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itute of Iberoamerican Studies
[ Article ]
Iberoamerica - Vol. 17, No. 2, pp.1-27
ISSN: 1229-9111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Dec 2015
Received 28 Oct 2015 Revised 22 Dec 2015 Accepted 22 Dec 2015

상호텍스트성 관점으로 보르헤스의 작품 읽기: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를 중심으로

송병선**
**울산대학교 인문대학 국제학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avionsun@ulsan.ac.kr
“Theme of the Traitor and the Hero” of Jorge Luis Borges: Intertextual Reading
Song, Byeong-Sun**

초록

이 글은 상호텍스트성을 명시적, 암시적, 추측적 범주로 분류한 로브 포프의 구분에 따라 보르헤스의 작품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를 분석하고자 한다. 명시적 상호텍스트성으로는 예이츠와 셰익스피어를, 암시적 상호텍스트성으로는 체스터턴과 라이프니츠와 순환교리를, 그리고 추측적 상호텍스트성으로는 킬패트릭과 놀란이라는 이름의 의미, 그리고 보르헤스가 사용하는 픽션의 의미를 보여주는 파이잉거와 마우트너를 설명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보르헤스는 여러 작가를 인용하면서 상이하거나 심지어는 반대되는 이론을 언급한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는 표절과 배신을 통해 창조적 행위가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현실의 해석이나 가정에 관한 것을 다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인용의 기능은 모든 것이 확실성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아가면서 다양성을 통해 세상은 무한한 해석을 인정하고, 동시에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Abstract

This study analyzes a Borges’ short story “Theme of the Traitor and the Hero”, based on the categories of intertextuality elaborated by Rob Pope: the explicit, the implied and the inferred. As for the explicit intertextuality, Yeats and Shakespeare are treated; in terms of the implied, Chesterton, Leibniz and the cyclical doctrines; and as for the inferred, the meaning of the names of Kilpatrick and Nolan, and the theories of Vaihinger and Mauthner that match with the concept of Borges’s fiction.

In “Theme of the Traitor and the Hero” the creative act is displayed through the plagiarism and betrayal. But it can be considered as an interpretation or a postulation of the reality. It seems to point out the impossibility of the certainty and through this multiplicity, it is evident that the world admits the infinite interpretation.

Keywords:

Borges, Intertextuality, Theme of the Traitor and the Hero, Shakespeare, Chesterton, Leibniz

키워드:

보르헤스, 상호텍스트성,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 셰익스피어, 체스터턴, 라이프니츠

Ⅰ. 상호텍스트성의 인식적 차원과 보르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대표적인 비평가인 하이메 알라스라키(Jaime Alazraki)는 보르헤스 작품의 가장 중요한 구성 원칙을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라고 지적한다(Alazraki 1983, 430).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러시아 비평가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의 대화주의와 카니발 이론에 관한 글에서 “모든 텍스트는 인용의 모자이크로서 구축되며,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의 흡수이며 변형”(Kristeva 1978, 190)이라고 지적하면서 ‘상호텍스트성’이란 용어를 주조한다. 탈구조주의 흐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면서, 본래의 문화적 가치와 해석의 전통적 범주를 불안정화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이 개념은 문학과 문화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현대문학이론과 문화이론은 그 어떤 문학작품도 사회적 규약이나 문화체제, 그리고 다른 문학적 혹은 비문학적 형식과 완전하게 독립된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그 어떤 작품도 이전과 이후의 작품과 고립되어 자족적 의미를 갖지는 못하며, 따라서 모든 작품 분석이나 해석은 반드시 일련의 다른 작품과의 관계를 포함해야 하고, 그런 관계 속에서 그 작품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작품에서 의미를 추출하거나 발견하는 이런 독서과정은 그 작품이 언급하고 있으며, 그런 관계망 속에서 서술되는 다른 텍스트로 옮겨가게 이끈다. 이런 점에서 각각의 문학작품은 여러 작품들이 교차되는 장소이며, “수많은 담론으로 짜여 있고, 기존에 존재하는 의미로부터 파생”(Allen 2000, 67)된다고 이해될 수 있다.

상호텍스트성은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지만, 이 개념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작업은 매우 도전적인 작업이다. 그레이엄 앨런(Graham Allen)은 상호텍스트성을 논하면서 그것이 “현대 비평용어 중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가장 많이 오용되는 용어”(Allen 2000, 2)라고 지적한다. 여러 문학이론가들의 제안들을 검토해보면, 이 용어가 너무나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으며, 이 용어에 대해 공통적으로 합의된 접근 방식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왜 이 용어는 그토록 많은 문학 및 문화 이론가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일까? 이것은 그들에게 텍스트의 본질과 영향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제공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수단은 상호텍스트성이 텍스트 자체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인식적 모델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다시 말하면, 상호텍스트성은 독자들이 텍스트 자체보다 그것에 접근하는 방식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비롯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제라르 주네트(Gérard Genette), 그리고 마이클 리파테르(Michael Riffaterre)를 살펴보면, 상호텍스트성에 대해 다소 차이를 보이고 이 용어가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 그러나 이들은 독자의 인식적 차원에 중요성을 부과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로브 포프(Rob Pope)는 이런 공통점에 바탕을 두고, 상호텍스트성 관계를 설정하는데, 이런 분류는 매우 유용한 분석도구로 보인다. 그는 이 용어를 논의한 후 명시적(explicit), 암시적(implied), 추측적(inferred) 상호텍스트성이라는 세 가지 범주를 제시한다. 그는 명시적 상호텍스트성이란 작품 속에서 분명하게 언급되고 구체적 출처가 나타나는 모든 다른 텍스트라고 지칭한다. 그는 대표적인 예로 엘리엇(T. S. Eliot)의 『황무지The Waste Land』와 그 작품이 주석으로 밝히고 있는 명백한 출처인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태풍The Tempest』을 들고 있다. 한편 암시적 상호텍스트성은 “다른 텍스트를 지나가는 것처럼 언급하는 인유(引喩, allusion)로서, 빈틈없고 사전지식이 풍부한 독자만이 작가가 설계한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간파할 수 있는”(Pope 2002, 246)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추측적 상호텍스트성은 실제 독자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의존하는 모든 다른 작품을 지칭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의도보다 독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포프는 독자들이 작품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상호텍스트성의 의미에 도달하여 작품의 의미를 산출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앞의 두 유형과 달리, 추측적 상호텍스트성은 다른 텍스트의 명백하거나 지나가는 것 같은 언급보다 독자의 통찰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지향이론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포프의 이런 분류는 단순명료하지만, 그것을 적용하게 되면 인식적 차원에서 한 가지 문제점이 드러난다. 그것은 상호텍스트성 연구에서는 명시적인지 암시적인지, 추측적인지의 분류가 아니라, 그것의 의미산출과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상호텍스트성은 텍스트 자체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독자가 지각하는 인식적 모델로 이해되며, 따라서 독자들이 문학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에 적용되어야 할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상호텍스트성’은 텍스트 자체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독자의 문학작품에 대한 접근 방식에도 적용되어야 한다(Panagiotidou 2011, 2).

