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카공화국의 메렝게와 국민정체성 형성
초록
도미니카공화국의 음악 메렝게는 트루히요 시대(1930-1960)의 반아이티주의 국민정체성을 형성하는 수단이었다. 이 당시 메렝게에 대한 도미니카공화국의 문화담론은 ‘스페인 특성’(hispanidad)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계 카리브해 사람들의 음악 전통을 간과하고 메렝게가 도미니카공화국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더불어 트루히요 독재 정권은 메렝게를 국민음악으로 규정하고, 음악적 혁신 또는 근대화를 추구했으며, 악단,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대중 매체를 통해서 메렝게를 전국적으로 보급했다. 이로써 메렝게는 도미니카공화국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문화가 되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트루히요 시대가 요구하는 국민정체성 형성에 일조하게 되었다.
Abstract
The merengue was a cultural tool to forge the anti-Haiti national identity in the era of Trujillo. At that time the Dominican discourse on the merengue emphasized the tradition of hispanicity(hispanidad), downplaying the influences of the Afro-Caribbean musical traditions, and argued that the merengue had originated in the Dominican Republic. The regime of Trujillo decreed that the merengue was the country’s national music, and it modernized the merengue and made it diffused in people's daily life through various media such as bands, radio and TV. This way the merengue constructed the Dominican national identity in the era of Trujillo.
Keywords:
Merengue, National Music, National Identity, Era of Trujillo, Dominican Republic키워드:
메렝게, 국민음악, 국민정체성, 트루히요 시대, 도미니카 공화국Ⅰ. 서론
라틴아메리카 대중음악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눈에 띠게 역동적인 양상을 보였다. 창작의 측면에서 기존 음악은 거듭 변모했고, 부단히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등장했다. 수용이나 소비의 측면에서도 라디오, 음반, TV 같은 혁신적인 대중매체의 등장과 인적, 물적 교류의 증대에 힘입어 지방 음악은 전국적인 음악이 되고, 국경을 넘어 인접국으로 퍼져나갔으며, 결국에는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음악에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국적도 없고 국경도 없는데,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음악 가운데 브라질의 삼바를 비롯하여 몇몇 음악에는 국민음악(música nacional)이라는 별칭이 붙는다. 국민음악이란 대다수 국민이 애호하는 음악을 뜻하는 비유일 수도 있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이런 통상적인 의미를 넘어서 한 국가의 국민정체성(identidad nacional)을 담보하고 있는 음악을 가리킨다.
그런데 라틴아메리카처럼 한 국가 안에도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곳에서 어떻게 특정 음악만이 국민정체성을 담보한 국민음악이 되었을까? 더구나 개인이든 집단이든 정체성이란 시간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고, 한 사회 내에도 다양한 정체성이 있는데, 어떻게 특정 음악이 국민정체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국민음악이라고 흔히 이야기하는 멕시코의 마리아치 음악, 브라질의 삼바, 도미니카공화국의 메렝게를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1930년대를 전후로 고조된 민족주의가 하나요, 이즈음 세 나라 모두 권위주의 체제를 확립했다는 것이 둘이요, 멕시코의 ‘혁명제도화’, 브라질의 신국가, 도미니카공화국의 새 조국(Patria Nueva)이라는 정치 구호에서 보듯이 이전과는 다른 국가사회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이 셋이다. 이상의 세 가지 공통점과 국민음악을 연관지어보면, 다소 성급한 언명일지 모르겠으나, 국민음악이란 민족주의 성향의 라틴아메리카 권위주의 정권이 국민형성의 한 방편으로 활용한 대중음악을 일컫는다.
20세기 전반기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국민정체성 형성에서 대중음악의 역할은 국가에 따라서 편차가 있었다. 멕시코의 경우는 벽화운동이라는 혁신적인 방편이 있었고, 또 마리아치 음악은 멕시코혁명과는 거리가 먼 보수적인 민족주의를 대변했기 때문에 정치엘리트는 마리아치 음악을 통한 “멕시코 전형성의 재생산에 수동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이성형 2009, 152). 브라질의 경우는 제툴리오 바르가스 정권이 추구하는 브라질특성(brasilidade)과 대중문화, 특히 삼바 작곡가들이 지향하는 브라질 국민정체성의 방향에 차이가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다양한 사회그룹이 간여했기 때문에 정치엘리트의 기획은 끊임없는 재조정 대상이었다(Vianna 1999, 112).
이에 비해, 도미니카공화국의 메렝게는 별다른 이론(異論) 없이 국민음악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이는 메렝게가 도미니공화국의 국민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는 음악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프리츠가 「음악과 정체성」이라는 글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음악이 우리를 상상의 문화 담론 속에 위치시키는 […]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정체성 감각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메렝게를 통해서 도미니카공화국의 국민정체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이 글에서는 트루히요 시대(era de Trujillo), 다시 말해서 도미니카공화국의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독재정권 시기(1930년-1961년)에 등장한 메렝게 기원 담론, 국민음악으로서 메렝게 및 메렝게의 정치적 이용을 순서대로 논함으로써 메렝게와 도미니카공화국의 국민정체성 형성의 관계를 폭넓게 살펴보고자 한다.
