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itute of Iberoamerican Studies
[ Article ]
iberoamerica - Vol. 19, No. 1, pp.41-67
ISSN: 1229-9111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30 Jun 2017
Received 26 Apr 2017 Revised 05 Jun 2017 Accepted 19 Jun 2017
DOI: https://doi.org/10.19058/iberoamerica.2017.19.1.41

안데스 원주민 운동과 공동체 경제: 에콰도르 사례를 중심으로

김항섭**
**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 marume5743@hanmail.net
Andean Indigenous Movements and the Communitarian Economy: Focusing on the Ecuatorian Case
Kim, Hang-Seob**

초록

This article is to analyze what is the main impetus of the andean indigenous movements principally after the 1990s, and what relation does the traditional communitarian economy have with this impetus. Inca Empire was the society based on the reciprocal economic activities. These activities were reinforced because of the vertical network of reciprocity, according to the geographical dissemination of Ayllu members.

But the communitarian economic system was distorted and weakened in the colonial oppression and exploitation. In th face of these difficulties, the indigenous people directed their efforts toward the substantiality of this economic system through their strategy of ‘resistance in adaption’. In 1937, the existing indigenous ‘Comunidad’ btained the new legal status, that is, ‘Comuna’. But the communitarian, reciprocal economic activities of Comuna were threatened again and in the more serious manner, with the capitalization of the rural areas, promoted by the name of the Land Reform in 1964 and 1973, and the neoliberal adjustments during the 1980s and the 1990s.

In the 1990s, the indigenous people reacted to these threats as massive revolts. In this process, the communitarian economic thoughts served as a mediator to organize resistance and mobilize people against the neoliberal capitalization, after all producing the New Constitutions in the 2000s, that accepted the indigenous traditions and values as their fundamental principle.

Abstract

이글은 1990년대 이후 안데스 지역의 원주민운동을 가능케 한 주된 추동력을, 원주민 고유의 공동체 경제와 관련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이 공동체 경제는 전근대 사회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나, 잉카 사회의 경우, 씨족 공동체의 지리적 산포에 기반을 둔 ‘수직적 호혜망’ 때문에 더욱 더 강조되었고, 경제적 차원을 넘어 사회 각 분야를 구성하는 주요한 원리로 작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 경제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크게 왜곡되고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은 식민 지배에 대해, 나름대로 ‘적응 속의 저항’ 전략을 통해 공동체적 가치와 그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937년 원주민 공동체는 ‘코무나’라는 법적 지위를 획득하면서, 이러한 노력을 보다 더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무나의 공동체적, 호혜적 경제활동은 60년대와 70년대의 농지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농촌의 자본주의화, 그리고 80년대와 9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다시, 더 심각한 형태로 위협을 받는다.

이러한 위협에 대해, 원주민들은 90년대 들어 대규모 봉기로 대응한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 경제 사상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항하는 저항을 조직하고 사람들을 동원하는 주요한 매개 역할을 수행하고, 원주민적 전통과 가치를 기본 원리로 삼는 제헌헌법으로 결실을 맺었다.

Keywords:

Inca Economic Life, Indigenous Movements, Ecuador, Communitarian Economy, Land Question

키워드:

잉카 경제 생활, 원주민운동, 에콰도르, 공동체경제, 토지 문제

Ⅰ. 서론

최근 들어 라틴아메리카, 특히 안데스 지역의 원주민 운동이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500여년 지속된 억압과 차별의 구조를 극복하고, 복수국민국가를 구축하는 주요 원리로서 원주민적 전통과 가치에 주목하고 이를 복원하려는 혁명적 변화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 제기된다: 그렇게 기나긴 억압과 착취의 세월을 딛고 어떻게 그러한 혁명적 변화를 일궈낼 수 있었는가? 그러한 변화를 가능케 하고 또 추동해온 근원적 힘과 요인들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은 에콰도르 원주민운동에 대한 필자의 앞선 논문(김항섭 2013)과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앞선 논문은 비교적 단기적 관점에서, 에콰도르 원주민운동이 폭발적으로 등장한 90년대 직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1970년대와 8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에 풍미했던 해방신학과 진보적인 그리스도교적 실천들과의 관련 속에서 이 운동을 살펴본 것이라면, 본 논문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타완틴수유의 공동체적 전통과 가치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이러한 계승과 발전에 있어서 특히 공동체 경제(economíacomunitaria)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왜냐하면 공동체 경제는 원래 안데스 원주민의 삶이나 운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정치학자인 실비아 페데레치(Silvia Federici)의 논의에 따른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라는 라틴아메리카적 맥락에서 현재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페데레치는 근대 자본주의 태동 과정에서 나타난 반(反)인클로저 운동에 주목하면서, 농민들이 인클로저 운동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저항했던 이유는 그것이 농민들의 삶과 연대의 토대였던 공유지나 공동체적 삶을 근본적으로 침해하고 위협했기 때문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자본가들은 공유지를 게으름과 혼란의 원흉으로 단죄하면서 인클로저 운동에 박차를 가했지만, 이 운동의 희생양이 된 공동체적 농경지, 즉 목초지, 숲, 호수, 방목지 등과 같은 공유지나 공동 경작 체제는 농가를 흉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등 재생산에 필수적이고, 자치에 기초한 민주적 생활방식과 집단적 의사결정을 촉진하며, 농민들이 서로 연대하고 어울릴 수 있는 물질적 토대였다. 특히 토지에 대한 권리나 사회적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소농이나 소작인, 여성에게 생존, 독립,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더 긴요한 것이었다(페데리치 2011, 113-115).