이럴 경우, 독자의 사전지식은 상호텍스트성의 해석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며, 따라서 포프가 언급한 독자의 ‘추측적 상호텍스트성’은 명시적, 암시적 상호텍스트성의 의미를 찾고 해석하는 작업에 작용할 수밖에 없다. 파트리시아 바라스(Patricia Varas)가 지적하듯이, 이런 작업은 추상적인 평으로 페이지를 채우면서 문학작품에 관해 사색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독서의 즐거움을 되돌려주거나 증가시키는 행위이다(Varas 1988, 90). 이것은 보르헤스가 책을 읽는 것은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이며, “문학은 즐거움의 한 형태”(Borges 1998, 22)라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이런 즐거움에 이르려면, 무엇보다 독자의 능력을 통해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이 글의 분석대상인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는 가시적 상호텍스트와 눈에 보이지 않는 상호텍스트라는 두 개의 과정을 통해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런 의미를 발견하고 논의하며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의 사전지식은 필수적이다. 보르헤스는 창작품이란 “우리가 읽은 것의 망각과 기억의 혼합”(Borges 1998, 24)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독자의 관점에서 작가의 망각과 기억을 밝혀내는 작업이 된다. 이 글은 포프의 상호텍스트성 범주에 따라 보르헤스의 작품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를 분석하고자 하지만, 그의 분류가 지닌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 작품의 상호텍스트성이 산출하는 의미와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명시적 상호텍스트성과 암시적 상호텍스트성에 ‘추측적 상호텍스트성’을 사용하고자 한다.

1944년 2월 <남쪽Sur> 2월 호에 출간된 짧은 작품인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는 보르헤스의 상호텍스트성 미학을 아주 잘 보여주면서, 탐정소설 장르와 순환 교리, 배신과 죽음, 혁명 신화, 인간의 비열함과 위대함, 배신과 구원의 글쓰기에 관해 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주인공의 이야기와 주인공에 대한 전기를 쓰는 역사가의 이야기, 그리고 작품의 화자인 보르헤스가 등장하면서 세 가지 서술 차원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이 작품은 후에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감독의 <거미의 계략La strategia del ragno>(1970)의 원작이 되기도 하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의 『켈트족의 꿈El sueño del celta』과도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이런 작품들의 상호텍스트성을 논할 수 있는 기초가 되기도 한다.


Ⅱ.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 현실과 허구의 끝없는 교차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는 1824년 아일랜드를 무대로 삼고 있으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퍼거스 킬패트릭은 반란군의 우두머리로 아일랜드의 반란이 성공하기 전날 밤에 살해된다. 그리고 퍼거스 킬패트릭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그의 증손자이자 전기 작가인 라이언은 그의 전기를 쓰려고 한다. 라이언은 킬패트릭의 죽음에 관해 조사하다가, 맥베스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과 이상하게 비슷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처음에 라이언은 “역사가 역사를 그대로 복사할 수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를 전율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역사가 문학을 그대로 베낄 수 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Borges 2011, 161)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킬패트릭의 동지인 크리스토퍼 놀란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게일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을 알아내면서, 라이언은 수수께끼를 해결한다.

민중 봉기가 일어나려는 순간에 열린 반란지도자 비밀 회합에서 놀란은 익명의 배신자가 다름 아닌 퍼거스 킬패트릭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킬패트릭은 지체 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처형이 조국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애원했다. 시간이 부족했고 민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지도자가 공개적인 치욕을 당하게 되면, 아일랜드 민중들의 사기를 저하시켜 반란의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자 놀란은 아주 독창적인 계획을 구상한다. 킬패트릭을 단순하게 처형하는 대신에 극장에서 암살하면, 그 사건은 성난 민중의 반란에 불꽃을 당길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기존의 지식을 사용하고 우연을 피하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상황을 차용하여 극장에서 암살이 이루어지고, 민중들이 봉기함으로써 그 책략은 성공했으며, 그런 처형방식은 절대적 비밀로 유지되었다. 심지어 이런 비밀을 밝혀낸 전기 작가 라이언도 그런 사실을 함구하면서 자신의 증조할아버지 킬패트릭의 영웅심을 찬양하는 책을 출간한다.