Ⅱ. 반아이티주의와 메렝게 기원 담론
1. 반아이티주의
무릇 모든 기원 찾기 논의가 그러하듯이, 메렝게의 기원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여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현재 여러 연구자가 동의하는 대강에 따르면, 메렝게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아마도 19세기 푸에르토리코, 쿠바, 아이티, 도미니카공화국 같은 카리브해 지역에서 유럽, 아프리카, 원주민 음악이 혼합되어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메렝게의 기원 논의를 이렇게 대중음악사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일반적인 경향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 적어도 트루히요 시대에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전개된 메렝게 기원 논의는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라고 흔히 일컫는 반아이티주의(antihaitianismo)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반아이티주의란, 간단하게 말하면, 트루히요 시대에 확립된 민족주의 담론으로, 도미니카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살고 있는 아이티의 아프리카계 사람과 문화를 배척하고, 도미니카공화국의 스페인계 사람과 문화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1930년 형식적인 대통령선거를 통해서 권좌에 오른 트루히요는 군과 경찰이라는 물리력을 동원하여 그동안 도미니카공화국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카우디요를 제압하는 한편, 담배, 설탕 등 1차산품의 수출 호조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경제 안정을 이룩했다. 이러한 정치 탄압과 경제 안정을 바탕으로 1936년에는 수도 산토도밍고를 트루히요시로 개명할 만큼 권력 독점화에 성공한 트루히요는 1937년 10월에 이르러 도미니카공화국의 국경지역에 살고 있는 아이티인 약 1만7천명을 학살했다.1) 이 사건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1930년 트루히요가 집권한 후에도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는 별다른 갈등 없이 우호관계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1935년과 1936년에 트루히요와 아이티 대통령 스테니오 뱅상(Sténio Vincent)은 몇 차례 정상회담을 열고, 국경선 문제를 다룬 합의서에 서명까지 했기 때문이다(Sagás 2000, 45).
반이아티주의는 바로 이 1937년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등장한 담론이다. 학살 사건 이후에 트루히요 정권의 이데올로그인 마누엘 아르투로 페냐 바트예(Manuel Arturo Peña Batlle), 호아킨 발라게르(Joaquín Balaguer), 앙헬 로사리오 페레스(Angel Rosario Pérez), 에밀리오 로드리게스 데모리시(Emilio Rodríguez Demorizi) 등은 각각 정치, 인종, 종교, 문화 측면에서 아이티를 적대시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논리를 개발하고 또 확산시켰다. 이 가운데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대우받던 페냐 바트예는 1942년에 행한 유명한 강연 ‘정책의 의미’(El sentido de una política)에서 1937년 학살을 트루히요의 치적이라고 평가했다. “우리 현대사를 정점에 올려놓은 인물[트루히요]의 단호한 조치 덕분에”, 바꿔 말해서 1937년 학살 덕분에 “이전의 어떤 정치지도자도 주목하지 못한, 국가의 해묵은 난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Peña Batlle 2009, 418). 그리고 도미니카공화국 사람들은 ”스페인인 후손이고, 기독교와 가톨릭을 신앙하는 국민”(nación española, cristiana y católica)인데(Peña Batlle 2009, 423),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이티인은 “종족적으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순수한 아프리카 인종”이며(Peña Batlle 2009, 424), 부두교라는 치유 불가능한 “종교 차원의 인종적 정신신경증”을 앓고 있다고 주장했다(Peña Batlle 2009, 425). 이처럼 페냐 바트예는 인종적인 대립(스페인계 대 아프리카계 또는 백인 대 흑인)과 종교적인 대립(가톨릭 대 부두교)을 통해서 배제의 원리인 반아이티주의와 통합의 원리인 스페인유산(hispanidad)과2) 가톨릭신앙(catolicismo)을 결합시켜, 아이티의 아프리카계 사람과 문화를 배척하고 도미니카공화국의 스페인계 사람과 문화를 수호해야 한다고 설파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도미니카공화국에서는 스페인유산이나 가톨릭신앙을 부정하는 사람은 적(아이티인)으로 간주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매국노로 여겼다.
2. 메렝게라는 단어의 기원 담론
트루히요 시대의 메렝게 기원 논의도3) 이러한 반아이티주의의 일부였다. 아프리카 유산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로지 스페인유산만 강조했기 때문이다.
먼저, 메렝게라는 단어의 기원 논의부터 살펴보면, 친트루히요 민속학자 플레리다 데 놀라스코(Flérida de Nolasco)는 1939년에 출판한 『산토도밍고의 음악』(La música en Santo Domingo y otros ensayos)이라는 책에서 메렝게라는 말은 “백설탕과 달걀흰자로 만든 과자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춤의 성격이 가볍고 경쾌하며 리듬이 간결하여 마치 달걀흰자를 젓는 듯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재인용 Coopersmith 1949, 19) 다시 말해서, 프랑스어 머렝(meringue)을 스페인어로 메렝게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코로미나스도 『간략한 스페인어 어원사전』(Breve diccionario etimológico de la lengua castellana)에서 “메렝게: 1760년 경 사용. 기원은 불확실하나 1739년 프랑스어 머랭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기술하고 있어서 놀라스코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듯하다.
그러나 놀라스코의 견해는 도미니카공화국 국내외에서 지속적인 반론에 부딪히고 있다. 도미니카공화국 국내의 반론은 트루히요 시대의 대표적인 메렝게 음악가 루이스 알베르티(Luis Alberti)로부터 시작되었다. 알베르티에 따르면, 카리브해의 다른 국가에서는 머렝을 오븐에 구워서 만든 과자를 메렝게라고 부르지만 도미니카공화국에서는 수스피로(suspiro), 다시 말해서 ‘한숨’이라고 부른다.4) 따라서 메렝게가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디저트로 먹는 과자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민속학자 프라디케 리사르도(Fradique Lizardo)는 아마도 쿠바나 푸에르토리코에서 이 음악이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들어올 때 메렝게라는 이름도 함께 따라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Glass Santana 2005, 20).