페데레치는 공유지에 관한 이러한 기억이 단지 과거의 것이 아니라, “연대에 기초하고 재화를 공유하는 세계에 대한 전망”(페데리치 2011, 50)을 투사하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나이지리아에서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투쟁은 토지사유화와 ‘인클로저’, 즉 공유지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마저 울타리를 치는 행위에 대한 오래된 저항의 일부”이고, “이런 투쟁은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자본주의가 시작되던 16세기부터 존재했다.”(페데리치 2011, 24)고 주장한다.

페데리치의 이러한 논의는 안데스 지역의 공동체 경제나 토지 문제,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원주민운동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시사점을 준다.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잉카 제국으로부터 공유지와 공동체적 삶에 기반을 둔 경제생활을 물려받았다. 이러한 경제생활은 스페인의 정복과 식민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억압받고 왜곡되었을지라도, 나름의 방식대로 그 틀을 유지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20세기 들어와서 농촌 경제의 시장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앞에서, 이러한 경제 형태와 생활은 보다 더 심각한 위협을 받았으나, 원주민들은 공동체적 삶, 다시 말하면 ‘연대에 기초하고 재화를 공유하는 세계’에 대한 전망과 상상력으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을 통해 이 위협에 맞서 투쟁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페데리치의 이러한 논의에 바탕을 두면서, 에콰도르의 원주민 운동을 중심으로, 잉카 시대에 공동체 경제, 그리고 이 경제의 중심이 되는 토지가 어떤 역할이나 의미를 가졌는지,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의 역할과 의미가이후 식민 과정 또는 독립 이후 과정에서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살펴보고자한다. 나아가 원주민들이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대응했고, 특히 20세기의농지 개혁이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이 문제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이에 원주민들은 어떻게 저항하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 경제에 기반을 둔, 연대와 공유의 삶의 기억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잉카 시대의 공동체 경제와 토지

오늘날 우리는 시장교환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경제에 익숙해진 탓에, 이와 다른 경제 형태를 상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시장을 매개로 재화와 노동을 교환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교환은 인류의 긴 역사에서 보면 수백 년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칼 폴라니를 비롯한 일부 경제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시장교환이 지배적인 경제 형태가 되기 이전에는, 호혜나 재분배 형태가 전근대 사회의 경제생활을 조직하는 데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

간략하게 말하면, 호혜(reciprocidad)는 친족, 인척, 지연 등을 통해 행해지는 상부상조적 경제활동이고, 재분배(redistribución)는 왕과 같은 중앙의 수장이 종교 의례를 통해 귀족, 마을이나 지역의 지배자, 촌장 또는 관련된 사람들로부터 선물이나 공물을 받고, 그 부의 일부를 군중에게 다시 되돌려 분배하는 형태이다.

칼 폴라니에 따르면, 원시 사회는 호혜 중심의 사회이고 고대 사회는 재분배 중심의 사회이다(신이치로우 2000, 71-75). 그러나 이는 한 사회의 주도적인 경제 형태를 말하는 것이지, 여러 형태들 사이의 배타적이거나 대립적인 의미가 아니고, 또는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발전을 뜻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한 사회에는 여러 가지 경제 형태들이 병존하고, 다만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주도적이냐에 따라, 비시장사회(호혜 사회, 재분배 사회), 또는 시장사회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1. 잉카 사회와 공동체 경제

이러한 경제인류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유럽인들의 침략을 받기 이전의아메리카 대륙은 비시장사회, 다시 말하면 호혜나 재분배가 경제활동의 중심축을 이루는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잉카는 이전 문화의 호혜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안데스 지역에서 강력한 중앙 권력을 형성함으로써 재분배 원리가 작동하는 사회였다.

잉카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Inca Garcilaso de la Vega), 펠리페 과만 포마 데 아얄라(Felipe Guaman Poma de Ayala) 등과 같은 대다수 16세기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잉카 제국은 탄탄한 사회경제적 구조를 갖고 있었고, 중앙 정부가 주민들의 삶과 노동에 깊이 관여하고 통제하였다(롱게나/알바 2004, 81).

그 근거로 특히 공정한 분배, 풍부한 농업과 목축 생산, 그리고 광대한 도로망으로 전(全)제국에 걸쳐 구축한 저장 체계와 이를 가능케 한 조직화, 효율적인 행정, 노동에 대한 정확한 보상 등을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경제적 구조를 통해 무엇보다도 가난을 해소하고, 굶주림을 극복하였다고 강조한다(Pease G. Y. 1994, 57).

그러나 이러한 가난 극복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은 한 것은 폭넓은 호혜적 교환망(intercambios recíprocos)이다. 여기서 교환은 기본적으로 재화의 교환이 아니라, 친족 집단의 인간 에너지를 활용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Pease G. Y. 1994, 59-60). 다시 말하면 친족관계망에 토대를 둔 연대나 유대를 통해 가난을 극복한 것이다.

이러한 친족관계망을 안데스 지역에서는 ‘아이유’(Ayllu)라 부른다. 아이유는 씨족 공동체로서 잉카 사회 조직의 토대이고 핵심이다. 따라서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기본적으로 농업사회였던 잉카 제국에서 성인 남자는 결혼과 더불어 ‘토포’(topo, 또는 tupu)라 불리는 경작지를 아이유로부터 지급받는다. 물론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경작권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토지의 소유권은 아이유에 속한다. 잉카 제국에 속한 안데스 지역에 수만 여개의 아이유가 존재했었다(어튼 2003, 15). 개인이 지급받는 토지의 크기는 비옥도, 자식의 수 등 여러 조건에 따라 다양하고, 보통 50세까지 경작권을 갖는다. 수확물은 가족이나 친척을 부양하는 데 쓰고, 그 나머지는 황제에게 공물로 바친다(롱게나/알바 2004, 82).

