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 지역주의의 형성: 카카오 붐과 과야킬 지역과두세력을 중심으로
초록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는 정치의 중심지로 과야킬은 국내 최대 상업도시로 알려졌다. 이는 각 지역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고원지역 대 해안지역이라는 경쟁구도 하에 양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주의(regionalismo)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과야킬을 경제중심의 도시라고만 지칭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독립 이전부터 존재한 과야킬 지역과두세력은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카카오 붐으로 대농장의 형성과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카카오 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과야킬 과두세력은 자유주의혁명을 지원하면서 정치세력화를 통해서 중앙정치 무대에 진출했다. 해안지역의 과두세력은 전통적인 키토 과두세력과의 경쟁과 대립의 관계를 형성했고, 이러한 정치적 환경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에콰도르에서는 대통령선거 시기가 다가오면 키토 중심의 내륙고원지역과 과야킬을 중심으로 하는 해안지역 간의 대립으로 표출되는 지역주의가 절정에 다다른다. 이러한 에콰도르의 지역주의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키토 과두세력에 대한 대항마로서의 과야킬 과두세력이 무엇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지역주의는 에콰도르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키토의 크리오요 과두세력은 국가 대부분의 생산 수단과 경작가능한 모든 토지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안지역에서는 자유무역을 골자로 하는 부르봉 왕가의 개혁조치에 따른 카카오 교역의 증가에 힘입어 늦게나마 대농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카카오붐은 에콰도르 경제를 세계시장에 편입시켰고 해안지역에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과야킬 중심의 강력한 과두세력 형성했다. 이들은 자유주의혁명을 지원하면서 정치세력화를 추구한 결과 키토와 함께 현재 에콰도르의 정치를 좌우하는 양대 지역주의로 성장했다. 본 논문은 과야킬 과두세력의 등장의 배경과 그들의 정치화 과정을 살펴보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Abstract
The city of Quito is known for being the capital of Ecuador and center of the country's political scene, while Guayaquil is recognized as the nation's largest commercial city. These words synthesize the characteristics of the two most important territories of Ecuador and speak of a regionalism that motivates competition between the Central Sierra and the Coast.
This regionalism in Ecuador is considered to be historical, for a long time the Creole oligarchy of Quito controlled practically all the resources and means of production, as well as most of the working properties of the country; however, at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in the Coast began to form a late latifundium, thanks to the Bourbon reforms, that favored an increase of the cacao trade.
The cocoa boom produced an accumulation of capital in the area and increased the power of the Guayaquil oligarchy that decided to support the Liberal Revolution, thus getting involved in the politics of the central government at the time as an influential political group.
The power won by the coastal oligarchy created a competitive relationship and opposition with the traditional mountain oligarchy that continues to live this date within the political environment. Therefore, when the time of the presidential election in Ecuador approaches, the regionalism that confronts Quito and Guayaquil as representatives of the Central Sierra and the Coast respectively is revived.
The cocoa boom succeeded in incorporating Ecuador's economy into the world market, creating wealth in the coastal region and increasing the power of the Guayaquil oligarchy, which has now become one of the most powerful groups in regionalism that move politics of Ecuador. This research aims to study the origin of Ecuadorian regionalism, the circumstances of the formation of the oligarchy of Guayaquil and its process of constitution as a political force capable of rivaling the traditional Quito oligarchy.
Keywords:
Ecuadorian Regionalism, Cocoa Boom, Oligarchy, Liberal Revolution Alfaro, Quito-Guayaqui키워드:
에콰도르 지역주의, 카카오 붐, 과두세력, 알파로 자유주의혁명, 키토-과야킬Ⅰ. 서론
에콰도르의 국토는 지리적으로 안데스 산맥을 따라 북남방향으로 펼쳐진 내륙고원지역, 동쪽 방향의 아마존지역, 태평양 연안의 해안지역 그리고 갈라파고스 제도를 포함하여 4개 지역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고원지역과 해안지역의 비중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아마존지역과 갈라파고스 제도에 비하여 월등하게 높다. 이는 수도 키토와 최대 상업도시 과야킬을 제외하면 여타 지역의 존재감이 미미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에콰도르는 고원지역 대 해안지역이라는 경쟁구도 하에 양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역주의는 에콰도르인의 정체성에 해가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낳기까지 이르렀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등의 분야에서 당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에콰도르에서는 지역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예로 대중에 대한 설득과 공작의 도구로써 정치인들이 지역주의의 현상을 교묘하게 이용해왔다. 특히 대통령선거 시기가 다가오면 지역주의가 그 무엇보다도 뜨거운 이슈로 강하게 표출된다. 최근 에콰도르는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물론 이번 선거에서도 과야킬 은행가 출신의 후보와 키토·아마존 지역 주민의 지지를 받는 후보 간의 양 강 구도로 진행되었다. 대선 캠페인이 시작될 무렵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키토 중심의 내륙고원지역과 과야킬을 중심으로 하는 해안지역 간의 대립, 즉 지역주의 또는 지역패권주의가 최고조에 이른다. 이러한 지역주의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지? 전통적인 대지주들과 귀족 계급을 대표하는 키토 과두세력에 대한 대항마로서의 과야킬 과두세력이 어떻게 무엇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또한 이로 인한 지역 간의 갈등상황이 지속되어 국가나 사회적으로도 발전을 저해하고 안정을 위협하는 원인이 되거나 또는 양 지역이 국가발전에 있어 견제와 균형을 통해 통합이라는 순기능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긴다.
에콰도르의 지역주의는 국가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스페인은 잉카를 정복한 후에 현재의 에콰도르 지역에 식민통치를 위해 산 프란시스코 데 키토(San Francisco de Quito), 산 그레고리오 데 뽀르또 비에호(San Gregorio de Porto Viejo), 산띠아고 데 과야킬(Santiago de Guayaquil) 등 3개 도시를 창설하여 정치와 행정을 독립시기까지 이어왔다. 남미 북부지역의 해방자 볼리바르가(Simón Bolivar)가 건설하고자했던 ‘그란콜롬비아(La Gran Colombia)’의 꿈도 지역 토호들의 야심과 지역주의로 말미암아 무산되었고, 콜롬비아공화국마저도 분열되면서 에콰도르의 역사는 시작된다. 에콰도르가 1830년 아수아이(Azuay), 과야킬(Guayaquil), 키토(Quito) 주(Departamentos)를 하나의 독립된 형태로 결합하여 주권국가로 창설된 것을 보아서도 당시의 지역주의를 가늠할 수 있다.
18세기 말 고원지역의 크리오요 과두세력은 국가 대부분의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대농장주들은 원주민 보호구역을 제외한 고원지역의 경작가능한 모든 토지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다. 과야킬을 중심으로 인근 해안지역에서는 자유무역을 골자로 하는 부르봉 왕가의 개혁조치에 따른 카카오 교역의 증가에 힘입어 늦게나마 대농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즉 1880년부터 1920년까지 40년 동안 지속된 카카오 붐은 에콰도르 경제를 세계시장에 편입시켰다. 이는 해안지역에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과야킬 중심의 과두세력이 형성되고,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 영향력을 기반으로 이들은 자유주의혁명을 지원하면서 정치세력화를 추구한 결과 키토와 함께 현재 에콰도르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양대 지역주의로 발전했다.
지역 과두세력의 대립은 내륙고원-키토(Sierra-Quito)과 해안-과야킬(Costa-Guayaquil)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적 지역적 정체성을 의미하게 되며 각 그룹의 우월의식 속에서 상대 그룹을 멸시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오늘날까지 에콰도르의 정치는 키토 중심의 고원지역과 과야킬 중심의 해안지역 간의 경쟁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2007년 대선에서는 그동안 소수자로서 소외당해왔던 원주민들과 원주민 단체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서민층 다수의 표심이 결집된 결과 과야킬 출신의 비 기득권 개발경제학자인 꼬레아(Rafael Correa) 후보가 같은 지역 과두세력가문 출신의 바나나 재벌 노보아(Alvaro Noboa)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이번 선거에서는 키토와 서민층의 지지를 받는 아마존 동부지역 출신의 모레노(Lenin Moreno)후보가 과야킬 은행재벌가 출신의 라소(Guillermo Lasso)에 승리하여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지역주의 대립에서 또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이는 키토와 과야킬 간의 지역패권주의와는 다른 것으로써 꼬레아 정권이 장기간 추구해온 대중인기영합 정치가 가져다준 집권여당의 정권계승으로 이해된다.