또 다른 견해는 1970년대에 대두되었다. 이 시기에 카리브해 문화에서 아프리카 문화의 영향을 읽으려는 연구가 국제적으로 활성화됨에 따라서 메렝게라는 단어의 아프리카 기원설이 등장한 것이다. 이를테면, 아이티의 역사학자 장 푸샤르(Jean Fouchard)는 1973년에 출판한 『메렝게, 아이티의 국민 춤』이라는 책에서 메렝게의 기원은 프랑스의 식민지이던 생도맹그(현재의 아이티)이며, 모잠비크의 춤 ‘톰통 무렝게’(tomton mouringue)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했다(재인용 Quintero Rivera 2009, 219). 이후로 아프리카 기원설은 프라디케 리사르도, 폴 아우스테를리츠(Paul Austerlitz)를 비롯하여 여러 학자의 지지를 받고 있다.5) 한편, 푸에르토리코의 언어학자 마누엘 알바레스 나사리오(Manuel Álvarez Nazario)는 1974년에 출판한 『푸에르토리코 스페인어에 나타난 아프리카계흑인 요소』(El elemento afronegroide en el español de Puerto Rico)라는 책에서 메렝게라는 단어는 아이티, 마르티니크, 과들루프와 같은 프랑스어권 카리브해 섬에서 프랑스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단어가 아마도 아프리카 반투어 마링가(maringa)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Pérez de Cuello & Solano 2003, 136-137).
이상의 여러 견해는 모두 추정일 뿐, 구체적인 문헌 증거로 입증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메렝게라는 말의 정확한 어원과 뜻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메렝게라는 단어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본질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 단어의 유럽 기원설과 아프리카 기원설은 메렝게를 포함하여 카리브해 문화 전체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는 문제이기 때문에 담론 투쟁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담론 투쟁의 서막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 트루히요 시대에 등장한, 메렝게라는 단어의 유럽 기원설인데, 이 기원설이 스페인유산을 강조하는 반아이티주의의 일부라고 단언하기는 아직 이르다. 유럽 기원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모두가 반아이티주의에 동조한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트루히요 시대의 메렝게 기원 담론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3. 메렝게라는 음악의 기원 담론
메렝게라는 음악의 기원도 메렝게라는 단어의 기원만큼이나 불분명하다. 16세기 이래 스페인계, 프랑스계, 영국계 주민과 아프리카 흑인노예가 공존하던 카리브해 지역의 문화에서 아프리카 요소를 배제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놀라스코는 메렝게를 포함하여 “도미니카공화국의 민속음악은 오로지 스페인 음악에서 파생했다”고 단언하고, 훌리안 리베라(Julián Ribera)가 1922년에 출판한 13세기 스페인 시가집 『칸티가 음악』(La música de las Cantigas)에 근거하여 도미니카공화국 서남지방의 음악 카라비네(carabiné)의 원형이 13세기 칸티가라고 주장했다(Davis 1976: 22). 그런데 훌리안 리베라의 책은 중세 스페인 음악에 대한 아랍 음악의 영향을 다루고 있고(Arraiza 1927, 263), 리듬 구조가 유사하다고 해서 현재의 카라비네 원형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놀라스코의 주장은 스페인유산만이 도미니카공화국 문화의 모태임을 증명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한 견강부회라고 비판 받고 있다(Coopersmith 1949, 19, Davis 1976: 318, Pérez de Cuello & Solano 2003, 266).
이러한 놀라스코는 1956년 출판한 『세계 민속에서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en el folklore universal)라는 책에서는 도미니카공화국의 후안 바우티스타 알폰세카(Juan Bautista Alfonseca) 대령이 1855년에 맨 처음으로 메렝게 음악을 작곡했다고 주장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후안 바우티스타 알폰세카가 산토도밍고[도미니카공화국]에서 새로운 양식을 창조했다. 스페인어권아메리카(Hispanoamérica)에서 보편화된 춤의 리듬과는 상이한 면모의 리듬이었다. 이러한 변주를 처음부터 ‘메렝게’라고 불렀다. 그리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화되고 싶었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개인 창작인 이 춤의 양식은 도미니카공화국 사람들의 공유재산이 되기에 이르렀다(Nolasco 1956, 323).
이런 주장의 근거로 놀라스코는, 1848년에 출생한 돈 페데리코 엔리케스 이 카르바할(Don Federico Henríquez y Carvajal)이라는 사람이 ‘후아나 킬리나’(Juana Quilina)로 시작되는 알폰세카의 메렝게 한 소절을 들려주었다면서 1938년에 채록한 악보를 소개했다. 이에 대해 카타나 페레스 데 쿠에요(Catana Pérez de Cuello)는 구전은 기억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면서, “놀라스코가 채록한 <후아나 킬리나>의 리듬 라인은 현재 연주하는 메렝게의 고유 리듬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Pérez de Cuello & Solano 2003, 265).
그러나 친트루히요 역사학자인 에멜리오 로드리게스 데모리시는6) 트루히요 시대인 1940년대와 1950년대 발표한 글을 모아 1971년에 출판한 『산토도밍고의 음악과 춤』(Música y baile en Santo Domingo)에서 놀라스코의 주장을 이어받아 알폰세카가 ‘메렝게의 아버지’라고 재차 강조했다.
후안 바우티스타 알폰세카 대령은 [도미니카공화국이] 아이티의 포로 신세가 된 암울한 시기와 도미니카공화국 초창기에 가장 유명한 대중적 성격의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었다. 1928년 페르난도 루에다는 “알폰세카는 크리오요 춤의 아버지였다”고 기술한 다음에 “아이티 점령기에는 오로지 카드리유, 미뉴에트, 폴카, 왈츠만 연주하고 춤추었지만 1844년 초기부터는 알폰세카 대령이 최초의 크리오요 음악을 작곡하고, 이를 메렝게라고 불렀다”고 덧붙였다(Rodríguez Demorizi 1971, 176).