아이유의 구성원들은 노동력의 호혜적 교환을 통해 생계에 필요한 것들을 확보한다. 예를 들어, 결혼을 앞둔 부부의 집을 공동으로 짓거나, 군역이나다른 공공사업에 동원된 구성원들을 대신하여 그 집안의 농사를 짓고 생계를 지원하였다. 또한 몸이 아프거나 불편할 경우, 이러한 관계망을 통해 일손을 빌리거나 원조를 받을 수 있다(롱게나/알바 2004, 83).

이러한 호혜적인 노동 형태에는 ‘야니’(ayni)와 ‘밍카’(minka 또는 minga)가 있다. 먼저 야니는 농사일을 하거나, 가축을 돌보거나, 집을 짓거나, 또는 지붕을 이기 위해 아이유 성원들이 상호 부조하는 노동형태를 말하고, 밍카는 아이유의 모든 성원들이 공동체를 위해 하는 노동, 예를 들어 창고를 짓거나, 길이나 다리를 놓는 공동 노동을 말한다. 이처럼 집단적으로 이뤄지는 노동에는 이러한 호혜적 노동 외에도 재분배와 관련된 노동이 있는데, ‘미타’ (mita)가 바로 그 경우이다. 이는 아이유의 성원들이 국가를 위해 하는 노동으로, 국가는 이러한 노동을 통해 생산된 재화를 ‘콜카’(colca)라 불리는 국가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그 중 일부를 재분배에 사용한다. 아이유의 성원들은 국가의 특정 노동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일정한 기간 동안 교대로 참여한다. 예를 들면 계단식 논밭을 조성하거나, 옥수수를 경작하거나, 또는 직물을 운반하는 데 이 노동을 활용한다(Chero, s/d, 10).

이처럼 잉카 제국의 경제 구조를 이루는 한 축이 호혜라면, 다른 한 축은 재분배이다. 재분배는 위계를 전제하면서 두 가지 차원에서, 즉 한편으로 아이유의 차원에서,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차원에서 작동한다.1) 다시 말하면 아이유는 노동을 통해 획득한 재화들을 국가 창고로 모으고, 이 재화는 나중에 필요에 따라 아이유들 사이에 재분배되며, 이런 식으로 재화의 분배와 순환이 이뤄진다.

잉카 사회의 호혜적 삶은 아이유 구성원들의 거주지가 지리적으로 한 곳에 집중되어 인접하지 않고, 다양한 생태적 환경에 산포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강조된다. 즉 거주지가 불연속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는데, 일부는 중간 고도 지역, 다른 일부는 높은 툰드라 지대, 또 다른 일부는 산간 계곡, 해안 지역, 열대우림 지대 등 저지대에 거주한다.

이처럼 거주지가 산포되어 있는 이유는 잉카 사회가 아이유에 단 하나의 집적된 대규모 경작지가 아니라,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토막 땅(pedacitos)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지어 가족들조차 서로 다른 자연 풍경과 생태적 지위(nichos ecologicos)에 흩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아이유나 가족은 기후의 이점과 불리한 점을 동등하게 공유하고, 아이유의 경제는 이처럼 생태학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나오는 자원을 서로 교환하면서 호혜적인 삶을 산다(Contreras 2010, 332; 어튼 2003, 15).

2. 소유권과 토지

잉카 사회에는 다양한 유형의 소유권이 존재했다. 첫 번째는 부동산 소유권으로 땅, 건물, 길, 다리, 샘, 수로, 나무 등과 관련된 권리이다. 두 번째는 노동 도구, 무기, 기타 가정용품의 소유권, 세 번째는 식량, 가축, 원자재, 광물, 금속, 도자기, 소금 등 저장ㆍ보관 제품의 소유권, 네 번째는 관개용수 사용권, 다른 아이유 소유의 숲에서 땔나무를 채취할 권리와 같은, 아이유가 물려받은 용익권, 다섯 번째는 중앙의 귀족이나, 지역이나 마을의 수장인 쿠라카(Kuraca) 등 권력자들이 타인의 노동에 대한 갖는 특권적 권리, 여섯 번째는 노래, 춤, 수제품(hechizos), 공예품 등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가 있다(Contreras 2010, 317-321).

이러한 소유권은 대부분 집단적 소유 형태이고, 소유의 주체에 따라 크게 네 가지 형태가 존재했다. 국가의 소유, 잉카의 소유, 신들의 소유, 아이유의 소유가 그것이다(Contreras 2010, 333). 이러한 소유 형태를 토지에 적용하면, 국유지, 잉카의 토지, 종교용 토지, 아이유의 토지가 있는 셈이다.

아이유 소유의 토지는 아이유가 공동체적으로 관리하는 토지이다. 이 토지는 쿠라카에 의해 아이유 성원들에게 분배되어 경작된다. 이러한 분배에는 토지만이 아니라 목초지, 샘 등도 포함된다. 성원들에게 분배되는 ‘토포’라불리는 토지는 토지의 질과 생산성, 그리고 기후에 따라 그 규모가 달랐다. 예를 들어 척박한 고지대에 있는 토포는 더 규모가 크고, 이와 달리 비옥한 저지대의 토지는 그 규모가 작았다.