최근 수십 년간 에콰도르의 정치에서 지역감정을 선동하며 연고지에서 자신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정치인들 모두가 과야킬 출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봇(Jaime Nebot) 전 과야킬 시장, 페브레스(LeónFebres) 전 대통령, 부카람(Abdalá Bucaram) 전 대통령들의 경우를 관찰해볼때 과야킬 출신이 정치인들 가운데 지역주의를 내세워 고원지역 후보에 대해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형태를 보였다. 고원지역 출신 정치인 가운데 해안지역 주민에 대해 지역주의를 내세우면서 공격하는 것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Adoum 2000). 이러한 방법으로 대부분의 경우 연고지역에서 지지와 득표로 이어졌고 지역의 결속을 다지는데 큰 효과를 볼 수 있어 계속된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중심의 수도 키토와 경제와 상업의 중심의 최대도시 과야킬 간의 경쟁관계는 에콰도르의 역사와 현 정치상황을 감안해 볼 때 그 누구도 쉽게 풀기는 어려운 과제로 남을 것으로 예상된다. 18세기에 키토 출신의 역사학자, 사상가, 정치가로 활동했던 에스뻬호(Eugenio Espejo)는 해안지역과 고원지역 간의 갈등에 대해 “과야킬 사람들은 고원지역 사람들과 화해할 수 없는 적들이다” 라고 규정했다. 이렇게 극적인 방법으로까지 규정한 것을 보면 키토와 과야킬 간의 지역주의는 국가 통합의 길 보다는 분열을 향한 방향으로 치닫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체제가 중앙집권주의에서 지방분권주의로 변화하는 가운데 키토는 정치 중심의 수도로서의 대표성을 강조하면서 과야킬을 포용하고자하나, 반면에 과야킬은 경제·상업 중심 국내 최대 도시로서 경제적 자립을 내세워 분리를 주장하며 나아가서는 스페인의 카탈루냐의 경우와 같이 분리 독립 추진의 움직임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과야킬 사람들이 정치의 논리보다 경제의 논리를 우선시한다는 단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동안 에콰도르에 관한 국내 연구는 민주화, 원주민 운동, 원주민 교육과 같은 한정된 분야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특히 에콰도르의 지역주의나 과두세력, 카카오 붐 등과 같은 분야에서의 국내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에콰도르에서는 1990년대 들어 지역주의에 대해 문화적 측면에서 근원적 접근을 비롯하여 민족 정체성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사회과학 전문가들과 문학가들이 연구를 진행했다. 이러한 지역주의에 대한 분석 연구서들 가운데 해안지역과 고원지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 중에서 키토 출신의 아도움(J.E. Adoum)이 2000년 저술한 “에콰도르: 개별적 특성”과 2004년에 과야킬 출신의 도노소(M. Donoso Pareja)가 집필한 “에콰도르, 정체성 또는 정신분열증”이 주목을 받았다. 이 두 권의 지역주의 연구서도 키토 태생의 아도움이 먼저 저술하고 이후에 과야킬 출신의 도노소가 이에 화답과 반론하는 형식의 작품으로서 여기에도 양 지역의 지식인들 간의 경쟁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에콰도르에서 과야킬의 위상은 최대 규모의 경제·상업 중심지인 동시에 인구면에서도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어 키토와의 경쟁과 갈등의 관계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에콰도르의 지역주의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키토 과두세력에 대한 대항마로서 과야킬 과두세력이 카카오 붐과 자유주의 혁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는바, 본 논문에서는 과야킬 지역주의의 핵심인 과두세력의 등장의 배경과 그들의 정치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일반적인 지역주의 정의와 에콰도르에서의 지역주의를 살펴보고, 3장에서는 에콰도르의 독립과 키토 과두세력에 대해 다루며, 4장에서는 카카오 붐과 과야킬 과두세력의 등장과 발전에 대해 살펴본 후에 5장에서는 자유주의혁명과 과야킬 과두세력의 정치화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Ⅱ. 지역주의와 에콰도르에서의 지역주의
본 장에서는 지역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에 대해서 알아보고 에콰도르에서의 지역주의 특색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동안 학자들이 정의해 온 지역주의의 개념은 다양하지만 대체적으로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특정지역 사람들의 욕구가 지속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지칭하거나, 자본주의 하에서 균등하지 못한 지역의 발전 문제를 정치와 경제적 시각으로 보거나, 글로벌세계에서 정치 또는 경제적 블록을 형성하며 지역체제를 재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먼저 지역주의에 대한 고전적 시각으로서 국가의 근대화라는 발전 과정에서 겪는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 등에서의 다양한 요구사항들이강하게 표출될 경우 지역적 행동주의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Hansen 1984, 74-78). 디킨슨(Dickenson 2007)은 중앙집권주의와 지방분권주의 간에 역할을 분담하여 지역의 자치권과 특성을 보장해주는 수단으로서 지역주의를 보았다.
지역주의를 정치와 경제적 측면으로 관찰하는 경우로서 지역개발에 있어서 불균등한 발전과 연관하여 문제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적 불균등 문제들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회와 영역이라는 요소들이 충돌하면서 생겨나는 균등하지 못한 개발의 과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본다(Markusen 1979).
지역이란 개념이 한 국가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라는 공간속에서 자유무역질서 또는 정치적 이념 등에 의한 세계화 추세로서 경제블록이나 정치적, 문화적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지역블록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글로벌 세계에서의 지역주의는 국가 간의 상호관계를 중시하며 국제 경제체제 하에서 한 국가에 대한 지역적 특성을 관찰한다(Mauro et al. 2008). 세계화 추세 속에서 선진 경제권 국가에 대항한 개도국 간 또는 후진국가 간의 정치적, 문화적, 지리적 연계성을 토대로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여 경제블록을 형성하거나 특정 선진국에 맞서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을 목적으로 지역 국제기구 등의 블록을 형성하면서 지역주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렇듯 지역주의는 세계 각 지역과 국가에 따라 개념과 특성 등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 문화권이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경우에 보르하(Borja 1997)는 지역주의를 한 국가 안에서 서로 다른 지역이나 도시 간에 생겨나는 경쟁의 감정 또는 반감으로 나타나며, 때로는 정치·행정에서 과도한 중앙집권주의에 맞서거나 지역문제에 대해서 장기간에 걸쳐 무시하는 것에 대한 항의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는 때대로 민족 단결을 저해할 수 있으며 지역주의에 영항을 미치는 요인으로는 역사, 문화, 기후, 지리, 민족과 종교의 차이, 정체성, 정치 경제 행정적 이익 등에 기인한다. 까바네야스(Cabanellas 1962)는 지역주의란 지방정부의 지리적 역사적 근거에 의한 지역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행정자치권을 방어하는 움직임으로 보았다.
에콰도르에서 지역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것에 대해 아도움(2000)은 지역주의 감정이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에콰도르가 국가로서 존립하기 이전에 1822년 과야킬 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페루 또는 그란 콜롬비아에 병합할 것인지를 자유롭게 결정하기 위한 것에서 출발했다고 본 반면에, 도노소(2004)는 에콰도르의 지역주의 문제에 대해 국가가 산산조각날 수 있는 정신분열증 증세와 같은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그 위험성을 지적했다. 이렇듯 수도 키토와 최대 상업도시 과야킬 간의 지역주의와 반목은 에콰도르의 역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에콰도르의 지역주의 현상은 집단 개인주의의 명백한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 건국 초기부터 지역 개인주의가 두드러졌으며 이러한 경쟁 관계가 역사와 정치 부문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났고 에콰도르인의 집단 정체성에 부끄러움을 야기하기도 했다.
에콰도르인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전 국토의 모든 국민을 포용할 수 있는 명확한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다. 따라서 에콰도르인 들은 지역주의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자했다. 그러나 에콰도르에서 현재 볼 수 있는 지역주의는 지역에 대한 애향심에 근거하기보다는 여타지역에 대한 경멸에 기초하고 있다(Adoum 2000).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으로 볼 수 있으나 해안과 고원지역 간의 경쟁이 최고조에 이르며 키토 사람들과 과야킬 사람들 간의 권력 투쟁은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되어왔으며 오늘날 까지 계속되고 있다.