이 단편소설은 허구와 현실이 혼동되면서 계속 교차되는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화자인 보르헤스는 줄거리가 체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의 영향 아래 상상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세부적인 사항들(날짜, 이름, 상황, 장소)을 덧붙이고, 이것들은 주인공에게 역사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이 작품이 중간 정도 진행될 무렵에는 이미 킬패트릭은 허구가 아닌 역사의 인물로 간주되고, 이렇게 허구적인 것이 역사적 현실로 변모된다. 한편 작품 속의 모든 현실은 거대한 연출로 나타난다. “도시 전체도 하나의 극장이었고, 배우들은 다수의 시민이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절정에 이르렀던 연극은 며칠 낮과 밤 동안 계속되었다.”(Borges 2011, 161-162) 이후 이 연극과 극장은 링컨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성격의 또 다른 사건을 예시한다. 이렇듯 이 작품 전체는 현실과 허구, 역사와 상상을 계속 오간다.

이 작품에는 세 개의 서술적 차원이 존재한다. 우선 킬패트릭의 이야기와 킬패트릭의 전기를 쓰는 역사가이자 전기 작가인 라이언의 이야기, 그리고 텍스트의 화자인 보르헤스가 존재한다. 각각의 차원은 일련의 정보나 적절하게 드러나는 징후를 통해 객관적이고 분명한 시간을 보여준다. 보르헤스는 자기 자신을 1944년 1월 3일에 위치시킨다. 라이언은 증조할아버지의 서거 100주년이 되는 1924년경에 그에 관한 전기를 쓴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일랜드 영웅의 살해에 관해 서술된 사건들은 1824년 8월 2일에서 4일 사이에 일어난다. 그러나 이런 세 개의 서술 차원은 독립적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통합되면서 전개된다.


Ⅲ. 명시적 상호텍스트성: 예이츠와 셰익스피어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에서 명시적 상호텍스트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곁텍스트(paratext)인 헌사이다. 보르헤스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의 『탑Tower』에 수록되었으며, 1919년 아일랜드 혁명을 진압하는데 사용된 ‘블랙앤탠스(Black and Tans)’의 잔인무도한 행위에 대한 대답으로 작성된 시 「1919」를 인용한다. “그리하여 플라톤의 해는/ 옛것 속에서 선회하는 대신/ 새로운 옳음과 그름을 내밀며 선회한다./ 사람들은 모두 무용수, 그들의 궤적은/ 요란하게 울리는 징 소리를 향해 나아간다.”(Borges 2011, 158) 이 예이츠의 시는 아일랜드 독립전쟁 기간에 대한 명상이며(Balderston 2010, 41), 따라서 이후 전개될 작품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2). 한편 독자는 이 인용문을 통해 오래된 흔적 위로 사건들이 반복되며, 인간은 단지 징 소리처럼 너무나 머나먼 시기부터 그런 흔적을 쫓는 무용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향후 순환적 시간이 다뤄질 것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예이츠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시인이며 에세이 작가로, 영국의 셰익스피어와 대척점에 있는 아일랜드 시인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에서 드러나는 근본 요소는 선조들의 신화와 역사, 그리고 동양의 비교(秘敎)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보르헤스가 인용한 시집 『탑』에서 특히 잘 구현된다(Fernández Ferrer 2009, 243). 예이츠의 시는 먼저 플라톤을 언급하면서, 그가 생각한 시간의 본질적 개념을 드러낸다. ‘플라톤의 해’는 플라톤이 그의 대화집 『티마이오스Timaeos』의 39항에서 언급하는 이론으로, 행성들의 회전운동과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출발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2행과 3행은 이후 텍스트가 암시하는 시간의 순환적 개념을 예고한다. 또한 마지막 두 행은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의 시작부분에서 나타나는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예정조화설과 관련지을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운명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미리 정해진 운명을 향해 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 개념은 이 작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배신자를 스승과 동일시하는 『픽션들』에 수록된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와 『알레프』에 있는 「신학자들」과의 상호텍스트성 관계를 설정하기도 한다.

예이츠의 이 시는 과거의 이미지와 현재의 이미지를 대립시키면서 “갈수록 늘어가는 세계의 범죄행위”(Fernández Ferrer 2009, 244)를 드러낸다. 그리고 인용한 대목은 되풀이되는 역사의 개념과 ‘예정된’ 틀에 의해 행동하는 인간이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이것은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하지만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예이츠가 찰스 스튜어트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 1846-1891)에 관한 에세이와 시를 썼다는 점이다. 파넬은 아일랜드의 지도자였지만 유부녀와 내연관계였다는 이유로 가정파괴범으로 매도당한 사람이다. 보르헤스는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에서 배신과 그로 인한 고백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수정하려는 욕망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파넬을 거부했던 아일랜드 사람들의 목소리로 말하는 예이츠의 『3월의 보름달A Full Moon in March』에 수록된 「파넬의 장례식Parnell’s Funeral」이란 시의 정신과도 내용적으로 일치한다. 특히 이 시의 첫 대목인 “우리가 그의 심장을 먹어치웠을 때/ 색칠한 무대 위에서/ 우리는 아무 역도 맡지 않았다.”는 퍼커스 킬패트릭의 처형 장면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Fernández Ferrer 2009, 244). 또한 보르헤스의 작품을 관통하는 역할 놀이라는 주제와도 유사성을 지니면서, 파넬에 관한 예이츠의 시가 보르헤스의 작품에 토대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에서 사용된 또 다른 명시적 상호텍스트로는 “아일랜드의 적”(Borges 2011, 162)인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라이언은 자신의 증조부 퍼거스 킬패트릭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떠올리게 만드는 순환적 성격과 유사한 상황을 발견하고 반복되는 선들의 그림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퍼거스 킬패트릭이 죽기 전에 어느 배신자의 사형선고에 서명을 했지만, 그의 이름은 지워져있음을 알아낸다. 라이언은 이것을 조사하고 그 수수께끼를 해석한다. 즉, 킬패트릭은 극장에서 살해되었지만, 도시 전체가 극장이었던 것이다. “영웅의 가장 오랜 동지”(Borges 2011, 161)인 놀란은 혁명의 배신자가 바로 그들의 우두머리인 퍼거스 킬패트릭임을 밝혀내고, 음모자들은 자신들의 우두머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며, 그는 자기의 선고문에 서명한다. 킬패트릭이 자신의 죽음이 조국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부탁하자, 놀란은 “배신자의 처형이 조국의 해방을 위한 도구”(Borges 2011, 162)가 될 수 있도록 킬패트릭을 익명의 살인자 손에 죽게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를 표절하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맥베스』의 장면을 반복한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상호텍스트성 기능은 영원회귀의 측면과 미학적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은 두 개의 형식적 요소인 원형과 반복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내포하며, 오래전에 일어난 사건이 배신의 모델로서 순환적으로 반복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이 작품에서는 킬패트릭이 서양 문화의 위대한 신화적 인물들과의 유사하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킬패트릭은 약속된 땅의 입구에서 자기 민족을 버린 성격의 모세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또한 브루투스와 카이사르, 그리고 배신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율리우스 카이사르3) 같은 인물도 언급한다. 그렇게 배신이라는 무한한 주제, 즉 순환적인 주제가 킬패트릭의 이름과 이런 수수께끼 같은 “순환의 미로”(Borges 2011, 161)의 출현을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은 “더욱 복잡하고 이질적인 또 다른 미로”(Borges 2011, 161) 속으로 라이언을 빠뜨린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배신한 영웅 킬패트릭의 처형 상황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맥베스』의 표절로 판명된다.