국유지는 대부분 국가가 아이유로부터 땅을 받아, 계단식 경작지나 관개수로를 만들어 생산성을 높인 새로운 경작지이다. 이 땅은 ‘미타’라 불리는 재분배적 노동을 통해 경작되고, 여기서 수확한 것은 ‘콜카’에 저장되며, 이 국가 창고는 쿠라카 또는 국가의 대리인들이 관리한다(Contreras 2010, 326). 이창고 저장물은 재분배에 활용된다. 예를 들어, 국가 대리인들의 생계를지원하거나, 국가에 노동력을 제공했던 이들에게 보상을 제공하거나, 또는 예비 자원으로 활용한다.

잉카의 토지는 잉카에 속한 토지이고 왕실(panaca)에서 관장한다. 이 토지는 잉카와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한 것이고, 쿠스코 근처에 자리한다. 미타를 통해, 또는 황제나 국가의 공복(公僕, yanaconas)에 의해 경작된다. 또한 잉카가 아닌 그의 왕실 파나카에 직접 속한 토지도 있다. 종교용 토지는 주로 신전과 종교 의례에 소요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배정된 토지로, 관련 사제의 책임 하에 관리된다. 예를 들어 태양신의 토지는 태양신에 봉헌된 사원을 유지하고, 관련 사제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쓰인다.

토지 외에도 경제생활에 긴요한 다양한 자원들이 국가적, 또는 공동체적으로 관리된다. 광산은 국가 소유인 반면 물, 숲, 염전 등은 해당 아이유에 속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아이유와 공유하기도 한다. 바다나 구아노(islas guaneras)가 많이 나는 섬 같은 경우는 해당 종족의 소유로 인정된다(Contreras 2010, 326).

이처럼 공유지 또는 공유재에 대한 소유권은 안데스권에서 주요한 라마, 알파카 등 낙타과 동물(camélidos)에도 적용된다. 각각의 아이유는 이 가축들을 위한 목초지를 소유하고, 국가 또한 관련 가축 떼를 기를 땅을 소유한다(Chero s/d, 11). 물론 국가의 가축도 앞서 본 바와 같이, 아이유 성원들이 미타 노동을 통해 돌본다. 나아가 태양신 의례와 관련된 공물과 희생 제물로 바칠 가축을 위한 목초지는 종교용 토지로 할당된다.

이처럼 아이유가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토지, 목초지, 숲 등 공유지는 이에 대한 조상의 권리(derecho ancestral)를 계승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조상의 권리를 세우고 보존하기 위해 다양한 유형의 신화, 전설, 믿음 등이 형성된다. 그 내용을 보면, 흔히 아이유의 창립자가 그 권리와 관련된 곳에 머물렀고, 그 뒤 높고 큰 돌기둥(비석)으로 변했으며, 이런 식으로 해당 아이유의 권리와 지배가 정당하다는 식으로 이야기된다. 아이유의 이러한 권리는 또한 아이유 최초의 조상들의 기원 장소로 신성시되는 동굴, 호수, 연못, 샘 등 파카리나(pacarina)에 대한 예배와도 깊은 관련을 갖는다(Contreras 2010, 331-332).

스위스 출신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에스테르만(Josef Estermann)은 잉카의 핵심적 사유로 ‘관계의 원리’(principio de relacionalidad)를 상정한다.

모든 삶, 모든 행위, 모든 지식의 근본 원리는 관계이다. 관계없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이러한) 다양한 관계 체계는 삶, 윤리, 그리고 지식(인식)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주체의 초월성은 순전히 외면적인 것이고, 특수한 인간의 주권(soberanía)는 자기기만이다. 관계없이 개인은 없다. 초월적 원리(arché)로서 관계성은 모든 차원에서,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Estermann y Peña 1997, 10)

에스테르만은 이러한 관계의 원리라는 맥락에서, 잉카 경제의 구성 원리로서의 호혜를 자리매김한다. 이 관계의 원리는 만물이 만물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의미에서 ‘총체성의 원리’(principio holístico)라고도 한다. 이 원리는세 가지 방식, 즉 ‘상보성’(complementariedad), ‘조응’(correspondencia), 그리고 ‘호혜’(reciprocidad)로 표출된다(우석균 2014, 51-53). 조응은 현실의 서로 다른 측면, 지역 또는 장(場)들이 서로 조화롭게 조응한다는 것이고, 상보성은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이 한 차원 더 높은 개체 또는 완전한 개체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며, 호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 사이에 상호행위가 있어야 함을 뜻한다.


Ⅲ. 식민 지배, 그리고 농지 개혁

1. 식민 지배와 공동체 경제의 변형

관계의 원리를 기반을 두고, 아이유를 중심으로 이뤄진 잉카인들의 공동체적 경제생활은 스페인에 의한 침략과 식민화 과정을 거치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여기서는 페루의 5대 부왕으로 취임한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Francisco de Toledo, 1569-1581년)의 개혁을 중심으로 이러한 변화 과정을 분석하고, 그것이 앞서 서술한 공동체적 경제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톨레도는 식민정부의 통제력을 극대화하고, 원주민을 광업에 끌어들이기 위한 포석으로서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시도하였다. 선교, 징세, 노동력 동원의 편의를 위해 고산지대 원주민들을 더 낮은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 레둑시온(reducción) 정책으로 고산 지대의 지리적 공간을 총체적으로 개편하였고, 전통적인 씨족 집단인 아이유를 스페인 방식의 마을 형태에 따라 원주민 공동체(comunidad)로 변형시켰다. 이는 무라(John V, Murra)가 ‘수직적 제도’(vertical archipelago)라 이름 붙인 안데스 고유의 제도의 해체를 의미했다(강정원 2014, 178-179).