Ⅲ. 에콰도르의 독립과 키토 전통 과두세력의 확대
유럽인들이 미주대륙에 도래한 것은 수천 년 전부터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땅에 정착하여 이룩해온 생산 체계를 완전하게 파괴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유럽의 식민 자들은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생산 구조를 다른 제도로 대체하는 것에 대해 크게 우려하지 않았고 원주민들은 굶주림 때문에 이제도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왕실소유지, 엔코미엔다 등을 통해서 생산이 안정화 단계에 들어갔다.
1809년 8월 10일에 시작된 독립운동이 키토 과두세력에게는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특권 계층을 형성하여 에콰도르 전역에 걸쳐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내륙고원지대의 제조업 분야에는 피해를 입히는 반면에 해안지역의 농산물 수출에는 유리한 내용을 담은 개혁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른 여러 파급 효과들이 나타났고 지역주의자들이 오래전부터 담아온 반목이 더해지면서 각 지역의 과두세력과의 대립과 충돌이 일어났다.
1819년 12월 남미 북부지역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는 ‘그란 콜롬비아(La Gran Colombia)’ 창설을 구체화하기 위해 콜롬비아 공화국의 설립에 관한 기본법을 공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지역주의자 토호들의 이기주의와 야심에 의해서 좌절됐다. 콜롬비아 공화국은 베네수엘라, 키토, 쿤디나마르카로 분리되었으며, 후에 지역주의 토호들의 정치적 결정에 따라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파나마, 에콰도르 등 4개 국으로 분열되었다.
지역 간의 대립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812년 중부내륙지역에서 발생한 초기의 반란이 식민 권력의 재건을 도운 빠스또(Pasto), 꾸엔까(Cuenca)와 과야킬에 의해 진압되었고, 1820년 과야킬에서의 반란은 키토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꾸엔까의 정치적 반대에 맞서야했다. 당시 빠스또는 볼리바르 해방군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어서 누구의 편에 서지 못했다. 에콰도르의 독립은 1822년 5월 피친차(Pichincha) 전투로 마무리가되었으나 빠스또, 키토, 꾸엔까, 과야킬 간의 적대감은 짐작하기 어려울정도였다. 콜롬비아 공화국에 옛 키토 영토를 통합한다는 키토의 선언과 과야킬의 반대가 이러한 지역주의의 모순과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다(Nuñez 1990).
에콰도르 영토의 구분은 자연, 지리, 부족 등의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정치적인 이익과 목적에 의해 경계가 확정되었으며 1830년 9월 23일 최초의 헌법 제정을 통해 아수아이(Azuay), 과야킬(Guayaquil), 키토(Quito) 주(Departamentos)를 하나의 독립된 형태로 결합하여 자유와 주권국가로 선포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독립은 크리오요 지주들이 정치적 권력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에콰도르는 독립 이후에도 역사적으로 지역주의와 분리주의 바람이 계속 불어왔다. 플로레스(Juan José Flores) 장군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정치적 기반은 내륙 고원지대 특히 키토의 대지주(terratenientes)들을 중심으로 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귀족 계급과 보수주의자들 이었다. 플로레스의 통치는 해안지역에서 점증하는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상인들과 은행가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유주의 사상을 추구하던 과야킬 출신의 로카푸에르테(Vicente Rocafuerte)에게 정권을 넘겨주면서 1834년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두 거두 정치인들 간의 치열한 경쟁은 그들이 죽고 난 이후까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그 경쟁의 중심축은 키토에 기울어져 있었다.
아우디엔시아 데 키토(Audiencia de Quito) 관할지역 식민사회의 변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중의 하나가 지역의 권력이 강한 형태의 구조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지리, 인구, 경제 등 다양한 요인들이 지역사회의 특징으로 나타나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이 전통적인 지역 과두세력 그룹의 형성으로 이어지고 기초 생산 수단과 자금을 통제하면서 지역사회의 정치권력까지 장악하게 된다. 아우디엔시아(Real Audiencia y cancillería)는스페인과 그 제국에서 법원으로서 상소법원의 기능을 담당했다. 스페인 까스띠야(Castilla) 왕국은 미주대륙에 아우디엔시아를 조기에 도입하여 현지로 이주한 반도인들과 정복자들을 국왕의 통치하에 놓기 위한 제도였다. 아메리카 최초의 아우디엔시아는 1511년 오늘날의 도미니카공화국 수도인 산토도밍고에 설립되었으며, 대륙의 첫 아우디엔시아는 1527년 멕시코 세워졌다. 아우디엔시아 데 키토는 1565년에 현재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남부를 관장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아우디엔시아와 달리 아메리카의 아우디엔시아는 사법적 기능에 더하여 입법과 행정적 기능까지 가지고 있었다.
지방의 과두세력들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패권을 잡기위해 혼란을 거듭하는 동안에 중부내륙 고원지역의 과두지배세력들은 공화정의 신흥 군부세력과 혼인동맹을 통해 결속을 다졌다. 가장 대표적인 동맹은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 장교와 솔란다 이 데 비야로차(Solanda y deVillarrocha) 후작인 까르셀렌(Mariana de Carcelén)과의 결혼, 플로레스(JuanJosé Flores) 장군과 까사 히혼(Casa Jijón) 백작과 산호세(San José) 후작 가문의 히혼 이 비방꼬(Jesefina Jijón y Vivanco)와의 결혼을 통해서 이루어졌다(Nuñez 1990). 수크레 장교가 살해된 후에 플로레스 장군은 자신의 분리주의과업을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1830년의 헌법은 과두지배세력을 위한 법적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다. 상당한 정도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만이 시민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고 규정함으로써 과두세력이 지주가 아닌 상인들을 법률적으로 완전히 소외시키는 조치였기 때문이다1).
신생국가인 에콰도르의 초기 특징으로는 다양한 과두지배세력의 가문들이부의 확대와 명망을 강화화고 원주민 보호구역과 불모지를 없애가면서자신들의 대농장을 급속도로 확장시켜갔다. 에콰도르의 경제는 농업부문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토지의 소유는 곧 국가의 부와 직결되며 노동력을 사용하여 경제활동을 만들어내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대규모 단위의 토지와 중소규모의 토지 그리고 원주민들의 공동 경작지가 혼재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까지 에콰도르의 농업경제를 가장 극적으로 특징짓는 것은 내륙 고원지대의 대농장과 해안지역의 대농장-플랜테이션의 버팀목이었던 대농장제도인 라티푼디움이 유효했다는 사실이다.
에콰도르는 독립 시까지 지주들의 대농장이 식민경제의 근간이었다. 미주대륙의 끄리오요 지주들은 독립을 계기로 정치권력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다. 이는 지주 중심의 국가 건설을 통해서 식민을 연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에콰도르의 경우에 역사와 단절하는 조건은 수세기에 걸쳐 식민 시대부터 내려오는 원주민의 노예 조건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분명 지주들에게는 특권을 박탈하는 것과 같았고 로마, 가톨릭, 전통문명의 몰락과도 같은 것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 국제경제가 성장하는 동안에 에콰도르는 교회의 보호 아래 고립의 벽을 쌓고 있었다. 에콰도르 7대 대통령으로 1861-1865년까지 재임했고, 1869-1875년까지 두 번째로 대통령을 지낸 가르시아(Gabriel García Moreno)는 지주들을 맹신하고 상징화하면서대농장과 와시뿡고(Huasipungo)에 기반 한 제도가 붕괴될 경우 세상의 종말이온다고 믿었다. 즉 가르시아의 문명 정신은 원주민들의 노예 노동력으로근대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러한 고전적인 가부장주의가 에콰도르의 경제발전을 1세기 이상 더디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인종격리주의 또한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르따도(Osvaldo Hurtado) 등과 같은 진부한 특권층들은 에콰도르의 저발전의 원인이 지주들이 독립 이후에도 계속 유지해온 식민통치 시스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요인에서 그 이유들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한다(Oviedo 2012). 유럽인들에 의해 정복당하고 수세기 동안 지배를 받아온 라틴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 즉 정복당한자의 열등의식이 국가발전을 저해했다는 이야기로 풀이된다.
키토의 전통적인 과두지배세력은 그들 가문 간의 혼인 또는 군부세력과의 혼인동맹을 통해서 세력을 강화했으나 19세기 중반에는 다른 지역 과두지배세력과도 혼인동맹을 통해서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시작했다. 키토의 플로레스 히혼(Flores Jijón) 가문이 과야킬의 그란 카카오 구성원인 까마뇨(Caamaño) 가문과의 혼인 동맹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혼인동맹은 키토와 과야킬에서 가장 역동적인 가문 간에 이루어진 것으로써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제조업과 상업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또한 은행은 물론 국제자본과의 결속이라는 측면으로도 이해된다(Nuñez 1990). 키토의 과두세력이 다른 지역의 과두세력과 혼인동맹을 통해 세력의 확대를 추구한 것은 다른 지역의 과두세력의 성장과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과야킬 과두세력이 대표적이었다.