로드리게스 데모리시가 전거로 인용한 루에다의 글은 전해오는 이야기를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의심스럽다(Pérez de Cuello & Solano 2003, 270). 그런데도 로드리게스 데모리시는 루에다의 글에 근거하여 “메렝게의 도미니카공화국 특성(dominicanidad)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공화국 초기인 1844년부터 1855년 사이에 춤의 한 양식으로 태어났다”고 확언한다(Rodríguez Demorizi 1971, 125).
이처럼 로드리게스 데모리시가 1844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해가 도미니카공화국의 공식 역사에 얘기하는 독립연도이기 때문이다.7) 그리고 도미니카공화국특성을 언급한 이유는 메렝게의 푸에르토리코 기원설을 반박하려는 의도이다. 1951년 푸에르토리코 학자 세사레오 로사 니에베스(Cesáreo Rosa-Nieves)는 「푸에르토리코 춤에 관한 소묘」(Apuntes sobre los bailes en Puerto Rico)라는 글에서 메렝게는 스페인의 콘트라단사(contradanza)에서 파생한 쿠바의 우파(upa)가 19세기 초에 푸에르토리코로 건너와서 1842년에서 1843년 사이에는 왈츠 등 전통적인 음악을 완전히 대체했는데, 이 음악을 메렝게라고 불렀다고 주장했다(Rosa-Nieves 1974, 18). 다시 말해서, 메렝게는 푸에르토리코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8) 로드리게스 데모리시는 로사 니에베스의 푸에르토리코 탄생설을 반박하려는 목적으로 “메렝게의 기원은 아직도 오리무중이지만 아이티에서 기원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전제하고(Rodríguez Demorizi 1971, 125), “메렝게는 도미니카공화국 고유 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Rodríguez Demorizi 1971, 133). 메렝게는 아이티의 점령에서 벗어나려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독립운동과 함께 탄생한 고유의 음악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트루히요 시대의 메렝게 연구는 단어의 기원이나 음악의 기원에서 오로지 스페인이나 유럽의 요소만 강조하고, 나아가 메렝게의 탄생과 도미니카공화국 독립을 연관시킴으로써 민족주의를 고취했는데, 이는 트루히요 시대의 ‘아프리카 흔적 지우기’의 일환이었다. 아프리카 흔적 지우기의 가장 유명한 예는 도미니카공화국의 신분증에서 드러난다. 반아이티주의는 도미니카공화국 내에 존재하는 아프리카계와 물라토를 인정할 수 없기에 신분증에 각각 원주민(indio)과 메스티소라고 표기함으로써 현실을 은폐해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메렝게 기원 논의도 아프리카 영향이나 요소를 언급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인종차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반아이티주의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문화담론으로 기능했다.
Ⅲ. 국민음악으로서 메렝게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메렝게가 처음부터 환영 받은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메렝게가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도미니카공화국의 전통적인 상류층은9) 메렝게를 배격했다. 당시 상류층이 애호하던 왈츠나 툼바(tumba)와 비교할 때 천박한 춤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도미니카공화국의 작가 마누엘 데 헤수스 갈반(Manuel de Jesús Galván)은 1855년에 「메렝게에 대한 툼바의 불평」(Quejas de la tumba contra el merengue)이라는 시에서 메렝게 춤이 품위가 없고 음탕하다고 비판했다.
메렝게를 추는 자들아 말해 보거라
춤을 추는 네 짝이
여동생이고 사랑하는 딸인데외간남자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어도 괜찮은 것이냐?
너희는 가슴도 혼도 없기에그런 짓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느냐?(Rodríguez Demorizi 1971, 114)
메렝게는 남녀가 짝을 이뤄 여자는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남자는 여자의 허리를 붙잡은 자세로 추는 춤일 뿐만 아니라 여자가 시시때때로 엉덩이를 흔드는 춤이기 때문에 점잖은 상류층은 사교장소인 무도장(salón)에서 이 춤을 추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1875년에도, 후일(1876년) 도미니카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낼 울리세스 프란시스코 에스파이야트(Ulises Francisco Espaillat)는 “문명국에서는 추지 않는 춤”이라며 메렝게에 대한 분명한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Rodríguez Demorizi 1971, 136-37).10)
메렝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한 때는 미국의 도미니카공화국 점령기(1916년-1924년)였다. 미국이라는 외세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도미니카공화국 지식인들은 19세기 후반의 국민악파(nacionalismo musical)와 같은 낭만적 민족주의에 자극을 받아 민속에서 국민정체성을 찾고자 했다.11) 이를테면 민속학자 훌리오 아르세뇨(Julio Arzeño)는 1927년에 출판한 『도미니카공화국 민속 음악』에서 “우리는 외국 리듬을 버리고, 도미니카공화국 음악이 되어야만 한다 [...] 이 땅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 공화국은 안정되고, 조국은 위대해질 것이다”라고 썼다(재인용 Austerlitz 1997, 43). 그러나 지식인의 평가야 어떻든, 일상생활에서 메렝게는 여전히 하류층의 음악이고 시골 음악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트루히요는 이런 하류층의 음악을 도미니카공화국의 국민음악으로 만들었다. 좀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1936년 포고령을 통해서 시바오 지방의 메렝게를 국민음악으로 정한 것이다(Manuel 2006, 123).12) 트루히요가 도미니카공화국의 여러 음악 가운데 메렝게를 국민음악으로 선택한 이유를 학자들은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트루히요는 메렝게 애호자였다. 트루히요는 메렝게를 좋아하고, 춤도 잘 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1891년 산크리스토발(San Cristóbal)의 소상인 가정에서 태어난 트루히요는 초등학교 교육을 마치고, 10대에는 소 도둑질, 수표 위조, 강도질을 하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이런 청소년기 이력을 살펴보면, 트루히요의 메렝게 애호는 부르디외의 용어로 취향(gusto)이다. 당시 도미니카공화국은 소수의 상류층과 대다수 하류층으로 나뉘어 있었고, 향유하는 문화 또한 상이했다. 트루히요는 지방 도시의 변변치 않은 집안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하류층의 문화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메렝게 애호자가 된 것이다(Austerlitz 1997, 67).