이 제도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서로 다른 고도와 환경을 가진 생태 지역을 호혜의 원리로 결합한 것이었으나, 식민 정부에 의한 강제 이주와 그에 따른 거주지 조정으로 이러한 수직적 호혜관계망이 크게 흔들린다. 그로 인하여 공동체적이고 자급자족적 경제 기반이 약화되고, 농민들은 광산 노동에 강제 편입, 동원되었다.

이러한 개편 결과, 아이유는 획일적으로 근거리에 집중된 거주 지역으로 재편되고, 따라서 상이한 생태지역들을 연계하면서, 호혜적이고 자급자족인 교환과 그에 바탕을 둔 전통적 경제생활이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이 안데스 지역에 오랫동안 유지해 온 원주민들의 공동체적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흔들어놓지는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은 공유지, 친족관계 등 아이유의 전통적인 관행과 가치를 대부분 유지하였다(강정원 2014, 183).

또한 톨레도의 개혁 정책은 원주민들을 광업에 강제 동원하면서, 이들을 인종이나 종족에 따라 거주지를 분리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 정책도 오히려 원주민 광부들이 자신들의 출신 공동체와의 결속력을 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원주민들을 강제 동원하는 미타제도는 원주민들이 일정 정도 스페인 자본주의 체제에 동화되는데 촉매 역할을 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원주민들이 물질적으로, 정서적으로 자신의 출신 공동체와 결속을 다지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강정원 2014, 195- 196).

이러한 역설적인 결과는 스페인 식민정부가 원주민적 요소들을 식민정책에 적극 도입, 활용한 것과도 관련 있다. 예를 들면, 식민정부는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정복 이전의 원주민 사회에 고유한 호혜의 원리를 차용한다. 이는 원래 식민 사업에 소요되는 비용을 절감하고, 원주민 사회의 위계나 도덕적 원리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이 사회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통치하려던 것이었으나(강정원 2014, 197-198), 다른 한편으로 원주민적 요소들을 보존하고 지속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나아가 식민 지배에 대한, 원주민들의 모호하고 이중적인 태도도 이러한 결과에 일정 정도 이바지하였다. 즉 원주민들은 자신의 이해나 관심사를 앞세워 식민 정책의 합법성을 적극 이용하는 법적 적응 행위를 보였다. 더구나 효과적인 지배와 통치를 위한 식민 정부의 레둑시온 정책에 대해, 원주민들은 디아스포라적 역동성으로 대응하였다. 즉 자기 마을을 떠나 다른 마을, 광산도시, 계곡, 아시엔다 등에 몸을 숨겼다. 스페인의 역사학자 글라베(Luis Miguel Glave)는, 원주민들의 이러한 대응과 태도를 식민정부의 지배 전략에 대처했던, 일상적인 저항 전술 형태로서 ‘적응 속의 저항’(reistencia en adaptacion)이라 불렀다(Glave 2005, 56).

2. 독립에서 농지개혁까지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원주민들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그에 따라 원주민의 저항도 계속 이어졌다. 독립 전쟁 과정에서, 아메리카땅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백인인 끄리오요들(criollos)은 자신들을 스페인정복자들과 차별화하면서, 스스로 원주민의 옹호자로 자처하고,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인에 대한 억압적 식민 지배에 의문을 제기했다. 원주민들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다른 시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주겠다는 끄리오요들의 약속에 따라, 많은 원주민과 농민 집단은 독립 전쟁에 가담했다. 그러나 끄리오요들은 독립을 쟁취하자마자, 식민지의 계급 사회를 계승하고, 국가와 교회를 통해 인종적 차이를 재생산했다(Porras Velasco 2005, 84).

유럽계몽주의의 영향 아래 진행된 국민국가 건설 과정이 끄리오요-메스티소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원주민들의 차별과 소외는 더욱 굳어진다. 1857년 원주민에게 부과하던 세금(tributo)을 폐지하고, 인종 관련 행정이 국가에서 아시엔다, 교회, 시청 등에 이양됨에 따라, 원주민들은 국가의 각종 법전(códigos), 법령, 규정 등에서 사라지고, 원주민의 이러한 사회적 은폐(ocultación)는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진다(Porras Velasco 2005, 86).

그러나 1930년대 좌파 정당이 형성, 발전하면서, 그 영향 아래 원주민의 저항과 운동도 조직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이 원주민운동은 에콰도르의 경우 크게 보면 세 시기에 걸쳐 전개된다. 첫 번째 시기는 1930년대부터 제1차 농지개혁이 실시된 1964년까지로 원주민 투쟁 거점을 조직하고 통일했던 통합기(período de unificación)이다. 두 번째 시기는 과도기(período detransición)로, 1964년부터 제1차 원주민 대규모 봉기가 일어난 1990년까지이고, 세 번째 시기는 1990년 이후 이른바 복수국민 국가(Estado plurinacional) 건설 시기이다(Simbaña 2009, 154).

