 이루어진 혁신적인 교역으로서, 포르투갈 유대인의 활발한 상행위는 관료주의에 입각한 스페인 왕실과 전통적 상인들이 지배했던 독점무역 구조를 뒤흔들었다. 이 모든 교역은 반스페인적 정치, 사회적 움직임에 대해 엄격한 제재를 가했던 스페인 왕실의 도덕적 기준과 종교적 적대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이런 와중에서도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스페인 왕실의 재정 수입의 확대 욕구와 그들의 경제적 이익 사이에서 조화롭게 대처하였다.
그러나 이런 포르투갈 유대인들의 왕성한 상업 활동으로 가장 많이 피해를 본 사람들은 스페인 상인들이었다. 스페인 상인들이 ‘인디아스 루트’ (Carrera de Indias)를 통한 독점 교역에 안주하여 수동적인 경제 활동을 펼쳤다면23) 포르투갈 출신의 유대인들은 스페인 식민지의 각 항구와 아메리카 내륙을 하나로 연결시킨 새로운 교역 패턴을 창출하였다. 그들은 ‘이동상인’으로서 항구에서 하역한 상품을 내륙에서 팔거나 아니면 항구에서 각 지역의 산물들을 교환하는 식의 상업 활동을 전개하였다(Núñez Sánchez 2004, 11).
이렇게 유대인 상인들은 스페인 상인들의 독점적 상업 구조를 무너뜨리면서 남부 태평양 해안을 중심으로 소주, 와인, 카카오, 소금과 같은 산물이나 물품들을 교역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본을 축적하면서 그들은 대금업자로 바뀌어 스페인 상인이나 ‘아센다도’(hacendado) 대농장의 주요 채권자가 된다. 키로스(Quiroz)의 언급을 빌리자면, 포르투갈 유대인과 스페인 상인과의 관계는 종국에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전락하고 만다(1986, 246).24)
앞서 언급했듯이, 유대인 상인들 대부분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무역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스페인 왕실과 독점 계약을 맺어 이 교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결과 스페인 식민지는 이 교역을 여전히 독점 유지하려는 스페인 상인들의 끝없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인들에 노예 공급을 의존하게 된다. 한편,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노예무역뿐만 아니라 수익성 있는 모든 사업이나 교역들, 즉 진주, 다이아몬드, 에스메랄다 같은 보석, 금, 은, 인디고, 카카오, 설탕, 와인 및 기타 식민지의 다른 산품들, 그리고 중국, 스페인 및 여타 유럽 나라들의 상품을 취급하였다(Quiroz 1986, 244).
포르투갈 유대인들이 스페인 식민지에서 교역을 확대해 나가면서 그동안 스페인 상인들을 통해 스페인으로 흘러 들어갔던 상당한 양의 은이 스페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유출되었다. 이는 스페인 식민당국과 스페인 상인들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고, 이로 인해 스페인의 중상주의는 심각하게 훼손된다(Bower 1974, 36).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갖가지 방해와 난관에도 불구하고 해상 교역을 통해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를 하나로 연결했다는 점이다(Quiroz 1986, 244).
2. 종교재판의 정치․경제적 동기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이단심문과 비교해 신세계에서의 이단심문 제도는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되었다. 16세기 중반, 스페인인들은 주로 멕시코와 페루에 정주하였다. 이 두 식민지에는 유대인, ‘콘베르소’, ‘신기독교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Metz 1992, 212). 이런 상황에서 1570년 리마에, 그리고 1571년에 누에바에스파냐에 종교재판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610년, 카르타헤나에 종교재판소가 세워졌다.25)
리오 델라 플라타의 경우, 그곳에도 종교재판소를 세우자는 여론이 많이 있었지만 그것이 무산된 이유는 스페인 왕실의 입장에서 볼 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경제적으로 그리 중요한 지역은 아니었지만 당시 포르투갈 유대인들이 이곳에 경제적으로 기여한 바가 컸기 때문이었다. 특히 스페인은 영국 해적들의 위협으로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지키는데 유대인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로 했다. 유대인의 추방이 이 지역에서 늦게 이루어진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다(Metz 1992, 213).
신세계에 포르투갈 유대인이 브라질에 많이 거주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이들은 1580년에서 1640년 사이, 다시 말해서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병합했던 시기, 종교재판소의 감시가 느슨한 리오 델라 플라타 지역으로 많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곳을 거쳐 많은 수의 유대인, ‘콘베르소’가 페루로 들어갔다.26)
초기 아메리카의 종교재판에서 스페인 출신의 유대인이나 ‘콘베르소’는 수적으로 적었고 또 그들이 식민지 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페루의 경우, 초기에는 소수의 유대인만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누에바에스파냐의 경우에도 유대인에 대한 이단심문은 17세기 말경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에 포르투갈의 유대인들이 몰려오면서 상황은 바뀌게 된다.