이 작품에서 배신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문학 패러다임의 일부를 이루면서 배신의 도덕적 의미는 약해진다. 보르헤스의 작품에서는 왜 영웅이 배신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다. 단지 음모자들이 혁명투쟁이 계속해서 실패하는 이유를 궁금해 한다는 사실과 킬패트릭이 자신의 죄가 밝혀질 수사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요청하고 마침내는 자신에 대한 사형선고를 받아들인다는 것, 그리고 목숨을 바치는 대가로 명예를 구할 계약을 마침내 수용하는 사실만 드러나 있다. 즉, 이런 극적인 상황의 심리적 측면은 거의 그려져 있지 않으며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있다. 반면에 킬패트릭의 처형의 미학적 차원은 작중인물을 변화시키며, 역설적이게도 잃어버린 그의 위대함을 복구시킨다(Renaud 2010). 놀란은 영웅의 가장 오랜 동지였지만, 동시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게일어로 옮긴 번역자였는데, 이것은 매우 결정적인 자료이며 심지어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책에 대한 사랑과 우정의 이름으로, 자신의 친구이자 혁명 동지였던 킬패트릭에게 걸맞은 탈출구를 찾아주는데, 이것이 바로 문학적이고 허구적인 그의 운명을 만들어낸다. 시간에 쫓긴 나머지 처형 상황을 처음부터 고안해낼 수 없었던 놀란은 노련하게 과거의 유명 작품들을 표절한다.

여기서 킬패트릭의 배신과 놀란의 표절이 보여주는 의미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셰익스피어 번역자의 표절은 민중을 배신한 우두머리에게 영광스러운 영웅의 신화를 창조해준다. 아마도 이런 사기극에 참여하는 놀란의 반복된 표절은 미학적 측면에서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글쓰기에 구원의 힘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글쓰기는 팔림세스트, 즉 다시 쓰기와 상호텍스트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놀란은 하나의 텍스트가 여러 텍스트를 흡수하고 변형한 것이라는 크리스테바의 이론을 확인시켜준다. 그는 순진하게 모방하기보다는 각색하고 변형하고 조합하면서 타인과 자신의 텍스트를 융합하고, 기원과 사적 소유라는 개념을 무시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변형시키면서 자신의 친구를 구원하고, 표절과 사기와 배신을 창조적 행위로 채택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삶의 역설적인 원동력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왜 보르헤스는 많은 작가들 중에서 셰익스피어를 선택한 것일까? 오스발도 소리아노(Osvaldo Soriano)와의 인터뷰에서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다.

셰익스피어를 다룰 때면 우리는 항상 충분히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말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참 이상한 현상인데,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무한과 동의어인 것 같습니다. 나는 종종 다른 시인이 아니라 그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그 이름 속에 무한이라는 함축적 의미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못한 시인들의 경우라면 아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예를 들어 내가 존 던이라고 말하면 위대한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독자의 상상력 속에서는 위대한 이름이 아닙니다. 반면에 셰익스피어라고 말하면 위대한 이름이 됩니다. 위고도 셰익스피어의 이름에 무한한 함축적 의미를 제공하는데 일조한 사람이었습니다.(Ferrari 1987, 203-204)

보르헤스에게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무한’이며 동시에 영원히 회귀되고 순환될 수 있는 문학적 출처이다4).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모방에서 탄생하지만, 문학이나 허구가 아니라 현실의 한 형태가 된다(Cañeque 1995, 75)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것은 킬패트릭이 허구나 연극의 인물로 죽는 것이 아니라, 놀란이 작성해놓은 셰익스피어 희곡의 장면을 그대로 반복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셰익스피어를 반복하는 행위는 역사가 반복될 수 있으며, 그것과 더불어 문학 역시 역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새롭고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Ⅳ. 암시적 상호텍스트성: 체스터턴과 라이프니츠, 그리고 순환교리