첫 번째 시기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첫째, 1937년에 ‘코무나’ 법(Ley de Comunas)을 제정하고, 그와 더불어 도시 행정을 담당하는 제한적 자치 기구로서, ‘카빌도’(cabildo)를 설립한 것이다(김기현 2012, 83). 둘째, 1944년 에콰도르노총(CTE) 산하에 에콰도르원주민연맹(FEI)이란 단체를 창립한 것이다.단명한 진보적인 정부가 1937년에 법으로 설치한 코무나는 원주민 농촌 부문의 독창적이고 전통적인 형태를 공인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코무나는 사실상 잉카 제국의 기본 사회 단위인 아이유에 상응하는 것이었다(Sánchez-Parga 2010, 21). 이후 코무나는 농촌 지역의 정치적, 행정적 기본 단위가 되었다. 원주민 공동체들은 코무나를 통해, 외부와의 관계에 있어서, 메스티소 농민들과 동일하게 법률적으로 인정받게 됨에 따라, 이 새로운 법적 제도를 채택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코무나는 안데스 산지에서 가장 일반화된 집단 모델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코무나는 점차 원주민적 가치, 방식과 실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정치적 대표성을 갖고 권익 옹호에 앞장서며, 재생산에 필요한 기본 자연자원과 여타 필요 자원을 사회적으로 관리하고, 정체감을 부여하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응집력을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 공동체 조직으로 코무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에콰도르의 경우, 1993년 기준 농촌 조직 형태를 보면, 코무나가 54%, 협동조합(cooperativas)이 24%, 협회(asociaciones)가 22%이다. 그러나 원주민이 지배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에 제한시켜 보면, 코무나 비율이 좀 더 높아진다(64.2%)(Martínez V. 1998, 3).

이처럼 원주민들은 코무나를 매개로 집결되고, 1944년에 에콰도르원주민연맹(FEI)이 창립되면서 원주민들의 다양한 요구와 동원을 집약한다. 이 시기의 주된 요구는 무엇보다도 토지 문제이다. 에콰도르원주민연맹은 또한 ‘와시풍고’(huasipungo)2)나 다른 반봉건적 노예 노동 형태의 종식을 요구한다(Porras Velasco 2005, 92).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응답하여, 정부는 1964년 농지개혁을 단행된다. 여기서 두 번째 시기, 즉 과도기가 시작되어 1990년 제1차 원주민봉기까지 이어진다. 농지개혁은 1964년과 1973년 두 차례 이뤄진다. 이전에도 예를 들면, 1936년에 ‘불모지와 개간(開墾)촉진법’(Ley de Tierra Baldías y Colonización)을제정하고, 1957년에 ‘개간청’(Instituto Nacional de Colonización)을 설립하는등 농지개혁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1964년의 농지개혁법은 이러한 노력들과 달리, 농촌의 구조적 개혁을 지향했고, 농지개혁을 개간과 연계 지었다(Gondard y Mazurek 2001, 16).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지역에서 농지개혁이 실시되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특히 정치적 요인이 이러한 개혁을 촉진하였다. 즉 미국은 쿠바 혁명으로 현실화된 공산주의 체제의 확산을 막기 위해, ‘진보동맹’을 내세워 라틴아메리카 각국에 농지개혁을 적극 권장, 지원하였다.

에콰도르의 경우 1964년 첫 번째 농지개혁을 단행한다. 당시 군사정부는 미국의 진보 동맹에 발맞춰 농민봉기에 대처하고 에콰도르 농업을 세계시장에 편입하고자 했다. 또한 국경농업을 확대하여 지방 중산층을 형성하고, 전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타파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축소하고자 하였다. 정부는 이를 위해 ‘농지개혁과 개간청’(Instituto de Reforma Agraria y Colonización, IERAC)을 설치하였다(김달관 2010, 35-36).

두 차례의 농지개혁은 기본적으로 발전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던 군부에 의해 주도되고 수행된 미완의 것이었지만, 에콰도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먼저 기존 경제 체제의 근간인 아시엔다를 해체했다. 원주민들은 아시엔다체제로부터 풀려나면서,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역사적 공동체를 재구성하고, 이 공동체에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재통합과 결집 공간 또는 자치 형태를 발견하였다. 이는 정치적 잠재력이 작용하면서 오늘날 전국적 규모의 원주민 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Simbaña 2009, 157). 그러나다른 한편으로 농지개혁은 사적 소유권에 전혀 손대지 않고 오히려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자본주의적 관계를 강화하면서 농촌 갈등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1978년에서 1984년에 이르는 시기에 군사정권에서 민선정부로 권력이 이양되면서 원주민운동도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1979년 문맹자 투표에 대한 제한이 풀렸고, 원주민의 선거 참여가 활성화된다(Ortiz-T 2014, 17). 그에 따라원주민운동은 80년대 초부터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특히 원주민 공동체권력이 시급하게 필요하다는 인식과 더불어, 영토적, 정치적 자율성이 주요 의제로 등장한다. 달리 말하면 이전의 원주민운동은 분리든 동화든 또는 통합이든, 국가를 상대로 한 것이었는데, 이때부터 국가를 넘어서는 원주민 공동체의 자율성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김은중 2008, 46).


Ⅳ.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토지 문제

80년대는 다른 한편으로 에콰도르에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도입된 시기이다. 라레아(Osvaldo Hurtado Larrea) 정부(1981-1984)는 1981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IMF의 요청에 따라, 1982년에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채택하게 된다. 이 정책은 무엇보다도 사회의 가장 하층에 자리하고 있는 원주민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원주민들이 이러한 현실을 자각하면서 원주민 운동도 활성화된다. 그리고 1986년에 기존의 다양한 원주민운동 세력들을 결집하여 에콰도르원주민연합(CONAIE)을 창립하기에 이른다.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원주민 공동체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토지나 자원을 둘러싼 문제일 것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원주민들은 토지나 자원의 공유에 기반을 둔 이른바 공동체 경제(economía comunitaria)를 오랫동안 유지해 온 반면, 시장 논리적 효율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신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이러한 공유제를 농촌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부응하여, 자본주의적 토지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공동체적 토지 소유를 실패한 모델이라고 주장하는 연구도 등장한다(World Bank 1995). 그러나 이와 반대로 에콰도르에서 토지 집중도가 줄지 않고 있고, 대토지 소유보다는 소농(propiedades minifundistas)이 토지 단위당 소득 면에서 더 효율적임을 밝히는 연구도 나왔다(Martínez V. 1998, 6).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공세는 결국, 1990년 6월, 대규모 원주민 봉기를 불러일으킨다. 이 때 원주민들은 복수국민국가 건설, 토지 개혁, 물과 관개용수, 원주민공동체 관련 부채 탕감, 사업이나 교육 지원, 원주민적 가치 인정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16개의 요구 조항을 내건다(김달관 2013, 26).3) 이러한 요구사항들 중에서 핵심적인 사안은 역시 토지 문제라 할 수 있다(Korovkin 1992, 33). 1992년 아마존 푸요에서 수도 키토까지 행진했던 원주민들도 이와 비슷하게, 아마존 토지와 영토 갈등 해결, 복수국민국가 건설 등을 요구한다(Gualli 2004, 46-47).