둘째, 시바오 상류층에 대한 복수설이다. 1921년 사관학교에 입학한 트루히요는 다음해인 1922년에 대위로 임관하여 시바오 지방에서 근무했다. 이 때 트루히요는 시바오 지방의 상류사회에 진입하려고 노력했으나 출신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트루히요는 권력을 장악한 뒤에 하류층의 문화인 메렝게를 상류층에게 강요함으로써 예전에 당한 모욕을 되갚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도미니카공화국의 성악가 아리스티데스 인차우스테기(Arístides Incháustegui)는 아우스테를리츠와 대담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트루히요는 상류 사회와 문제가 있었다. 이 사회가 처음에는 메렝게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트루히요는 무도장에서 메렝게를 연주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상류계급을 불편하게 만들었다”(Austerlitz 1997, 68). 트루히요의 심리상태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상류층이 메렝게를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다.
셋째는 메렝게 연구자는 누구나 동의하는 것으로, 메렝게를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트루히요는 1930년 대통령선거를 치를 때 유명 메렝게 악단을 동원하여 전국을 다니면서 유세했다. 당시 도미니카공화국 선거에서 여성은 투표권이 없었지만 성인 남자는 재산의 유무나 교육의 정도에 상관없이 누구나 투표권이 있었다. 트루히요는 단독후보로 출마하였기에 당선이 확실했지만, 공식적인 정치 입문이었으므로 득표율이 중요했는데, 1930년 도미니카공화국의 성인문맹률은 74%에 이르고,13) 아직은 라디오와 같은 대중매체도 보급되기 전이었으므로 메렝게 악단을 동원한 유세는 특히 농촌 지역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14)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트루히요는 집권 기간 내내 메렝게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는데, 이 점은, 다음 절에서 살펴보겠지만, 트루히요 시대의 메렝게 가사만 보더라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넷째는 줄리 셀러즈(Julie A. Sellers)의 민족주의의 확립 설이다. 셀러즈는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설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트루히요처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폭압적으로 지배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취향이나 복수심이나 정치선전용으로 메렝게를 전 국민에게 지속적으로 강요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면서 “메렝게를 강요한 트루히요의 궁극적인 이유는 국민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지방 정체성을 뛰어넘는 도미니카공화국 민족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Sellers 2004, 94).
우리도 이러한 셀러즈의 견해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기본적’이라는 조건을 붙인 이유는 민족주의 확립보다는 국민정체성 확립이 더 적절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트루히요에게 메렝게는 도미니카공화국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하류층을 국민으로 만들기 위한 문화적 선택이었다. 트루히요 이전의 도미니카공화국 정치는 카우디요가 장악했다. 카우디요는 특정 지역에 거주하면서 토지와 주민과 세금까지 관리하는 토호였고, 정치적 불만이 있으면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군인과 민간인으로 무장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차지했다. 이런 카우디요는 미군 점령기의 무장 해제 조치를 통해서 세력이 약화되었고, 미군이 철수한 이후 물리적 힘은 군대와 경찰에게 집중됨으로써 카우디요는 사실상 소멸되었다. 트루히요는 전통적인 카우디요가 아니라 군대와 경찰이라는 현대적인 국가 조직을 장악한 실력자였다. 트루히요의 권력은 선거가 아니라 총구에서 나왔다. 그러나 대통령선거를 통해서 대내외적으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기도했기 때문에15) 대중적인 지지 기반이 필요했는데, 이를 지금까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소외된 대다수 하류층에게서 찾았다. 그리고 하류층과 트루히요를 결속한 매개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메렝게였다.
앞서 얘기했듯이, 메렝게는 트루히요 시대 이전까지는 시골 음악이자 하류층 음악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음악 자체야 시골풍과 도회풍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메렝게는 수도보다는 지방,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더 많이 연주하고, 또 상류층보다는 하류층이 즐겼다. 트루히요는 이러한 메렝게를 국민음악으로 선택했다. 여태껏 촌스럽고 음탕하다고 천대받던 메렝게를 국민음악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런 메렝게를 즐기던 하류층을 국가의 성원, 즉 국민으로 인정한다는 상징성이 있었다. 이제 하류층은 <춤을 춥시다>(A bailar)와 같은 메렝게를 연주하고, 듣고, 부르고, 춤춘다는 사실만으로 도미니카공화국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일원이라고 의식하게 되었다.