로브 포프는 암시적 상호텍스트성의 대표적인 수사법으로 인유를 들고 있다. 명시적 상호텍스트성은 다른 작품의 출처까지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인유라는 전통적 개념에 관해서는 여러 이론이 존재하지만, 인물이나 장소 혹은 사건이나 문학작품, 또는 신화나 다른 예술작품 등을 지나가듯이 인용하는 일반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인유는 상호텍스트성의 일부를 이루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5). 이것은 인유가 전통적으로 작가의 의도를 독자에게 알려주어 그것을 간파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지만(Irwin 2004, 236), 결국 텍스트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 관계의 설정뿐만 아니라, 작품을 읽는 동안 이런 관계의 활성화는 독자의 수행능력에 달려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인유의 기법을 볼 때,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의 시작부분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보르헤스는 이 작품을 이렇게 시작한다. “격조 높은 추리소설을 창안하고 그것을 세련되게 만들었던 체스터턴과 예정조화설을 만든 궁정 고문 라이프니츠의 저 유명한 영향 하에, 나는 한가로운 저녁 시간 동안 이 이야기를 상상했다. 아마도 나는 이 이야기를 쓸 것이며, 그것은 어떤 방식이로든 이런 나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Borges 2011, 158) 여기서 화자 보르헤스는 체스터턴과 라이프니츠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 두 사람이 이 작품과 상호텍스트성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선 체스터턴과 이 작품의 상호텍스트성에 관해 알아보자. 보르헤스는 이 영국작가에 관해 쓴 에세이 「체스터턴에 관하여」에서 체스터턴의 영향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 체스터턴의 이야기 방식과 관련하여,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다. “미스터리를 제시하고 악마적이거나 마술적인 설명을 제안하며 마침내 이 세상의 다른 것으로 그것을 대체한다.”(Borges 1974, 694) 이런 특징은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에 완벽하게 적용될 수 있다. 실제로 화자는 ‘미스터리’를 제시한다. 그것은 퍼거스 킬패트릭의 수수께끼 같은 죽음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술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그것은 순환적 시간에 관한 생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설명은 속세의 것, 즉 “비밀스럽고 영광스러운 음모자들의 대장”(Borges 2011, 159)이 민중 반란의 배신자가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한편 체스터턴은 이 작품의 제목에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적 패러다임의 틀을 보여주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것은 ‘배신자와 영웅’이 모순어법(oxymoron)의 메아리가 발견되는 역설을 지시하는데, 이런 역설은 체스터턴이 구사하는 요소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배신자/영웅의 모순어법은 역 반영 혹은 자기 지시성을 의미하는 역설의 표현이다(Varas 1988, 95). 체스터턴은 역설을 사용하여 자신의 탐정소설을 구성하는데, 여기서 역설은 탐정이면서(브라운 신부)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 사물의 해결 불가능한 속성 때문에 미스터리를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보르헤스와 체스터턴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체스터턴은 가톨릭신부로 진리를 믿으며 거기에 해결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보르헤스는 진리에 회의를 품으면서 미로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의 작중 인물들은 이런 미로 속에 있으며, 그들이 해결하는 것은 부분적이며, 따라서 미스터리는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Varas 1988, 95).

보르헤스는 여러 번에 걸쳐 체스터턴을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하나로 언급했으며, 자기 작품에서 그의 영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 영국작가의 작품은 1930년대에 보르헤스가 탐정소설이론을 언급하는 에세이에서 계속 등장한다(Adur Mobile 2011)6). 특히 체스터턴의 존재는 『또 다른 탐사Otras inquisiciones』에서 특히 눈에 띄는데, 여기에서 보르헤스는 그에게 에세이 한 편을 헌정할 뿐만 아니라, 체스터턴의 동일한 인용문은 다른 텍스트에서 세 번이나 반복된다7). 그러나 질리언 가이톤(Gillian Gayton)이 지적하듯이 비평가들은 이런 관계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Gayton 1980, 312). 보르헤스에게서 체스터턴의 존재를 가장 치밀하게 분석한 글에서 엔리케 안데르손 임베르트(Enrique Anderson Imbert)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이 연구는 힘들지만, 결과는 보잘것없다. 그 어떤 보르헤스 작품의 주요 줄거리도 체스터턴의 다른 이야기를 계속하거나 전복시키는 것은 없다. 보르헤스의 단편에서 직조되는 체스터턴의 이야기는 너무나 축소되어 있어서 감지하기 힘들다. 사실 그것은 줄거리가 아니라, 최소한의 서사 단위이자 요소들이며 가면을 쓴 사람이거나 또 다른 자아, 미로, 놀라움, 거울, 실수, 상징, 도형화된 현실의 단위와 같은 체스터턴의 기능들이다.(Anderson Imbert 1973, 493-494)

체스터턴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 보르헤스의 이 작품은 「부러진 검의 의미The Sign of the Broken Sword」과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 세인트클레어(St. Clare) 장군은 영웅이자 순교자이며, 그를 기리기 위해 영국 전역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열악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야만인’인 브라질 애국주의자들과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부러진 칼을 들고 항복했고, 끝내 브라질 인들에 의해 교수되었다. 그런데 브라운 신부는 세인트클레어 장군이 자신의 부정과 부패를 눈치 챈 소령의 협박을 받자 그를 살해했고, 부러진 검은 바로 소령의 뼈 깊숙이 박혀 부러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또한 장군은 영국 군인들의 시체를 수북이 쌓고서 그 안에 소령의 시체를 숨겼으며, 마치 병사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명예를 버린 것처럼 부러진 칼을 들고 항복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리고 신사적인 브라질 애국주의자들은 그들을 석방하지만, 그의 병사들은 장군이 일부러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을 알자 그를 처형했으며, 영국의 명예를 위해 그가 브라질 군인들에게 살해되었다고 추정하게 놔두었던 것임을 알아낸다. 처형자들의 침묵 덕분에 세인트클레어는 비록 악당이지만 성인으로 간주되고 진실은 결코 밝혀지지 않게 된다. 보르헤스 작품의 킬패트릭처럼 세인트클레어는 동포들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지만, 그는 조국의 적들에게 살해되었다고 알려지고, 그렇게 애국의 명분은 역설적으로 강조된 것이다.