80년대 말에 행해진 원주민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의식조사에서도, 공동체 경제는 원주민 사회에서 여전히 중요한 요인임을 알 수 있다. 카데나와 마요르가가 에콰도르의 대표적인 원주민 밀집 지역인 침보라소(Chimborazo) 지역의 131개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대다수의 공동체 성원들은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 밍카, 주민총회(assemblies)와 같은 공동체 조직(53%), 공동체 활동을 위한 외부 재정 지원(24%), 공동체 사업 수행(16%) 등을 들고 있다(Caderna et al. 1988, 83, 93-94, Korovkin 1992, 34에서 재인용). 이러한 공동체적 지향성 때문에, 1990년 이후 원주민 봉기에 적극 참여한다. 앞서 말한 침보라소 지역의 경우, 전체 농촌 인구의 70%에 해당하는 15-20만 명이 7일 동안 지속된 1990년 봉기에 가담한 것으로 나타났고, 이 과정에서 원주민 공동체는 주도(州都)에 이르는 도로를 봉쇄하여 식량 공급을 차단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Korovkin 1992, 33).

그러나 원주민 공동체의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베옌-다익(DaránBellén-Dahik) 정부(1992-96)는 오히려 이와 반대로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근대화 법’(Ley de Modernización)을 반포한다. 농촌과 관련해서는 ‘농촌부문조정법’(Ley de Ordenamiento del Sector Agrario)을 제정하여, 사적 소유와 투자를 보증하면서, 토지나 물과 같은 공동체 자원의 관리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또한 94년에는 ‘농촌개발법’(Ley de Desarrollo Agrario, LDA)을 반포해, 코무나 소유의 토지를 합법적으로 분할, 매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특히 코무나와 협동조합 소유의 불모지 토지(tierra de páramo)를 분할, 매매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농촌개발법이 발효되면서, 토지의 획득이 공동체 성원만이 아니라, 공동체 외부 사람도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고지대의 불모지와 같은 코무나 토지의 분할 과정이 가속화되었고, 그에 따라 코무나 소유의 토지 규모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무나 소유 토지의 하위 분할을 금지하고 있는 1937년 법이 여전히 살아 있어, 농촌개발법과 충돌하였다(Martínez V. 1998, 7).

에콰도르의 경우 토지의 집중도가 70년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고, 1994년 기준 지니 계수가 0.8에 이른다(Banco Mundial 1995). 그리고 농촌의 가난은 가난한 농민들에 의한 토지 접근이 극히 제한된 현실과 높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0년, 1994년의 원주민 봉기는 공동체 경제의 위기와 그에 따른 삶의 수준의 하락과 가난의 증가에 대해 농촌 지역 가난한 원주민들의 불만이 표출된 것이었다(Martínez V. 1998, 1).

이러한 저항과 봉기에 힘입어, 에콰도르와 볼리비아는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새 헌법을 마련하게 되었고, 그 헌법에 단 하나의 경제 형태가 아니라 다양한 경제 형태를 인정하면서, 그 중의 하나인 공동체 경제 형태를 경제 체제의 중심축으로 삼는다. 즉 어느 특정 생산 방식을 선택하거나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다양한 생산 방식, 즉 자본주의적 사적 기업, 국영 기업, 공동체 기업의 공존을 모색한다. 여기서 공동체 경제는 자본주의적 경제와 다르게, 생산 수단과 생산재를 사적이 아닌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형태를 말한다.

국가는 공동체 경제 조직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촉진시킨다. 이러한 공동체 경제 조직 형태는 원주민과 농민들의 고유한 원리와 관점에 토대를 두고 사회적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체제이다(Asamblea Constituyente de Bolivia 2008, Art. 307).

에콰도르 헌법도 ‘민중적이고 연대적인 경제’라는 이름으로 공동체 경제 형태를 헌법에 적시하고, 이러한 경제 형태를 포함한 경제 체제의 목적이 ‘부엔 비비르’(Buen Vivir)를 가능케 하는 물질적, 비물질적 조건의 생산과 재생산을 보증하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경제 체제는 사회적이고 연대적이다. 즉 인간을 주체와 목적으로 인정한다.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사회, 국가와 시장 사이의 역동적이고 균형 잡힌 관계를 지향한다. 부엔 비비르를 가능케 하는 물질적, 비물질적 조건의 생산과 재생산을 보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경제체제는 공적, 사적, 혼합적, 민중적 그리고 연대적 경제 조직 형태들, 그리고 헌법이 결정하는 여타 조직 형태들을 통합한다. 민중적이고 연대적인 경제는 법에 따라 규제되고 협동조합 부문, 협회 부문과 공동체 부문을 포괄한다(Asamblea Constituyente de Ecuador 2010, Art. 283).