모두 와서 춤을 춥시다 / 이 흥겨운 리듬에 맞춰 / 키스케야16) 메렝게는 / 계시와도 같은 것이니. // 엔라마에서17) 추는 메렝게나 / 무도장에서 추는 메렝게나 마찬가지 / 메렝게는 우리 사회에서 / 가장 훌륭한 춤이니. // 모두 와서 이 메렝게를 / 춥시다(반곡) / 사탕수수 맛이 나는 춤을 (반복) / 사탕수수 리듬, 엔라마 / 리듬 / 모두 와서 춤을 춥시다, 앞뒤로 움직이며(Austerlitz 1997, 69-70).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트루히요 시대의 메렝게는 전통을 고수하거나 답습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1930년대는 세계적으로 민속학이 흥성하던 시기였다. 민속 문화에 국민정체성이 구현되어 있다는 관념이 확산되고, 이에 따라 서양에서든 동양에서든 도회적인 것, 근대적인 것보다는 시골적인 것, 전통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트루히요 시대의 국정 기조는 정반대였다. 시골보다는 도회, 전통보다는 근대를 지향했다.18) 이런 기조 위에서 트루히요는, 도미니카공화국 사회학자 테오필로 바레이로가 파시니 에르난데스와 대담에서 밝히고 있듯이, 시골스러운 메렝게를 “교양 있고, 세련되고, 조화롭고(harmonic), 수준 높고, 무엇보다도 춤추기에 적합한 메렝게”로 만들었다(Pacini Hernandez 1995, 40). 한마디로 메렝게를 ‘근대화’하였다. 구체적으로, 트루히요는 1935년에 루이스 알베르티가 지휘하는 재즈 악단 ‘리라 델 야케’(La Lira del Yaque)를 전속 악단으로 고용하여 악단 명칭을 ‘트루히요 대통령 오케스트라’(Orquesta Presidente Trujillo)로 바꾸고, 메렝게 전문 악단으로 만들었다. 이 때 루이스 알베르티는 재즈 악단의 경험을 살려 트럼펫, 색소폰 등 새로운 악기를 첨가하고, 무도장에서 연주하고 춤추기에 적합하도록 전통 메렝게를 편곡하거나 <콤파드레 페드로 후안>(Compadre Pedro Juan)같은 곡을 새로 작곡했다. 트루히요는 교양과 세련을 추구했기에 메렝게 가사도 시(詩)와 흡사하게 적절한 율격을 갖추었다(Pacini Hernandez 1995, 40). 이런 음악적 일신 덕분에 트루히요 시대의 메렝게는 상류층도 감내할 만한 음악으로 탈바꿈했으며, 하류층은 이전의 투박한 선율, 연주, 가사와는 다른 새로운 메렝게, 근대화된 메렝게를 체감할 수 있었다.
이처럼 트루히요 시대의 메렝게는 도미니카공화국 국민을 상징하는 음악일 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표현한 음악이라는 점에서 근대적인 국민 만들기 음악이라는 외양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하류층에게 국민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했다고 하지만 기꺼해야 선거에 동원되고 전당대회에 참여하는 것이 전부였듯이, 트루히요 정권이 치적으로 내세운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숙련공이나 화이트칼라의 실질적인 증가는 미미했기 때문에(Derby 2009, 260) 실질적인 정치적, 사회경제적 위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Ⅳ. 트루히요 찬양과 메렝게
트루히요 시대는 ‘메렝게의 황금기’라고 흔히 얘기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메렝게는 근본적으로 관변음악이었다. ‘안토니오 모렐 악단’처럼 정권의 직접 지원을 받지 않은 악단이 없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메렝게 악단은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메렝게 음악 또한 관이 주도하여 창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트루히요 시대에 작곡한 메렝게는 수천 곡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는데, 1960년에 출판된 『트루히요 시대의 음악 선집. 1930년부터 1960년까지』(Antología musical de la era de Trujillo, 1930-1960)에는 엄선한 300여곡의 메렝게와 트루히요에게 헌정한 88곡의 메렝게가 실려 있다(Austerlitz 1997, 60). 그 가운데 몇 곡의 곡명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은인 찬양>(1932),19) <재선을 바랍니다>(1946),20) <우리는 트루히요를 숭배합니다>(1949), <트루히요와 보고타사태>(1948), <운전기사의 보호자 트루히요>(1950), <1950년 인구총조사>(1950), <트루히요는 위대하고 영원하다>(1953), <외채>(1954)(Pacini Hernandez 1995, 43-44).
이러한 곡명에서 알 수 있듯이, 트루히요 시대의 메렝게는 각종 정부시책의 홍보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트루히요 개인에 대한 가부장적 숭배와 노골적인 우상화의 수단이기도 하였다. 1930년 대통령선거 운동에서 메렝게의 홍보효과를 체감한 트루히요는 집권한 직후부터 개인숭배의 수단으로 활용했는데, 그 예가 1930년의 <오라시오가 나갔다>는 곡이다.21)
오라시오가 나가고 / 트루히요가 들어온다. / 우리는 새 지도자(caudillo)에게 / 희망을 거느니, / 모든 것이 바뀌리라 / 빠른 속도로. / 이제 트루히요가 / 우리 대통령이니, / 다툼도 끝났다네, 끝났다네. / 괴롭히던 놈들도 끝났다네, 끝났다네. / 오라시오파(派)도 히메네스파(派)도 끝났다네. / 정당도 끝났다네(Sellers 2004, 96).
가사를 풀어서 얘기하면, 트루히요가 집권함으로써 기존의 비효율적인 정치체제가 무너지고, 국민에게 상전 노릇하던 지배층도 사라지고, 오라시오 바스케스가 이끌던 정파(coludos)도 반대파인 후안 이시도로 히메네스(Juan Isidro Jimenes)가 이끌던 정파(bolos)도 종말을 맞았으며, 사회분위기도 일신되었다는 찬양이다. 페냐 바트예의 용어를 빌리면, 트루히요의 집권과 더불어 ‘새 조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트루히요는 비록 전통적인 카우디요 세력을 약화시키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여 근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는 데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정치체제를 출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정당마저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 일인독재체제를 구축하고 군부와 과두세력의 지지에 힘입어 도미니카공화국에 대한 완벽한 지배력을 확보했다.