키토를 중심으로 하는 고원지역은 번영을 구가했으나 해안지역은 인구도 희박했고 중요한 생산 활동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직물제조업의 쇠퇴로 인한 고원지방의 정치와 경제적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반전이 시작되었으며 과야킬은 19세기 초·중엽부터 에콰도르의 경제와 정치의 원동력으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Ⅳ. 과야킬 과두세력의 등장과 발전
1. 에콰도르 카카오 붐과 쇠퇴
일반적으로 인간에 의한 카카오의 재배와 소비는 약 2000년 전에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지역에서 똘떼까(toltecas), 아스떼까((aztecas), 마야(mayas) 원주민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16세기에 멕시코 정복자 꼬르데스(Hernán Cortés)는 아스떼까 제국에서 카카오를 스페인으로 가져갔으나카카오 특유의 쓴맛으로 스페인 사람들의 미각을 사로잡기는 쉽지 않았다. 수도원에서 수녀들이 카카오에 당류와 바닐라 맛을 첨가한 음료를 만들어 먹기 시작하던 1550년에 가서야 스페인 사람들이 카카오를 소비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카카오 음료는 스페인의 궁정과 귀족들의 전유물로서 소비되었으나, 곧 카카오의 소비가 광범위하게 확대되어 카카오 콩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났고 스페인은 왕령을 통해서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트리니다드토바고에 카카오의 재배와 수출 독점권을 부여하면서 미주대륙에서 생산과 재배가 급격히 확대되었다. 당시에 에콰도르는 카카오 생산과 수출에 대한 독점권을 받지 못했으나 직물제조와 양모 생산에 관한 독점권이 주어졌다.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카카오 거래는 16세기에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다양한 지역으로부터 선박들이 도착하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Peña 2003). 그러나 16세기 중반에 들어 카카오 교역의 수익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에콰도르의 과야킬 상인과 기업인들은 왕령에 의한 금지규정에도 불구하고 수출을 목적으로 카카오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1623년에는 과야킬에서 생산된 카카오가 불법적으로 스페인 식민지 항구인 멕시코의 아까뿔꼬(Acapulco) 항, 니카라과의 손소나떼(Sonsonate) 항, 과테말라의 아하꾸뚤라(Ajacutla)와 아마빨라(Amapala) 항, 페루의 까야오(Callao) 항을 통해서 거래되고 있었다. 결국 스페인 국왕 까를로스 4세는 1789년에 왕령을 공포하여 에콰도르의 해안 과야킬에서부터 카카오의 재배와 수출을 공식적으로 허가하기에 이른다(Soria 2008).
스페인 식민통치 기간에 해당하는 에콰도르의 카카오 생산 통계를 살펴보면 1630년에는 이미 4만 파네가(fanega : 110 파운드)를 스페인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1775년에는 81파운드 중량의 카카오 적재물이 5만개로 증가했고, 1809년에는 생산량이 15만 낀딸(quintal : 100 파운드 마대자루), 1821년에는 18만 낀딸에 이르렀다. 식민기간 동안에 스페인에 거래된 이와 같은 카카오 물량을 감안할 때 1789년 왕령으로 과야킬에서 카카오 재배와 수출 허가를 승인하기 이전에도 밀거래가 성행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국가 총수출에서 카카오가 차지하는 비중은 40-60%를 넘나들었고 국세 지불 비중도 68%까지 이르는 등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자 세입원으로 자리를 잡았다(Soria 2008).
19세기의 자유무역주의라는 커다란 흐름과 1820년 과야킬의 독립 선포 등 일련의 굵직한 사건들은 카카오 수출이 점진적으로 성장의 시기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카카오가 에콰도르의 주요 수출품으로 자리를 잡고 환금작물로써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적 헤게모니가 약 1세기 가량 지속되었다. ‘카카오 붐’은 1880년부터 1920년까지 약 40년간 계속되었고 에콰도르의 태평양 해안지역과 특히 과야스(Guayas)강 유역에 카카오 재배를 위한 대규모 농장의 조성을 가져왔다. 또한 국내 최초로 상업과 금융자본가 계층의 핵심이 과야킬 시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고, 이는 미약하나마 제조업과 산업의 시작을 만들어냈으며 에콰도르 공화정 탄생의 특징인 내륙 고원과 해안지역 간의 지역적 차이를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Paz y Miño Zepeda 2008, 51).
태평양 연안에 거주하던 다수의 부유층 가문들은 토지 양허에 관한 공화국 정부의 새로운 법령에 따라 카카오 재배를 위해 대규모의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내 수출 진흥업계 종사자들과 과야킬에 거주하던 외국인 수출업자들은 대대적으로 야생 카카오 개발은 물론 재배지역도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대농장들을 가리켜 ‘그란데스 카카오스(Grandes Cacaos)’라는 이름을 붙여 사용했다. 카카오 재배를 위해 선호한 지역은 현재 ‘아리바(arriba)’라 부르는 로스 리오스(Los Ríos) 주에 관내의 빈세스(Vinces), 바바오요(Babahoyo), 빨렌께(Palenque), 뿌에블로 비에호(Pueblo viejo), 까따라마(Catarama)와 벤따나스(Ventanas) 지역과 과야스(Guayas) 주 남부의 나랑할(Naranjal), 발라오(Balao), 뗑겔(Tenguel) 지역이며, 엘오로(El Oro) 주의 마찰라(Machala)와 산타 로사(Santa Rosa) 등 이다. 초기에는 대규모 카카오 생산 농장과 중소규모의 농장들이 혼재하였으나, 얼마 후에 대농장들이 재배농지의 70%이상을 통제하고 카카오 왕국을 만들면서 대단위 농장들로 재편되어 아스삐아수(Azpiazu), 세미나리오(Seminario), 뿌가(Puga) 등 20여개의 가문이 대농장을 소유한 소그룹을 형성했다.
대규모 사유지나 대농장 조성 등으로 카카오 재배 면적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820년부터 1860년까지 연간 카카오 생산량은 12만 낀딸에서 16만 낀딸에 불과했다. 이러한 근본적인 이유는 세계시장의 위기와 내전과 같은 성격의 혁명 등 국내정세의 변화가 영향을 준 것이다. 19세기 말 에콰도르의 카카오는 스페인 시장을 넘어서 세계경제의 중심부까지 연결했다. 1870년대에는 프랑스와 독일 시장에 까지 진출했고 1890년대에는 스페인에서 유럽 북부까지 완전히 전파되었다2). 특히 미국 시장과 같은 새로운 초콜릿 제조업체들의 출현은 유럽과 미국으로부터의 카카오 수입량의 증가를 가져왔다. 밀크 초콜릿과 허쉬 초콜릿바와 같은 신제품 출시는 1876년 네슬레사로부터 에콰도르 산 카카오의 수요를 증가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Arosemena 1992, 293).
카카오 붐이 본격화되는 1890년의 생산량은 372,433 낀딸에서 1899년에는 578,626낀딸로 증가했으며 동 기간 동안 연평균 12.3%의 성장세를 기록했다. 1900년대 초 10년간은 성장세가 낮아지기는 했으나 평균 4.9%의 성장을 했으며, 카카오 붐 진입 초기 10년을 제외하고 본격화된 시기인 1891년부터 1920년까지 즉 30년 동안 유일하게 무역적자를 기록한 해는 1897년 한해에 불과했다. 1894년에는 에콰도르가 전 세계 카카오 생산량의 28%를 차지하며 최대 생산국 지위에 오르게 된다.
점증하는 카카오의 수요에 따라 가격의 상승세는 지속되었고 유럽과 미국에 위치한 초콜릿 독점 대기업들은 값싼 카카오를 구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유럽의 경우에는 현재의 가나, 아이보리코스트, 나이지리아 등 자국의 아프리카 식민지에 카카오 재배를 강제함으로써 세계의 카카오 생산량은 수요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현저하게 증가했다(Chiriboga & Piccino 1982). 이와 같은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등의 요인들과 더불어 에콰도르 국내와 국제 투기가 더해지면서 국제시장에서 카카오 가격의 폭락은 당연한 결과였다.