체스터턴을 언급한 이후 즉시 보르헤스 작품에는 “예정 조화설을 만든 궁정 고문 라이프니츠”(Borges 2011, 158)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체스터턴처럼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8). 라이프니츠는 신이 처음부터 영혼과 육체라는 두 가지 실체를 각각 만들었고, 그래서 각자의 법칙에 따라 상호 영향을 받은 것처럼, 혹은 신이 계속해서 조정하고 있는 것처럼 다른 것과 조화를 이룬다고 설명한다(Rey 1999, 194). 이렇게 라이프니츠는 영혼-육체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예정 조화’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은 본래 정돈된 형태로 육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만들고 제시하도록 영혼을 창조했다. 그리고 육체는 영혼이 육체를 조직하는 모든 것을 하도록 창조했다9). 즉, 신은 애당초 두 개의 실체가 이미 스스로 타고난 고유의 법칙을 지킴으로써 서로 완전한 조화에 이를 수 있도록 창조했는데, 이런 사실이 두 개의 실체가 마치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되거나, 아니면 신이 언제나 손수 개입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에서 라이프니츠의 육체와 영혼의 예정조화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미 설정된 질서를 따르며,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우연인 것은 없다는 측면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라이언과 킬패트릭은 놀란이 설정한 유형을 따르고, 놀란은 셰익스피어가 설정해 놓은 틀을 따른다. 이런 패러다임은 각각의 사건에 대한 틀을 제공하는 플라톤의 원형적 세상과 일치한다. 체스터턴이 통일성을 거부하고 역설을 선택하고, 셰익스피어는 개인을 거부하고 수많은 인물들을 만들 듯이, 라이프니츠와 플라톤은 개인이 자기 발자국과 결정을 세상에 남겨놓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Varas 1988, 96). 그렇기 때문에 킬패트릭은 성공한 영웅도 아니고 배신자도 될 수 없으며, 놀란은 독창적인 작가가 될 수 없고, 라이언은 자신의 발견에 충실한 연구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체스터턴과 라이프니츠 이외에도 이 작품에서는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1889)도 언급된다. 보르헤스는 “그의 작품은 수수께끼다”(Borges 1995, 841)라고 지적한다. 그의 책 『반지와 책The Ring and the Book』에서는 살인자와 희생자를 포함한 열 명의 주인공들이 어느 범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각자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믿는다. 여기서 브라우닝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의 이름과 함께 언급된다. 아마도 이들이 동시대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브라우닝의 시는 당시 위고의 시와 흡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Rey 1999, 194). 하지만 아마도 두 사람 모두 파넬에 관해 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이들은 모두 퍼거스 킬패트릭의 이름과 함께 나온다.

한편 라이언이 퍼거스 킬패트릭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되풀이되는 선을 떠올리는 순간,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관』(1795)의 저자인 콩도르세(Marquis de Condorcet, 1743-1794)를 비롯한 여러 이름이 언급된다. 보르헤스가 평가하듯이 바로 그 책에서 일정하지 않지만 예외적으로 회귀가 존재할 수 있는 진보로 착상된 열 단계 역사관이 언급된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역사적 사건은 되돌릴 수 없고 자율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는 자연에서 사물들은 반복된다고 지적한다. 한편 니체와 괴테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으며, 문화를 자체적인 마멸로 소모와 쇠퇴의 과정을 밟는 생물학적 유기체로 인식하는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1936)도 언급되며, 개별 역사는 이상적인 영원한 역사에 따라 흘러간다고 주장하는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의 이름도 등장한다. 그는 신의 섭리 때문에 개별 역사는 불변하는 3개의 주기(신의 시대, 영웅의 시대, 인간의 시대)의 끊임없는 순환으로 구성된 영원한 틀에서 나올 수 없다고 지적한다(Rey 1999, 194-195). 마지막으로 『노동과 나날』의 저자 헤시오도스(Hesiodos)는 인류 역사의 5단계의 순환을 예고하면서 가장 끝에 이르면 다시 반복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보르헤스는 순환 교리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영원회귀의 교리를 다루는 그의 에세이 「순환적 시간」에서 보르헤스는 영원한 반복을 해석할 수 있는 세 가지 방식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행성의 시기가 순환적이라면 우주의 시간도 그럴 것이라고 주장하는 플라톤에 바탕을 둔 점성술이다. 둘째는 니체와 관련된 해석 방식이다. 셋째는 “덜 섬뜩하고 덜 감상적이지만 역시 상상 가능한 유일한 것”(Borges 1974, 394)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라 ‘유사한’ 순환의 가정이다. 보르헤스는 유사한 순환의 존재를 주장하는 유명인들의 광범위한 목록을 보려준다.

나는 브라마의 낮과 밤을 생각한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시계가 1001년마다 스쳐가는 새의 날개로 아주 천천히 닳아버린 피라미드인 시기를 생각한다. 또한 금의 시대부터 철의 시대로 전락하는 헤시오도스의 사람들도 생각한다. 나는 불로 인해 생기고 주기적으로 불로 인해 소실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세상을 생각하고, 불로 인해 전멸되고 물로 인해 다시 돌아오는 세네카와 크리시포스의 세상을 생각한다. 나는 베르길리우스의 네 번째 편의 「목가」를 생각하며, 셸리의 멋진 모방과 반복을 생각한다. 그리고 전도서와 신지학자들과 콩도르세의 열 단계 역사관을 생각한다. 또한 프란시스 베이컨과 우스펜스키도 생각하며, 제럴드 허드와 슈펭글러와 비코를 생각하고, 쇼펜하우어와 에머슨을 생각하며, 허버트 스펜서의 『제1원리』와 에드거 앨런 포의 『유레카』를 생각하고……(Borges 1974, 394-395)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에서 이런 교리를 주장하는 권위자들의 이름은 여기서 인용한 목록의 견본임을 보여준다. 여기에 순환적 시간에 대한 생각을 삽입한 것은 뜬금없어 보이지만, 그것은 작품 속에서 구조적 기능을 수행한다. 다시 말하면, 보르헤스가 지적한 체스터턴의 문체적 특징 중에서 두 번째 서사적 순간인 “악마적이거나 마술적인 설명”의 단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Ⅴ. 추측적 상호텍스트성: 킬패트릭, 놀란, 파이잉거, 마우트너