이러한 독재체제에서 다양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문화가 제일적(uniforme)이었다. 게다가 위에서 강제한 문화였다. 메렝게의 경우도 정부 지원을 받는 악단이 공공장소에서 연주하는 음악, 대통령 동생 페탄이 운영하는 라디오방송국 ‘도니미카공화국 목소리’와 텔레비전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정부의 승인 아래 미국에서 녹음된 음반을 듣고 즐기면 되었다.22) 이런 메렝게는 트루히요의 수많은 하사품 가운데 하나였다. 1930년 허리케인 산세논이 닥쳤을 때 트루히요는 정부의 이름으로 농민에게 씨앗과 토지를 무상 분배했다. 1944년 독립100주년 기념행사 때 트루히요는 도미니카공화국당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유럽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지방순시 때는 트루히요가 직접 농민에게 빳빳한 100달러를 뿌렸다. 이로써 국가, 정부, 정당은 명목에 불과하고 실제 주인공은 트루히요라는 인식이 뿌리내렸다. 도미니카공화국 사람들은 하사품을 받은 대가로 트루히요를 은인(Benefactor)이라고 칭송하고 찬양했다. 어떤 사람은 집 대문에 큼직한 글씨로 ‘이 집의 가장은 트루히요다’라고 써붙였고, 어떤 사람은 일간지에 찬양시를 투고했다. 메렝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10월 24일 우리나라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탄생했다”고 시작하는 트루히요 생일축하곡 <10월 24일>(El 24 de octubre), “나는 말을 타고 앞장서서 나라를 구하겠다”고 말한 트루히요를 칭송하는 <나는 말을 타고 앞장서리라>(Seguiré a caballo), 마니구아로 가서 트루히요 정권을 수호하겠다는 <마니구아>(La Manigua) 등이다.
이 중에는 도미니카공화국의 유일한 정당인 도미니카공화국당(Partido Dominicano)이 의전용이나 각종 행사용으로 유명 작곡가에게 의뢰하여 창작한 곡도 있었지만, 아래 소개하는 루이스 알베르티(Luis Albarti)의 <나하요>(Najayo)처럼 트루히요 정권에 동조한 작곡가가 자발적으로 창작한 음악도 있었다.23)
아름다운 나하요24), 이상향 / 트루히요 피서지 / 풍광은 수려하고 / 광휘로 위대함은 더욱 위대해지는 곳 / 상아로 장식한 집은 / 풍광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 인근 숲을 더욱 푸르게 만든다네 / 이곳이 바로 장군님이 쉬시는 곳 // 트루히요 만세 / 유일무이한 분 / 트루히요 만세 / 우리 장군님 / 트루히요 몰리나 / 하느님이여 축복하소서 / 이렇게 사람들이 외치니 / 트루히요 만세 / 별처럼 빛나는 장군님 / 그래 내 말하노니 / 땅에는 트루히요 / 하늘에는 하느님(Pacini Hernandez 1995, 44).
이제 트루히요는 ‘조국의 은인’(Benefactor de la Patria), ‘새 조국의 아버지’(Padre de la Patria Nueva), ‘교회의 보호자’(Protector de la Iglesia)라는 수식어로도 부족하여 하느님과 동격(“땅에는 트루히요, 하늘에는 하느님”)으로 신격화되었다.25)
이처럼 과도한 트루히요 찬양가에 대한 도미니카공화국 사람들의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1950년대 음반을 보급하던 프란시스코 아마로(Francisco Amaro)의 인터뷰에 따르면, 파티를 열면 항상 트루히요 찬양 음반을 가져와서 적어도 한 번은 틀었다고 한다. 찬양가를 틀지 않으면 반정부인사라는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광 시대>(Era gloriosa)처럼 정말 곡이 좋으면 틀었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였기 때문이다”(Pacini Hernandez 1995, 43). 다시 말해서, 트루히요 시대의 도미니공화국 사람들은 마지못해 트루히요 찬양가를 듣는 경우도 있었지만 때로는 자발적으로 수용했다. 이런 곡은 지금도 메렝게의 고전으로 대접받고 있는 <영광 시대>, <나야호> 외에도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산크리스토발>(San Cristóbal)이 있다.
산크리스토발 / 트루히요의 요람, 만세 / 위대한 지도자(caudillo)이자 / 국가수반 트루히요 // 부인들은 하나같이 / 아름다운 꽃이니 / 우아하고 매력 넘치는 / 여인중의 여인이다(Velázquez & Ureña 2004, 61).
곡명 산크리스토발은 트루히요의 고향이다. 그리고 가사 가운데 ‘부인들’이라는 표현은, 여성편력으로 유명한 트루히요를 비난하는 말이 아니라 트루히요가 공식적으로 3번 결혼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메렝게는 트루히요가 연회의 고정 레퍼토리로 넣을 정도로 선호하기도 했지만, 시중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심지어 “도미니카공화국 사람들은 <산크리스토발>을 트루히요 찬양가로 듣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었다(Austerlitz 1997, 62). 이 점에 대해서 아우스테를리츠는 메렝게가 트루히요 정권의 선전 수단이라고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이런 음악에서 미학적인 매력을 찾아낸 것은 복잡한 질문을 남긴다고 말을 흐리고 있다(Austerlitz 1997, 62).
사실 트루히요 찬양가의 대중적인 수용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분명하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창작, 보급, 수용, 확산의 과정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이다. 말을 바꾸면, 사고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영역이다. 이런 실천의 영역, 삶의 영역에서는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예상하지 못한 돌발 변수가 작용하는 등 수많은 사람의 비의도적인 일상 행위가 복잡하게 교차한다. 그렇다면 도미니카공화국 사람들의 트루히요 찬양가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 메렝게의 음악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의 관계로 국한하기보다는 좀 더 폭넓게 다양한 요소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선, 트루히요 시대 도미니카공화국은 고도로 통제된 사회였다. 정치는 물론이고 문화에서도 반아이티주의를 내세웠으므로 도미니카공화국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혈통적, 문화적 다양성을 용인하지 않았다. 대중음악에서도 메렝게가 압도적으로 창작되고, 연주되고, 보급되었다. 이로써 도미니카공화국 국민 개개인의 취향이나 선호에 상관없이 메렝게만이 일상적으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악이었다.