카카오가 에콰도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평균 비중은 70.3%에 달했으나20세기 초까지는 커다란 변화 없이 점진적으로 축소되었다. 1903년에서1913년까지는 에콰도르가 전 세계 카카오 생산량의 16.2%를 차지하며 여전히 최대 생산국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24년에 이러한 추세가 역전되어 브라질이 11.2%로 1위 생산국으로 등극했고 에콰도르는 6.6%로 2위로 밀려나면서 카카오 붐이 끝났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카카오 붐이 결정적으로 쇠퇴하게 된 이유로 1915년부터 1920년 사이에 ‘에스꼬바 데 부르하(Escoba de Bruja)’와 ‘모니야(Monilla)’라는 병충해가 카카오 재배지 전역에 확산되어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생산량이 4만 메트릭톤(TM)으로 감소했고, 1930년에는 1만5천 TM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이러한 경제사회적, 기술적 재앙과 더불어 1차 세계대전 동안에 국제 운송과 소비시장의 부족이라는 충격과 근년의 경제침체 결과까지 겹쳐진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요인이다(Soria 2008).
1914년부터 1940년까지 카카오 세계 생산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국제가격은 폭락했다. 1927년 세미나리오 가문의 일원이 카카오의 상황을 평가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미 우리에게는 카카오 대한 희망이 없다[...] 다른 작물을 찾아야만 한다”(Maigushca 2012, 91-92, 재인용). 이러한결론이 내려진 이후에 카카오 생산 토지의 대부분이 바나나, 쌀, 커피 등의 생산지로 변모하면서 수출 주요 품목으로서 카카오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식민지화와 농업개혁이 카카오 경작지에 농민들의 접근을 허락했으며 1970년대에는 카카오의 생산이 소규모 농가들의 손에서 이루어졌다(Chiriboga & Piccino 1982, 29).
40년 동안의 카카오 붐은 과야킬 시를 에콰도르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중요한 상업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카카오 수출로 인한 막대한 수익은 국가예산을 위한 자금조달에 견인차 역할을 해온 젖줄과 같은 것이었다. 카카오는 외화 수입원은 물론 자본을 축적하는 주요 상품으로서 권력자와 차기 통치자그룹의 정치적 경제적 운용을 위한 지지대 역할을 했다. 당시에는 카카오가‘황금 씨앗(pepa de oro)’으로 불렸고 권력과 부를 거머쥔 대농장주들을 가리켜 ‘그란 카카오(gran cacao)’라고 지칭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자금을 운용하면서 국가 경제에 기여하거나 새로운 분야의 산업발전을 모색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편의 위주로 국부를 유출하면서 유럽 주요 도시에서 가족들과 장기간 거주하면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 카카오 농장을 개선하는 일은 등한시했다(Luna Tamayo 1993, 19). 카카오 수출로부터 파생되는 거대한 자금이 국내로 유입되지 않고 외국에 거주하는 부재지주의 개인 계좌로 직접 흘러들어가는 것은 전형적인 경제시스템 왜곡의 한 예로 평가된다3).
2. 과야킬의 카카오 붐과 과두세력의 다변화
19세기 중반부터 빠른 속도로 농업경제가 발전하면서 에콰도르의 경제와사회구조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890년 에콰도르 농업위원회(Comisión de Agricultura)가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국가 경제를 바라보는역사적 시각뿐만 아니라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토지소유와 관련된 사회분야의 입장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서 경제학의 원리로써 부의 3대 원천으로 농업, 산업 그리고 상업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에콰도르에 적용되었고 농업이 국가의 부와 미래의 번영을 위한 원천으로 부각되었다(Borja et al. 1890). 해안지역은 독자적으로 에콰도르를 부유하고 강하게 만들 수 있었고 국가수출 상품의 80%가 해안지역에서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아무도 반문할 수 없는 현실 그 자체였다.
카카오 수출이 절정에 달하면서 농경지의 경계가 급속도로 확장되어 카카오 생산 플랜테이션도 나란히 확대되었다. 또한 해안지역 특히 과야킬 지역에 대규모로 자본의 축적이 일어났고 최초로 은행들의 설립은 물론 국가 산업도 장려되었다. 당시까지는 에콰도르의 주요 국고수입은 식민시대의 상징인 원주민의 조세부담에 근거한 구조였으나 주요 수입의 원천이 세관으로 옮겨져 관세에 의한 수입이 대농장에서 파생되는 조세수입을 빠르게 초과했다. 끊임없는 내전, 국제전쟁, 군부 쿠데타와 봉기 등 시대적 어려움 속에서 이룩한 카카오 번영은 국가 차원에서 도로 인프라 개발 및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고, 또한 다수의 외국상인들을 유치하여 항구에 사업을 개설토록 함으로써 과야킬의 발전을 가져오도록 했다(Nuñez 1990, 152-153).
카카오 붐은 과야킬의 지배계층 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는 다른 지역의 변화보다 현저하게 두드러져 과두지배세력의 황금기에 해당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과야킬 과두지배세력은 자신들의 재산을 확대하기 위해 합법적 또는 비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불모지와 원주민의 공동 경작지들을 사유화하기도 했다. 특히 1870년에서 1900년까지 지역 과두세력의 내부 조직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기존의 강력한 가문이었던 루사라가(Luzarraga), 까르보(Carbo), 이까사(Icaza), 빠레하(Pareja), 빅또레스(Victores), 노보아(Novoa) 등은 쇄락해져 자신들의 농장을 세력을 확장해가던 아스삐아수(Azpiazu), 세미나리오(Seminario), 뿌가(Puga), 모를라(Morla), 소또마요르(Sotomayor), 라이트 이 바께리소(Wright y Baquerizo) 등의 가문에 매매, 청산, 포기 등의 과정을 통해 넘겼다.
아스삐아수 가문의 경우 1884년에 16개의 카카오 농장을 소유했으며 평가액 420,000 수크레, 카카오나무 3백만 그루를 소유하여 국내 생산량의 4%를 점유했다(Deler 2007, 305-354). 20년이 지난 1904년에는 혼인동맹, 고리대금업, 매입, 원주민 공동경작지 사유화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국내 카카오나무의 총 8%에 해당하는 470만 그루, 15만 헥타르 면적의 59개의 대농장을 소유하며 과야킬의 강력한 과두세력으로 성장했다. 또 다른 카카오 명망 가문으로는 ‘카카오 왕가(reyes del cacao)’로 불리는 세미나리오가 있다. 1884년 세미나리오 가문은 16개 농장을 소유했던 아스삐아수 가문의 재산 평가액보다 2배가 넘는 14개의 농장, 10만 헥타르를 소유했다. 당시 세미나리오 가문이 소유한 토지가 워낙 방대해서 배를 타고 수일에 걸쳐 까라꼴 강(río Caracol)을 지나가도 세미나리오 사유지를 벗어날 수 없을 정도였다(Chiriboga 1980, 138-154). 지역 과두세력은 수평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즉 전통적인 가문에 더하여 상업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구스만(Guzmán), 레오나르도 스태그(Leonardo Stagg) 등의 가문들이 합세했다. 그란 카카오 가문들 간의 혼인동맹, 이익관계, 경제적 연합 등을 통해서 세력을 확장하는 가운데 다수의 외국상인들도 카카오 농장을 사들이기 시작했다4).
카카오 산업이 가져다 준 막대한 부는 해안지역의 과두세력으로 하여금 더 대담하고 야망을 가지게 했다. 대다수의 카카오 과두세력은 대지주로서 본래의 일을 계속 고집하기도 했으나 역동적이며 근대화를 추구했던 일부 가문들은 조기에 카카오 재배사업을 수출업으로 전환하고 후에는 다른 경제활동에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해갔다. 19세기 말 몇몇 가문들은 영향력을 가진 상인, 은행가, 산업가, 공인 등으로 변모했으며 외국기업과도 합작투자를 통해 국제기업을 창설하기도 했다. 이렇듯 지역 과두세력의 상층부 변화는 초기의 가문 형성 시 기반과는 상당히 멀어졌고, 특히 전통적 대농장 제도에 집착하고 해안지역의 자본 증가와 외국기술 도입에 대해 시기심을 가지고 있던 고원지대의 과두세력과는 더욱 차별된다. 그러나 그란 카카오라고 불리는 가문들은 다양한 경제활동, 기업설립 등으로 사회적 정치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으나 강력한 자본가 계층으로 성장하는데 디딤돌이 된 대농장을 결코 단념하지 않았다. 그란 카카오는 과거에도 지주계급이었고 현재에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Núñez 1990, 155).