원래 종교재판소의 주 기능은 아메리카에서 유대인으로 의심되는 ‘신기독교인’과 개신교도를 축출하는 것이었다(Núñez Sánchez 2004, 11). 그러나 당시 가톨릭 교회는 인디오 개종 등 여러 다른 문제에 치중했고 ‘의심스런 유대인’은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다(Metz 1992, 212).27) 누에바에스파냐건 리마건, 초창기 종교재판에 회부된 사람들의 대다수 죄목은 유대인 이교도가 아닌 마녀, 신성모독, 중혼, 개신교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Soberanes Fernández 1998, 286).
그러나 포르투갈 유대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식민당국은 이들의 존재에 대하여 우려를 갖기 시작했고 스페인 상인들은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제 종교재판의 주 대상자나 희생자는 포르투갈 유대인으로 바뀌게 된다(Soberanes Fernández 1998, 289). 1639년 페루에서 거행된 종교재판은 이것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재판에서 공개 처형된 사람들의 80%는 포르투갈 유대인이었다. 이보다는 비중이 낮지만 1638년 카르타헤나의 종교재판소에 처형된 사람은 40%가 포르투갈 유대인이었다(Quiroz 1986, 242). 누에바에스파냐의 경우는 1646년에서 1649년 사이, 단 3년간 136명의 포르투갈 유대인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에 비해 누에바에스파냐의 경우, 스페인 유대인의 희생자 비율은 훨씬 낮다. 메츠(1992)는 그 이유를 브라질, 페루, 리오 델라 플라타에서 누에바에스파냐로 들어온 포르투갈 출신의 유대인과는 달리 오래 전부터 누에바에스파냐에 정주했던 스페인 출신의 유대인들은 일찍부터 현지 사회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추론한다. 다시 말해서, 식민시대 초기 스페인의 ‘콘베르소’는 자신들의 유대인 정체성을 유지하기보다는 스페인 기독교 사회에 동화되어 그 존재가 일찌감치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스페인 왕실의 유대인 이주 금지정책에 따라 아메리카에 온 스페인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의 응집력 있는 집단을 구성하거나 공동체를 조직할 수 없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 스페인 출신의 유대인들은 스페인의 가혹한 종교적 탄압 속에서 자신의 유대교를 버린 “정통 개종자”(Autentic Converts)로서, 그들은 자신의 유대 배경이나 종교 공동체, 신앙을 말끔히 지웠던 사람들이었다(Metz 1992, 212). 이런 점에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세계에서도 스페인 출신의 유대인과 포르투갈 출신의 유대인, 이 두 집단은 본질적으로 달랐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종교재판으로 단죄된 유대인 대부분은 상업에 종사했다는 것이다. 키로스에 따르면, 1635년에서 1639년 사이, 리마의 종교재판에 회부된 57명의 유대인 중 46명은 포르투갈 유대인 상인이었는데, 이 숫자는 전체 처형된 사람의 80%에 해당된다(Quiroz 1986, 242).28) 누에바에스파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서 상기 1646년에서 1649년간 거행된 종교재판에서 처형된 136명 중, 대부분은 포르투갈 출신의 ‘신기독교’인으로서 상인이었고 부유층이었다.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포르투갈 유대인 상인들은 국제무역 및 스페인 식민지간의 무역에서 종사하면서 남미 교역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29) 그들의 부가 눈에 띄게 증대하면서 경쟁자인 스페인 상인들은 그들의 유대 신앙을 비난하고 고발하였다. 이에 더해 그들은 종교재판소 내에 “명예위원”이나 “가족”(familiares)30)과 같은 직함을 갖고 유대인들의 재판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Quiroz 1986).31) 그들은 종교재판의 힘을 빌려 포르투갈 유대인 상인들의 경제적 힘을 와해시키고자 했다. 한편, 종교재판소는 포르투갈 ‘콘베르소’가 “유대교로 다시 회귀하고”(judaizar), 비밀리에 “모세의 율법”을 신봉한다는 죄목으로 그들을 단죄하였다.