추측적 상호텍스트성은 실제 독자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의존하는 모든 다른 작품이나 지시물을 지칭한다. 영웅과 배신자라는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중성을 떠올리면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Stevenson)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1886)를 떠올릴 것이다. 그 이외에도 여러 영웅들의 이중성을 기억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작품에 전혀 언급이 되지 않는 퍼거스 킬패트릭과 제임스 알렉산더 놀란의 의미, 그리고 보르헤스가 즐겨 사용하는 ‘언어의 미신(superstición de la palabra)’에 관해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퍼거스 킬패트릭은 본질적으로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이름이다(Fernández Ferrer 2009, 246). 퍼거스/페르구스는 초기 켈트 문학에 등장하는 여러 영웅들의 이름이며, 킬패트릭은 나중에 패트릭이라고 불리게 될 스코틀랜드의 도시이다. 그리고 퍼거스 킬패트릭은 얼스터와 코노트 왕국의 전쟁을 다루는 전설집 『쿨리 소싸움Táin Bó Cúailnge』의 배신자이자 영웅인 페르구스 막 로크(Fergus mac Roich)와 매우 유사하다. 그는 본래 얼스터 인이었으나, 얼스터의 왕인 콘코바르에게 배신당해 망명을 선고받고서 코노트 왕국 편에서 콘코바르와 맞서 싸운 인물이다.

한편 놀란이라는 이름은 존 포드(John Ford) 감독의 1935년 영화 <밀고자The Informer>에 등장하는 지포 놀란(Gypo Nolan)을 떠올리게 한다. 1922년을 배경으로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이면을 다루는 이 영화는 격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더블린을 배경으로 1922년의 어느 날 12시간 동안 전개된다. 배신자를 처형하지 않아 아일랜드 해방군에서 축출된 지포 놀란은 여자 친구 카티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하는데 필요한 20파운드를 받기 위해 자신의 친구이자 아일랜드 해방군의 대장인 프랭키를 영국군에게 밀고하고, 프랭키는 체포되는 순간 사살된다. 그러자 그는 죄책감에 술에 젖어 살고, 해방군 옛 동료들은 그의 행동과 낭비를 수상하게 여기고, 마침내 그를 심판하여 처형한다(Fernández Ferrer 2009, 252).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퍼거스 킬패트릭과 놀란이라는 작중인물들의 이름 역시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의 내용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언어의 미신’은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가 수록된 『픽션들』의 제목이자 ‘픽션’에 대한 보르헤스의 생각과 연관된다. 이 개념과 관련하여 카터 휠록(Carter Wheelock)은 한스 파이잉거(Hans Vaihinger)를 언급하면서, 픽션에 대한 그의 생각이 보르헤스와 부분적으로 일치한다고 지적한다(Wheelock 1969, 25-26). 그는 『알스오프10)의 철학』에서 새로운 범주를 도입하여 허구의 중요성을 연구했다. 오랫동안 허구는 보조적 역할만 수행했었고 순수하게 비현실적인 예로 여겨졌었지만, 파이잉거 이후 허구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현상에 대한 허구적 설명을 하고 이런 허구적 설명 방법이 실재를 반영한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 근거를 찾는 전략으로 이해된다. 한편 파이잉거는 보르헤스의 대표적인 단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등장한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이 독일철학자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고 고백한다(Dapía 1992, 423).

보르헤스에게 존재하는 허구의 개념 혹은 ‘언어의 미신’은 프리츠 마우트너(Fritz Mauthner)가 전개한 이론과 관련하여 해석될 수 있다. 그는 파이잉거의 알스오프의 철학을 깊이 연구하여, 그의 『철학사전』에서 한 장을 할애한다. 그것은 보르헤스가 “수없이 읽었고 필사한 각주에 압도된”(Borges 1974, 276) 다섯 책 중의 하나이다. 마우트너는 언어란 도구이며 인간은 이 도구를 가지고 장난하는 것이며, 그래서 언어란 말을 할 줄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는 놀이, 즉 사회적 놀이라는 개념 아래서 언어가 허구를 잉태시킨다고 말한다. 마우트너에 의하면, 인간은 중세 신학을 ‘죽은 지식’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며, 수많은 개념이 학문의 역사 속에서 노화된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대인들의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개념을 의문시하려고 하지 않으며, 언어가 현실과 그 어떤 상응관계도 없는 소리나 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Dapia 1992, 423). 그러면서 그는 과학과 종교, 사회와 정치의 영역에 거짓 개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에 의해 문학작품으로 만들어졌고, 셰익스피어의 번역자인 놀란은 셰익스피어를 그대로 베껴서 현실의 ‘각본’을 만들고, 이런 현실은 역사가 된다. 그러나 놀란은 그런 역사의 허구적 성격을 보여주는 흔적을 남기고, 라이언은 킬패트릭의 역사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거짓 현실임을 밝혀낸다. 하지만 라이언은 영웅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거짓 현실이 실제 현실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날조된 이야기를 만들면서, 영웅의 영광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한다. 이렇게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는 현실 혹은 역사와 문학의 상호관계를 다루면서, 마우트너의 허구에 대한 생각, 그러니까 언어의 미신이라는 개념을 잘 보여준다. 즉,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만들고, 이런 추상성을 객관화시키려는 인간의 경향은 위험한 혼란의 기원이며,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속임수의 근원임을 밝혀준다(Dapia 1992, 425).