그란 카카오라 불리는 대농장주들을 점증하는 카카오의 국제 수요와 유리한 가격과 특히 낮은 임금과 엄격한 채무조건에서 일하는 경작 농민과 노동자들을 이용하여 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앞의 <표2>에서 보는바와 같이 카카오 사업의 번영으로 주요 카카오 생산 수출기업들은 증기선의 구매와 은행, 사업회사, 보험업과 제조업 등의 분야로 사업의 영역을 확장해갈 수 있었다. 아스삐아수 가문과 같은 대규모 수출업자들과 여타 그란 카카오 가문들은 에콰도르 은행(Banco del Ecuador), 농상은행(BCA: Banco Comercial y Agrícola), 과야킬 화재보험회사, 임대·건설회사, 도시운송회사, 전화공사,성냥제조사 등 당시 주요 금융권, 기업의 주주이기도 했다. 20세기 초부터 과야킬에는 상업, 수출과 은행부문, 수입부문과 산업부문에 기반을 둔 초기 자본가계층의 여러 분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본가들과 카카오 대지주계층 간의 경제적 연결 고리가 형성되면서 자치권이 어느 정도 보장된 새로운 형태의 자본가계층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상업-금융자본계층과 카카오 대지주계층이 결합하여 극도로 폐쇄된 과야킬의 과두지배세력 그룹을 형성한 것이다(Paz y Miño Zepeda 2008, 55).
Ⅴ. 자유주의혁명과 과야킬 과두세력의 정치화
1. 자유주의혁명과 근대 정치체제 형성
에콰도르는 건국 당시에도 사회경제적으로나 지리적으로도 분명하게 두개의 지역, 즉 태평양 해안과 내륙고원으로 구분되었다. 이러한 지리적인 요인에 지역주의자들의 대립이 더해진 가운데 지역 토호들과 정당을 통해서 표출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 간의 정치적 투쟁이 전개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해안지역의 세력에 동조한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영주들이나 녹봉수급자 등 고원지역 세력과 뜻을 같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고원지역에서 나타났다. 고원지역 출신으로 자유주의 사상의 빛을 발휘한 인물로는 몽까요(Abelardo Moncayo, 1847-1917)가대표적이며, 보수주의 독재자 가르시아(GabrielGarcía Moreno, 1860-1865,1869-1875) 체제가 독립과 함께 시작된 자유주의의 발전을 중단시켰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이러한 사고는 자유주의자의 견해가 강하게 발휘된 것이다(Paz y Miño 2012).
가르시아의 독재 체제에 대항해 투쟁하고자 했던 청년 알파로(Eloy Alfaro Delgado, 1842-1912)는 자유주의 추종 세력을 규합했다. 후일 알파로는 파나마로 건너가 미주대륙의 자유주의 사상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여러 국가의 자유주의를 지원했다. 알파로는 조국의 보수주의 정권에 대항해 일종의 게릴라인 몬또네라(montonera) 봉기를 일으키기 위해 귀국했다. 1864년 주도한 첫 봉기는 지속적인 혁명 의지와 자유주의에 대한 약속의 이행이었다. 이는 알파로가 국내는 물론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으며, 보수주의 진영에 경계해야할 인물임을 각인시킨 것이다. 에콰도르의 자유주의혁명은 과야킬에서 1895년 6월 5일 민중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알파로는 게릴라 군을 지휘하여 고원지역으로 진격하여 주민들과 원주민 공동체의 지지를 받았으나 안데스지역에서는 대지주, 보수주의자와 교회로부터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민중의 환호와 함께 키토에 입성한 알파로는 최고위원회 지도자를 거쳐 헌법상의 대통령으로서 1895년에서 1901년까지 국가를 통치했다. 자유주의자들이 단결을 하지 못한 채 토호들이 권력다툼에 뛰어들면서 쁠라사(Leonidas Plaza, 1901-1905)가 차기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 뒤를 이어 가르시아(Lizardo García, 1905-1906)가 대통령에 오르자 급진 자유주의자들은 가르시아가 진정한 자유주의로부터 멀어졌다고 여겼다. 결국 알파로는 새로운 혁명을 주도했고 1906년에서 1911년까지 두 번째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급진 자유주의를 대변하던 알파로주의자 정권들은 에콰도르를 다방면에서 변화시켰다. 카카오 농산물 수출경제의 막이 오르고, 이에 따른 막대한 수익은 대농장과 상업을 키웠으며 민간은행과 초기의 제조업을 일으켜 해안지역의 과두세력을 강화했다. 또한 기업의 성장을 촉진하고, 도시화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 보호주의 산업을 장려했으며, 노동자들의 급여 관계가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요인들은 원주민, 농민, 몬뚜비오의 노동 예속 조건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데 모종의 기여를 했다. (Paz y Miño 2012). ‘와시뿡고(huasipungo)’와 ‘아리마스고(arrimazgo)’5) 라는노동제도가 고원지역에서 주를 이루었다면 해안지역에서는 일종의 날품팔이인 ‘셈브라두리아(sembraduría)’, ‘뻬오나헤(peonaje)’, ‘렌디시온(rendición)’등 일반적인 보상이란 개념의 지불방식의 노동이 주를 이뤘다. 이러한 노동에 대해 금전 지불 형태의 해안지역 대농장 등에서의 노동은 내륙 고원지역으로부터 상당수의 원주민 또는 서민층들의 노동이민을 야기했다6). 당시 봉건주의 사회 특성상 농민들의 자유로운 이동은 어려웠으나 1908년 완성된 과야킬과 키토를 잇는 철도건설 사업 등이 농민과 원주민의 이동을 부추겼고 노동자들은 급료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과야킬 인근지역으로 까지 카카오 재배지의 경계가 확대되면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급료 개념의 노동시장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는 노동 수요의 증가와 자유주의혁명 등의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Chiriboga 1980, 221). 노동에 대한 보상을 급료의 형태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국가의 근대화를 향한 커다란 진전이며,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노동 보상이 해안지역에서 시작된 까닭에 노동자 계층이 출현하였고 급진성향의 자유주의가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7). 이러한 급진주의적인 변화는 당시에 후진 농업 국가의 발전을 위한 근대화와 자본주의 프로젝트로 풀이된다. 통치자로서 알파로의 정책실현 방향은 사회적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알파로주의는 급진 자유주의로서 대지주 세력의 권력과 신흥자본가 엘리트층의 이익에 편승하고 사회적 비전이 없는 온건 자유주의와는 다른 것이었다(Paz y Miño 2012).
급진주의 사회정책은 지역의 과두세력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고원지역과 해안지역의 강력한 대지주들에게 노예 조건하에 있는 원주민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지배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조치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전통질서를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대지주들과 기업가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경제 환경에도 불구하고 알파로가 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잠재적 인물로 생각했다. 급진 자유주의자들을 신뢰하기 어려운 정치인으로 간주한 것이다. 결국에는 승리의 자유주의에 자양분을 공급해온 과두세력 그룹들까지도 온건파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익 보호를 위해 더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알파로주의에 대한 저항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엘로이 알파로에 대항해서 결코 싸움을 포기한 적이 없다. 교회의 상층부와 광신적 사제들은 교단에서 자유주의자들을 비밀조직원, 이단자, 악마들이라고 비난했고, 몇몇 주교들은 종교와 신에 대항해서 도발하는 세력을 청산하고자 게릴라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1911년은 급진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치명적인 한해가 되었다. 알파로 대통령의 후계자 선출과 관련하여 알파로 반대파로 정권의 교체를 추구하는 토호들이 출현했고 온건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쁠라사 전 대통령 추종자들도 알파로주의가 최종적으로 패퇴하기를 갈망했다. 알파로는 에스뜨라다(Emilio Estrada)를 지지하여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후일 온건 자유주의 노선으로 기울자 지병이 악화된 것을 인지한 알파로는 그의 사퇴를 요구했다. 알파로는 자신의 후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며 독재에 대한 의향을 표출했다. 키토에서 시민운동이 발생하자 에스뜨라다는 칠레 공사관에 은신한 뒤, 곧바로 파나마로 피신했으나 결국 1911년 12월에 사망했다. 공석이 된 행정부를 프레일레(Carlos Freile Zaldumbide)가 권한대행으로 취임했다.