페루 역사에서 ‘대음모’(la gran complicada) 사건으로 불리는 종교재판은 포르투갈 유대인에 대한 박해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1635년 8월, 페루 종교재판소에 의해 81명의 유대인들이 체포되었는데 그들 중 64명은 다시 유대교로 복귀하려던 사람들이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고문을 당했고 거기서 살아남은 11명의 죄수들은 개전의 정이 없는 이교도로 낙인찍혀 말뚝에 박혀 화형을 당했다. 화형을 면한 나머지 사람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태평양 횡단의 갤리언 무역선에서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다.
메츠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의 종교재판 기록의 어디에서건 그들이 음모를 꾸몄다는 기록은 없고 심지어 음모와 관련한 어떤 취조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종교재판소가 이들 유대인의 상당한 재산을 몰수했다는 것을 보면 포르투갈 유대인에 대한 지속적인 고발은 이들의 재산을 뺏고자 했던 종교재판소의 음모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32)
이렇게 종교재판을 통해서 페루 경제를 지탱한 유대인들이 사라지면서 페루의 금융시장은 마비되고 페루 부왕령은 심각한 경제공황 상태에 빠지지만 리마의 종교재판소는 유대인들로부터 몰수한 재산으로 스페인 식민지 내에서 가장 부유한 기관이 된다.33)
또 한 가지, 종교재판소는 재판을 통해 재산을 약탈하는 것 외에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포심을 조성하여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려는 목적을 띄고 있었다.34) 예를 들어, 종교재판의 의식은 시종일관 장엄하게 진행되었고, 종교재판의 최정점인 화형식은 언제나 일반 시민이나 대중이 모인 앞에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거행되었다. 여기서 물론 종교재판소의 종교적 기능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종교재판소는 늘 비종교적인 정치적 의제에 종속되었고(Metz 1992), 근본적으로 종교재판소는 하나의 사회 통제 기구였음을 알 수 있다.
Ⅴ. 결론
우리들은 지금까지 포르투갈 유대인의 신세계로의 유입과 유대인 공동체의 건설 및 해체, 그리고 그들의 경제활동 및 종교재판에 대해 살펴보았다.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스페인 유대인에 비해 신세계에 가는 것이 용이했고 이를 통해 그곳에서 활발한 상업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본 논문에서 밝혔지만 이는 브라질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서 이주를 금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노동력이나 인력을 활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포르투갈의 유연한 정책에 기인한다. 당시 포르투갈의 인구가 천만명에 불과했던 것을 고려하면 이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종교적인 면에서 보자면,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의 종교적 관용정책으로 그들의 신앙 활동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었다. 그들은 회당을 세우고 이를 통해 강력한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에 패해 브라질에서 물러나면서 유대인 공동체도 해체되었다. 이런 역사적 전개 속에서 브라질에서의 유대인 공동체의 운명은 네덜란드의 행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스페인인들보다 상업이나 교역 분야에서 보다 더 활발했고 경쟁적이었다. 그들은 설탕산업, 노예무역, 갤리언 무역 및 금융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들의 경제적 성공은 늘 식민당국이나 스페인 상인들과 마찰을 빚었다. 특히 그들은 스페인 상인들이 누리고 있었던 전통적인 독점 구조를 무너뜨렸고, 그들이 담당한 갤리언 무역은 식민지의 은에 의존한 스페인의 전통적 중상주의를 뒤흔들었다. 본 논문에서 강조한 것처럼 당시 스페인이 포르투갈 유대인에 대해 가졌던 불신의 근저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들이 스페인의 적국인 네덜란드, 영국과 교역을 했다는 정치적 이유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이렇게 상업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면서 식민지 사회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포르투갈 유대인을 박해하는 주요 동기가 됐다는 것은 본 논문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한편, 스페인 식민지에서 종교재판소가 설립됐을 초기에 유대인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소수의 유대인만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을 뿐이고 단죄의 대부분은 마녀, 신성모독, 중혼, 불경죄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유대인 상인들이 페루나 누에바에스파냐 등 스페인 식민지에 대거 몰려가면서 종교재판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때 희생된 사람들의 대다수는 포르투갈 유대인이었고 그들의 직업은 대부분 상인이었다. 본문에서 지적했지만 포르투갈 유대인에 대한 종교재판은 경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종교재판소는 유대인들부터 몰수한 재산으로 부유해졌지만 유대인이 사라진 식민지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대인이 사라지면서 페루나 리오 델라 플라타의 금융시장이 마비되고 경제가 붕괴된 데서 잘 드러난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포르투갈 유대인들이 종교재판에서 많이 희생된 것은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식민당국이나 종교재판소의 정치, 경제적인 동기에서 비롯됐음을 본 논문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Acknowledgments
*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 된 연구임 (NRF-2008-362-A0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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