다음으로, 트루히요 시대에 창작된 모든 메렝게가 트루히요 찬양가는 아니었다. 이런 평범한 성격의 메렝게 중에는 1936년에 루이스 알베르티가 발표한 <콤파드레 페드로 후안> 같은 곡은 흥겨운 리듬과 은근한 가사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콤파드레 페드로 후안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춰요 / 콤파드레 페드로 후안 군침이 도는데 / 저 검은 눈동자 아가씨 / 유연한 몸으로 춤을 추는데 // 콤파드레 페드로 후안 때를 놓치지 말아요 / 콤파드레 페드로 후안 부인의 손을 잡고 / 메렝게를 추어요. 조심하지 않으면 / 붙잡힌 앵무새 꼴이 되리니(Pérez de Cuello & Solano 2003, 185).
이 곡 외에도 수호성자를 기리는<산안토니오>(San Antonio), 음식 이름에서 곡명을 따온 <산코초 프리에토>(El sancocho prieto) 등 트루히요 시대에 창작된 메렝게는 도미니카공화국 내에서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메렝게를 알린 대표적인 곡으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음악적 다양성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메렝게가 천편일률적이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라틴아메리카 음악 관련 논의에서 흔히 망각하는 측면이지만, 메렝게는 귀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춤을 동반한 무용곡이라는 점이다. 정태적으로 앉아서 가사를 음미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공적이거나 사적인 파티에서 흥겨운 리듬을 타고 파트너와 역동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음악이다. 이런 잔치에서 흘러나오는 곡 중간에 트루히요 찬양가가 한두 곡 섞인다고 한들 리듬이 다르지 않은데 달아오른 춤판의 흥이 깨질 수는 없다. 프란시스코 아마로의 아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사람들은 춤을 출 수 있고 가락이 흥겨우면 가사에 개의치 않았다.
페드로 페레스(Pedro Pérez)는 정치적인 성격의 메렝게 <영광 시대>를 수록한 음반을 만들었는데, 인기가 너무 좋아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런 정치적인 메렝게를 두세 곡 더 만들어도 정말 많이 팔렸다. 춤을 출 수 있는 곡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음반을 구입한 것이다(Pacini Hernandez 1995, 44).
이처럼 트루히요 시대에 도미니카공화국 사람들은 강압적인 분위기와 선택의 제한 속에서 트루히요 찬양가를 수용하고 즐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고대 로마 이래 현재까지 권위주의 정권은 스포츠를 통해서 대중을 조작하였듯이, 트루히요 정권은 메렝게라는 음악을 통해서 대중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향유 메커니즘은 대다수 국민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체념적으로 만들 뿐이다. 비록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성향의 국민이라고 할지라도 트루히요 독재에 자발적으로 협력하거나 국외로 망명하지 않는 한 창의성을 발현할 기회는 없었다.
Ⅴ. 결론
트루히요 시대의 메렝게는 반아이티주의 국민정체성 형성을 위해 동원한 문화 수단이었다. 메렝게 기원 담론은 아프리카 문화의 영향을 의도적으로 도외시하고 스페인유산을 강조하고, 나아가 도미니카공화국에서 탄생한 음악이라고 설파했다. 또한 정권 차원에서 메렝게를 국민음악으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을 ‘근대적’으로 일신하고, 나아가 악단, 라디오, TV, 음반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를 동원하여 일상의 일부로 만들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메렝게는 도미니공화국 사람들의 국민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고, 국민음악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반아이티주의라는 트루히요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고 또 강화하기 위하여 관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제일적인 문화, 위로부터 강제된 문화라는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비록 국민형성에 기여했다고는 하나 트루히요 시대와 같은 폭압적 독재 정권 치하에서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체념적인 국민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1961년 트루히요 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메렝게의 황금기를 뒷받침하던 외부 동력이 사라지자 메렝게는 급속도로 쇠퇴하고, 이 시기에 새로 등장한 바차타(bachata)가 대중음악의 주류를 형성했다. 파시니 에르난데스가 지적하듯이, 이 바차타야말로 논란의 여지가 없이 도미니카공화국에서 탄생한 음악이자, 도미니카공화국의 주류 문화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저항 형식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국민음악 가운데 하나이다(Pacini Hernandez 1995, 33-34).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렝게는 여전히 유일한 국민음악으로 통용되고 있다. 트루히요 정권은 1961년 종말을 맞았지만, 민주화 시기는 짧았고, 1966년 미국의 침입에 뒤이어 트루히요 시대의 핵심 이데올로그이자 정치인인 호아킨 발라게르(Joaquín Balaguer)가 1996년 중도 사임할 때까지 7번에 걸쳐 정권 장악함으로써(1960년-1962년, 1966년-1978년, 1986년-1996년) 연성 트루히요 시대가 계속되었으며, 반아이티주의 또한 국민정체성의 중핵으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7년 이후 도미니카공화국은 실질적으로 민주화되고, 트루히요 시대 이후 지속되어온 반아이티주의 국민정체성 담론 또한 예전의 독점적 지위를 상실하고 다양한 국민정체성 담론 가운데 하나로 축소되었다. 물론 마누엘 누녜스(Manuel Núñez)와 같은 보수 학자는 1990년에 펴낸 『도미니카공화국의 몰락』(El ocaso de la nación dominicana)에서 아이티사람들은 도미니카공화국 국민을 유색인으로 물들이려고 획책하고 있다면서 반아이티주의를 다시 거론하고 있고, 2014년 6월 중도우파 하원의원 비니시오 카스티요 세만(Vinicio Castillo Semán)은 아이티인의 불법이민을 통제하기 위해서 320킬로미터에 달하는 국경선에 장벽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시대역행적인 주장이 없지 않으나, 전반적인 경향은 도미니카공화국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08년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08-362-B0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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