Ⅵ. 보르헤스의 상호텍스트성: 불가능한 확실성

보르헤스는 환상문학의 대가였고, 그가 살았던 시대를 앞서간 이론가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문학에서 상호텍스트성을 작품 속에서 본격적으로 구현한 작가이다. 그는 그리스 신화를 다시 썼고, 가우초들의 싸움을 묘사하기도 했으며, 포와 체스터턴을 패러디했으며,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 유다를 구원자로 소개하기도 했고, 실제로는 배신자인 아일랜드의 영웅을 창조했으며, 신학자들을 이단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렇게 과거의 텍스트를 흡수하여 변형하는 그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은 일찍부터 나타난다. 『불한당들의 세계사』(1935) 초판본 서문에서 보르헤스는 자신의 “소설 연습”(Borges 1974, 289)과 관련된 텍스트들을 언급한다. 그리고 1954년 판본에서는 “단편소설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고 타인의 이야기들을 날조하고 얼버무리면서(미학적 정당화 없이) 즐기는 소심한 사람의 무책임한 놀이”(Borges 1974, 289)라고 보다 명확하게 밝힌다. 이런 생각은 보르헤스의 ‘서사 기술arte narrativo’로 발전하고, 상호텍스트성은 바로 이런 기법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보르헤스에게서 상호텍스트의 의미는 무엇일까? 보르헤스는 여러 작가를 인용하면서, 상이하거나 심지어는 상반되는 이론을 언급한다. 물론 그의 작품에는 허구적 성격의 인용문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주제」는 표절과 배신을 통해 창조적 행위가 탄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거짓이지만 아름다운 영웅의 전기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현실의 해석이나 가정에 관한 것을 다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인용의 기능은 확실한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 다양성을 통해 세상은 무한한 해석을 인정하면서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글쓰기 방식에서 이루어지는 상호텍스트성 이외에도, 보르헤스는 그것을 독자 지향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문학은 작품 그 자체보다 작품을 읽는 방식에 따라 이전과 이후의 작품과 구별된다. 만일 우리가 현재의 글을 2000년에 읽을 것처럼 읽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2000년에 문학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Borges 1974, 747) 상호텍스트성의 알파와 오메가로 사용된 보르헤스의 이 말은 이 용어가 주조되기 이전에 이미 그의 문학에 대한 생각도 흡사했으며, 그의 작품이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작품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려고 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독자의 상호텍스트에 따라 그 관계가 해석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Acknowledgments

* 이 논문은 2014년도 울산대학교 연구비에 의해 연구되었음.

Notes

1)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관해서는 Panagiotidou(2011)의 논문 pp. 2-11을 참고할 것.
2) 이 작품과 역사와의 관련성을 연구한다면, 아마도 19세기 아일랜드의 실패한 독립전쟁의 역사를 연구하고, 백 년 이후에, 즉 아일랜드 공화국 창설과 아일랜드의 32개 주 중에서 남부 26개 주가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하고 북부의 6개 주는 영국의 연합주로 남아있게 된 독립 전쟁 중에 누가 국민적 영웅이자 신화가 되었는지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이 연구의 대상이 아님을 밝힌다.
3) 보르헤스의 이 작품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살해가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극작품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등장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4) 「모든 것과 하나도 아닌 것Everything and Nothing」에서 보르헤스는 창조의 신으로서 셰익스피어와의 관계를 이렇게 요약한다. “죽기 전이나 후에 그는 하느님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헛되이 그토록 많은 사람이었던 저는 이제 한 사람, 즉 제가 되고 싶습니다.> 회오리바람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나 또한 내가 아니다. 나는 네가 네 작품을 꿈꾸었던 것처럼 세상을 꿈꾸었다, 셰익스피어야. 그리고 내 꿈의 형상들 사이에 나처럼 수많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 누구도 아니었던 네가 있었다.>”(Borges 1974, 804)
5) 일반적으로 비평가들은 인유와 인용 연구를 통합시키면서 상호텍스트성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텍스트들의 관련성을 다양하게 논의했다. 따라서 상호텍스트성은 다른 작품을 포함하고 있거나 다른 작품에 포함된 텍스트들을 설명하는 포괄적인 용어가 되었다.
6) 대표적인 글로 「탐정소설의 미로와 체스터턴」, 「G. K. 체스터턴의 방식」을 들 수 있다. 이 글들은 『<남쪽> 잡지에서의 보르헤스Borges en Sur』(Buenos Aires: Emecé, 1999)에 수록되어 있다.
7) 이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 속에 가을 숲의 색깔보다 더 당황스럽고 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더 이름 없는 색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 각자가 혼합되거나 변화되거나 통합되면, 불평과 비명의 자의적 체계에 의해 정확하게 표현된다고 진지하게 믿는다. 그는 평범하고 교양 있는 증권 중개인이 내면에서 모든 기억의 미스터리와 모든 욕망의 고통을 의미하는 소음을 나오게 한다고 믿는다.”(Borges 1974, 672, 709, 745) 이 인용문은 「네대니얼 호손」, 「존 윌킨스의 분석언어」, 「알레고리에서 소설로」에 등장한다.
8) 이것에 관해서는 Rest, Jaime(1974), El laberinto del universo, (Buenos Aires: Librerías Fausto), Berveiller, Michel(1973), Le cosmopolitisme de Jorge Luis Borges, (Lille: Didier)를 참고할 것.
9) 라이프니츠는 두 개의 시계에 대한 아르놀트 횔링크스Arnold Geulincs(1624-1669)의 예를 사용한다. 두 시계는 같은 시간에 맞춰져 있고, 따라서 매 순간 정확하게 같은 시각을 가리킨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첫 번째 대답은 두 개의 시계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시계가 다른 시계에 영향을 주어 항상 같은 시각을 알리도록 뒤에서 조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다른 대답은 두 시계 모두 애당초 빈틈없이 정교하게 제작되어 독립적으로 작동하지만 매 순간 정확한 시각을 알려준다고 답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마지막 대답이 가장 설득력 있고, 이 우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주장이다.
10) ‘마치~처럼’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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