이러한 시국 하에 해안지역에서 새로운 반란이 일어났으며 북부지역에서는 알파로의 조카 플라비오 알파로(Flavio Alfaro)가 남부지역에서는 몬떼로(Pedro Montero)가 선전포고했다. 알파로는 반란을 지휘하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된 상태에서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서 나섰다가 반란에 가담하게 되었다. 패배의 결과로 알파로와 주동자들이 체포되었고 프레일레 정권은 포로들을 기차로 키토까지 이송하여 감옥에 투옥시켰다. 투옥된 포로들을 살해하고 키토 시내부터 외곽까지 시체를 끌고 다니다가 엘 에히도(El Ejido)에서 불에 태워버렸다. 알파로는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아하게 된 것이다. 역사학자 빠레하(2007)는 이 사건을 “야만적 화형(hoguera bárbara)” 이라고 지칭했다.
자유주의혁명은 현재 에콰도르에서 가장 광범위한 역사적 유산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알파로의 자유주의혁명은 사회를 비종교화하고 국가를 근대화하며, 자본주의 관계를 촉진했다. 또한 시민들의 폭넓은 자유와 교회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을 확보하는 규약을 설정하고자하는 개혁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식인 계층, 해안지역 신흥자본가 계층, 대농장 그룹, 지주 그룹, 또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도심수공업자, 몬또네라 게릴라를 형성했던 농민 군중, 아프리카계흑인 등 여러 분야에서 각 그룹의 이익은 한계에 다다르기도 했다(Antón. S. 2012, 15-16). 자유주의혁명이 노예제도의 폐지와 원주민들의 노동착취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과 자본가들 간의 모순과 이익을 해결하는데 어려움을 야기하고 있었다(Ayala 1988).
에콰도르에서는 자유주의혁명이 보수주의 체제의 패권에 대항한 투쟁의 정점이었다. 자유주의혁명은 19세기에 일어난 가장 중대한 사건이고 역사적으로 19세기를 이렇게 마감한다는 것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1912년 야만적 화형으로 알파로와 핵심인물들이 사라지자 에콰도르자유주의의 급진파가 폭력을 통해서 권력으로부터 격리되었으며 당시까지 국내에서 추진했던 구조적인 변화를 위한 계획들도 자연스럽게 무산되었다(González 1997,180). 이로 인해 자유주의혁명은 온건파의 2단계(1912-1925)로 진입하면서 1916년부터 공개적으로 금권정치가 시작되었고, 알파로 혁명이 추진하던 사회와 민중의 방향성도 상실되었다. 금권정치 단계에서 자유주의 국가는 과야킬 은행과두세력과 경제적 동맹을 맺은 그룹의 도구로 변모했으며 부정선거가 고착화됨은 물론 카카오 수출도 위기를 맞게 되면서 혼란은 가중되었다. 따라서 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은 확산되었고 자유주의 프로젝트 또한 추진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에콰도르의 자유주의혁명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는 정치와 이념이라는 분야에서 교회와 국가를 완전히 분리한 것이다(Núñez 1990, 160). 이러한 이념과 업적은 국경을 넘어 라틴아메리카에 전역으로 확대되어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강제했다. 19세기 중반에 멕시코와 칠레, 아르헨티나에서까지 자유주의가 승리한 반면 여타 국가에서는 승리가 늦어졌다. 콜롬비아에서는 20세기에도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간의 양당 대결구도가 계속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조건은 다르지만 대립은 이어지고 있다.
2. 과야킬 과두세력의 중앙정치 진출과 정치세력화
카카오 붐의 태동과 함께 1880년에서 1900년 사이에 과야킬의 과두지배세력은 질적인 변화를 향한 역사적인 전환을 시작한다. 봉건적인 형태의 지주 과두세력에서 자본가 과두세력으로의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점진적인 이동은 20세기 중반이 시작될 무렵 정점에 달했으며 지역사회가 가지고 있던 자본주의 이전의 모습들이 점차적으로 제거되기 시작했다(Nuñez 1990, 155). 해안지역의 과두지배세력 간에도 전통적인 족내혼이 계속됐지만 내륙 고원지역의 과두지배세력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위해 주변의 신흥 부유가문들과 혼인 동맹을 맺었다. 또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한 자본가들은 자유당(Partido Liberal)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도 달성하고자 했다.
카카오 기반 과두세력은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고 보수주의 정부에 대항하여 투쟁하던 알파로 장군을 지원했다. 자유주의혁명의 주체 세력으로 여러 정치적 그룹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그룹으로 첫 번째, 해안지역 토호들을 들 수 있다. 투쟁을 위해 농민들을 조직하고 자금을 지원한 지주들과 몬뚜비오 사회의 리더들로 이루어진 그룹이다. 두 번째로는 이주 혁명가들로 라틴아메리카 다른 국가에서 투쟁했거나 혁명을 모의한 전문 혁명가들로 구성된 그룹이다. 마지막으로 그란 카카오라 불리는 대농장주들의 그룹, 상인 그룹과 은행가 그룹으로 구성된 과야킬 출신의 자유주의 자본가계층이다. 해안지역 토호들 중에는 프랑꼬(Manuel Antonio Franco)와 몬떼로(Pedro Jacinto Montero Maridueña) 장군 등이 있으며, 이주한 혁명가그룹에는 알파로(Eloy Alfaro), 메다르도 알파로(Medardo Alfaro), 쁠라사(Leonidas Plaza Gutiérrez), 알파로 이 쁠루따르꼬(Flavio Alfaro y PlutarcoBowen)가 포함된다. 그리고 자본가 계층에는 그란 카카오라 불리는 대농장 지주 가문으로 아스삐아수(Azpiazu), 세미나리오(Seminario), 모를라(Morla), 두란 바옌(Durán Ballén)과 로살레스(Rosales)가 있고, 상인 그룹은 아빌레스(Avilés), 로블레스(Robles), 까르보(Carbo), 가르시아(García)와 에스트라다(Estrada) 가문 등으로 구성되며, 은행가 그룹에는 아로세메나(Arosemena), 로까(Roca), 우르비나 하도(Urbina Jado), 바께리소 모레노(Baquerizo Moreno)와 가메(Game) 가문 등이 대표적이다.
자유주의혁명 세력은 3개 파벌로 분열된 가운데에서도 투쟁을 계속하여 대농장주들을 패퇴시키고, 자본가 계층의 지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알파로의 프로젝트는 민주주의 참여와 자유의 표출을 위해 평등을 희구하는 그룹인 주로 몬뚜비오인, 해안지역 거주인, 고원지역 원주민들로 구성된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1908년에는 국가 근대화 프로젝트의 기초를 다지고 국민통합을 위해 알파로는 세계로 연결되는 새로운 에콰도르로 출발하겠다는 뜻을 내포하는 과야킬에서 키토를 잇는 철도를 개통했다(Guerra 2011)8).
해안지역의 경제는 카카오 수출 증가로 대규모의 자본 축적이 용이해졌고, 이는 곧 과야킬에 여러 개의 민간은행의 설립으로 이어져 금융 중심지로써 지역 과두세력의 성장과 강화에 필요한 자양분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40년 동안 지속된 카카오 산업의 부흥과 국제교역의 확대는 과야킬의 거대상인 그룹의 과두세력과 최대 자본가인 은행가들 중심의 무소불위의 과두계급을 만들어냈다. 과야킬 자본가 과두세력은 사적인 부의 축적을 위해 국가의 권력을 이용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러 공적 자금을 직접적으로 수취하는데 그치지 않고 특혜 계약, 화폐의 평가절하, 관세율의 조정을 통해서도 이익을 취했다.