Ⅴ. 결론

에콰도르의 기존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1990년대 원주민 대규모 봉기의 주된 요구 중의 하나는 토지 문제였다. 농촌의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가뜩이나 입지가 좁아진, 조상 전래의 공동체 경제는 신자유주의적 공세 앞에서 심각한 위기에 몰리면서 대규모 봉기로 폭발하였던 것이다.

토지나 자원을 공동체적으로 소유하고 사용하는 이러한 공동체 경제는 잉카 제국,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잉카 제국 이전부터 존재했던, 안데스권의 여러 문화들로부터 계승한 것이다. 잉카 시대에도 다양한 유형의 소유나 노동 형태들이 존재했지만, 아이유를 중심으로 한 호혜적 경제 활동, 재분배의 원리에 기반을 둔, 국가 중심의 노동 동원과 자원 관리가 경제 활동의 중심축을 이뤘다. 이러한 공동체적 경제 활동은 전근대 사회에 보편적으로 등장하나, 잉카 사회의 경우 그 특유한, 씨족 공동체의 지리적 산포에 기반을 둔 ‘수직적 호혜망’ 때문에 더욱 강조되었다.

이러한 공동체 경제 형태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엔코미엔다와 아시엔다 체제 아래서 변형되고 왜곡되면서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은 이러한 식민적 지배에 대해, ‘적응하면서 저항하는’ 전략 등을 통해 공동체 경제 형태들의 지속가능성을 꾀하였다.

그러나 농촌의 자본주의화를 위한 본격적인 행보라고 할 수 있는 60년대와 70년대의 농지개혁, 그리고 80년대와 9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하에서 이러한 자본주의화 과정이 보다 더 강화되면서, 공동체 소유의 토지나자원이 상당 정도 사유화되고, 그에 따라 원주민 공동체가 갖는 본래적인경제적 기능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족들 사이의 호혜나 연대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가족에 속한 토막 땅이 증가하는 반면 코무나 공유지는 줄어드는 경향을 띠고, 이는 신자유주의적 맥락에서 1994년 발효된 농촌개발법(LDA)에 의해 더욱 더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원주민 공동체는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호혜적 삶을 강화해 나감으로써 원주민적 가치를 보존하고 원주민 운동을 활성화하는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기본적으로 공동체 경제, 예를 들면 공동체 내 사회적 혜택과 관련된 노동, 즉 길이나수로를 정리하고, 학교를 세우며, 코무나의 집을 짓는 일과 관련된 노동에 기반을 두었다.

물론 농촌의 자본주의화, 근대화로 인해, 이러한 공동체 내 생산 노동 또는 공유지의 이용과 관련된 노동의 중요성이 떨어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공동체 경제에 기반을 둔, 코무나의 공동체성은 경제적 차원을 넘어, 정치적, 사회적 차원으로 보다 더 확장, 심화된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코무나가 본래의 경제적 기능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기능으로 확장, 심화됨에 따라 코무나 조직은 1980년대에 더 늘어났다는 점이다. 여기서 공동체가 갖고 있는 성격이나 역할에 대해 재고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현재 공동체는 한편으로 토지, 노동력, 생산과 관련하여 시장의 압력에 종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인 가치와 생활양식을 보존하고 전승하면서, 이러한 압력에 나름대로 대응하고 저항하는 힘을 매개하기도 한다.

이처럼 전통적인 공동체 경제 형태가 위기에 놓인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원주민 운동의 성과라 할 수 있는 제헌헌법을 통해, 이러한 경제 형태의 필요성과 의미가 부각되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러한 공동체 경제 형태를 다양한 경제 형태들 중의 하나, 또는 그 형태들을 보완하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 경제 형태들의 중심을 잡아주는 기본 축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한신대 자본주의연구소 공동학술심포지엄(2015년 5월 15일)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Notes
1) 이러한 호혜나 재분배가 잉카의 지배자나 귀족이 평민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황제가 선물의 형태로 재분배하는 것이 결국 농민 노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라는 맥락에서이다(킨/헤인즈 2014, 104) 그러나 이는 재화와 용역을 공동체적으로 순환, 재분배하는 호혜와 재분배 시스템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 같다.
2) 식민지 시대 때부터 안데스 고원지대에 널리 확산된 사회경제적 제도로, 아시엔다의 대지주가 농부에게 생계를 위한 토막 땅을 제공하는 대신에 노동력을 착취하는 노동 형태를 말한다.
3) 16개의 요구조항은 다음과 같다. 1) 복수국민국가의 선포, 2) 토지 재분배와 종족(nacionalidades)의 영토 합법화, 3) 물과 관개용수 문제 해결, 4) 산업은행(BNF)의 부채탕감, 5) 필수품 가격 동결, 6) 원주민 공동체 내 역점 사업 이행, 7) 농지 대금 지불 면제, 8) 1981년 시행령에 따른 ‘여름언어학교’(Instituto Lingüístico de Verano)의 퇴출, 9)에콰도르원주민연합(CONAIE) 회원에게 상품과 수공업제품과 자유로운 수출입 허용,10) 에콰도르원주민연합에 의한 고고학적 유적 관리, 보호와 발전, 11) 원주민 전통 의료의 인정과 재정 지원, 12) 부문위원회(Consejos Seccionales)와 유사한 기구들을 창설했던 시행령 폐지, 13) 원주민에게 배정된 기금의 즉각 지원, 14) 이중 언어교육을 위한상설 기금의 지원, 15) 어린이 권리의 선동적이 아닌, 실질적인 존중, 16) 농산물의 공정한 가격 안정과 시장에서의 자율성(Hidalgo 2006,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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