은행가 과두세력은 국가의 공공재정을 지원하면서 국가와 과야킬의 민간 상업은행 간에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줄 정치인을 선정하여 국가의 통치자로 추대하는 형태의 자유주의 금권정치(plutocracia o bancocracia)를 만들어냈다. 에콰도르에서는 금권정치를 전통적으로 ‘방꼬끄라시아(Bancocracia, 은행가정치)’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자유혁명 초기 단계부터 경제적 결정권은 카카오 수출을 통해서 이룩한 은행과 상업부문의 거두들의 손에 있었다. 과야킬 은행에 대한 국가의 채무가 커질수록 은행권의 지배력은 높아져만 갔다(Flores Barzola 2015, 48-49). 여기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금권정치의 대표적인 기관으로는 농상은행(BCA)9)과 과야킬 농업인연합회(Asociación de Agricultores de Guayaquil)를들 수 있다. 1912년 9월 1일부터 에콰도르는 당시에 내륙고원지역의 대지주 라소(Lasso) 가문의 딸인 아벨리나(Avelina)와 혼인으로 결속을 유지하고 있던 쁠라사(Leonidas Plaza Gutiérrez) 정부와 농상은행 간의 동맹을 통해 금권자유주의에 의해 통치되었다(Falconí 2012). 따라서 당시에는 국가가 은행의권력 밑으로 떨어졌으며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격차는 더욱 심각해져갔다. 각 은행마다 고유의 지폐를 발행하면서 통화체계에 심각한 혼란이 야기되었다. 과야킬의 은행가들에 의해서 정부의 최고 통치자로 앉혀진 바께리소(Alfredo Baquerizo Moreno, 1916-1920), 따마요(José Luis Tamayo, 1920-1924),꼬르도바(Gonzalo Córdova, 1924-1925) 등 정권은 그들의 청탁을 받아야만했고, 게다가 자신의 영리까지 취하면서 국가는 백척간두의 상황에 처해있었다.
고원지역의 대지주, 과야킬의 은행가와 상업자본가로 구성된 권력자들의 그룹 형 지배구조인 금권정치의 정부 시스템은 부정선거와 초인플레 등을 야기하면서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다10). 빈곤, 정치적 위기와 무질서 등의 심각한 상황을 인식한 군사최고위원회는 1925년 7월 5일 봉기하여 꼬르도바(Gonzalo Córdova) 정권을 무너뜨렸다. 모반을 일으킨 시기인 7월의 이름을따서 훌리아나혁명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러한 혁명의 여파는 과야킬을 비롯하여 전국으로 급속하게 펴져 보수주의의 반응을 유발했고 실질적인 개혁을 가져온다. 이는 13년에 걸친 금권정치에 기반 한 통치에 지쳐있었던 국민의 반발이며 당시의 강력한 과두지배세력에 대한 불만이 봉기를 통해 표출된 것이다. 훌리아나혁명은 새로운 정치제도 이행과 과야킬 농상은행 청산을 가져온 은행과 화폐의 개혁으로 카카오 경제 기반의 자유주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González 1997, 180). 국가가 다시 경제적 역할을 주도하게했고, 과두지배세력과 대지주 체제의 극복을 시도하면서 국가는 노동자와 민중들에 대한 배려를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수혜는 중간계층 특히 관료들에게 돌아갔고 국가의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의 주축에는 과야킬의 은행들과 해안지역의 언론이 있었으며 이에 고원지역의 과두세력도 합세했다. 반면에 혁명을 지원하는 세력으로는 과야킬을 포함한 전국의 노동자와 민중들, 교사와 학생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단체들이 있었다. 이렇듯 훌리아나혁명이 독립투쟁과 1895년 자유주의혁명 이후에 에콰도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였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과야킬의 과두지배세력이 카카오 경제를 기반으로 은행가와 상업자본가 계층으로 확대 발전해왔음은 물론 에콰도르의 경제를 지탱하고 정치적으로도 키토 과두세력과 경쟁관계를 때로는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지역주의의 한 축으로 대변된다. 오늘날까지 에콰도르의 정치는 키토와 과야킬 간의 경쟁구도를 이어가고 있으며, 경제는 여전히 과야킬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Ⅵ. 맺음말
전 세계의 대부분 국가들은 정도는 다르지만 서로 다른 지역 또는 대도시들 간의 경쟁 관계에서 파생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멕시코시티와 과달라하라 등의 도시들을 예로들 수 있다. 그러나 각 도시들마다 경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서로 다르다. 이들 도시 못지않게 지역주의에 의한 경쟁과 반목 관계에 있는 도시가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와 최대 상업도시 과야킬이다.
에콰도르의 지역주의, 즉 보수주의의 성지로서 고원지역의 대지주 중심의 귀족 계급이 정주했던 키토와 해안지역에서 카카오 경제를 통해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었던 자유주의자들의 활동무대인 과야킬 간의 대립과 갈등은 1830년 최초로 자유와 주권 국가로서 출발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플로레스 초대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자 자유주의 사상을 추구하던 과야킬 출신의 로까푸에르떼가 정권을 이어받으면서 시작된 치열한 경쟁은 두 거두 정치인이 죽은 뒤에도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고원(Sierra)과 해안(Costa)이라는 이름은 공화정 출범에서부터 에콰도르에서 존재해왔던 문화와 지역적인 정체성과 지역주의를 대변한다. 오늘날까지도 양 지역 간의 대립과 경쟁은 에콰도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등 전 분야에 걸쳐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지역주의는 이념적인 색채로 나타나서 보수주의-키토-세라노(serrano, 고원지역 사람), 자유주의-과야킬-꼬스떼뇨(costeño, 해안지역 사람) 라는 용어로 굳어졌다. 양 지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에 대해 자신감을 내보이며 상대방을 경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렇듯 에콰도르의 전 분야에서 팽배해있는 지역주의를 더 상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키토 중심의 과두세력에 대항하는 또 다른 과두세력의 출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본 연구를 통해서 에콰도르의 지역주의를 심화시킨 결정적인 요인 중의 하나로 카카오 경제와 붐 시대를 거치며 자본의 축적을 통한 과야킬의 과두세력이 형성, 확대되었으며, 알파로가 주도한 자유주의혁명 또한 과야킬의 자본가들과 노동자계층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지역주의는 안데스 산맥의 북남 방향으로 펼쳐진 고원지역에서 당시 경제의 근간이었던 대지주들과 귀족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고원지역의 과두세력에 견줄만한 여타 지역의 과두세력은 미미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에 카카오 교역이 확대되면서 과야킬의 상인들과 재배업자들이 불법적으로 다른 식민지 항구를 통한 우회수출을 하기 시작했다. 1789년에는 왕령을 통해 과야킬 항구에서부터 카카오 재배와 수출을 허가함으로써 과야킬이에콰도르의 경제 중심지로 부상했고, 키토의 과두세력과 경쟁하면서 자본을 축적하고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의 확산과 함께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약 40년간 지속된 카카오 붐이라 불리는 원자재 수출 경제가 경제적으로는 에콰도르를 세계경제에 편입시켰고, 카카오 대농장과 상업지역 및 초기의 제조업 등에서 급료라는 개념의 노동제도의 시행을 가져왔으며, 자본가 계층과 노동자 계층의 형성에 기여했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1895년 알파로의 자유주의혁명을 지원했으며, 이를 통해서 전통과의 단절을 야기한 노예제의 폐지, 교회와 국가를 분리시켰고, 카카오 기반의 과야킬 과두지배세력이확대, 발전되어 상업자본가 과두그룹과 은행가 과두세력을 만들면서 대지주 중심의 키토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양대 축을 형성했다. 또한 쁠라사 장군과 우르비나 농상은행 소유주를 중심으로 하는 금권정치라는 폐단을 가져왔다.
1920년대 병충해의 확산은 카카오 재배농장의 붕괴를 초래했으며 이는 해안지역과 고원지대의 과두세력 집단을 약화시켰으며 1925년 훌리아나혁명과 같은 의미 있는 정치개혁을 가져와 근대국가의 형성과 중앙은행 창설을 비롯하여 국가화페인 수크레(sucre)의 정착을 가능하게 했다.
카카오 수출 경제는 국제시장의 등락과 운송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국내적으로는 과야킬에 집중된 경제활동과 일부 경제 엘리트 그룹에 종속되는 폐단을 안고 있었다. 카카오 붐이 가져온 경제적 번영은 상업자본가 과두세력과 은행가 과두세력의 강화를 가져왔으나 국가의 근대화를 위한 산업의 발전과 연계되지 못한 것은 에콰도르가 원자재 수출경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큰 원인을 제공했다.
지역주의는 양 지역의 과두세력 경쟁을 심화시켰고, 카카오 경제가 과야킬의 과두세력이 에콰도르에서 주도권을 잡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50년에서 1965년까지 이어지는 바나나 붐으로 이러한 추세는 이어졌으나, 1970년대 초반 석유 붐이 일어나면서 아마존 유역의 내륙지역에 원유 탐사와 채굴이 본격화되면서 키토 과두 지배세력이 경제적 주도권을 되찾게 된다. 이렇듯 에콰도르의 역사는 키토와 과야킬 간의 경쟁과 대립의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향후 연구를 통해 바나나 붐과 석유 붐이 에콰도르의 정치와 경제 발전에 기여한 것 이외에도 지역주의 심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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