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itute of Iberoamerican Studies
[ Article ]
iberoamerica - Vol. 22, No. 2, pp.1-23
ISSN: 1229-9111 (Print)
Print publication date 28 Dec 2020
Received 31 Oct 2020 Revised 03 Dec 2020 Accepted 03 Dec 2020
DOI: https://doi.org/10.19058/iberoamerica.2020.12.22.2.1

호세 도노소의 『시골 저택』에서 알레고리와 메타픽션

박병규*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교수 lapia@snu.ac.kr
Allegory and Metafiction in José Donoso’s Casa de campo
Park, Byong-Kyu*

초록

칠레 작가 호세 도노소의 소설 『시골 저택』은 불확실하고 모호한 작품이다. 한편으로는 정치적 알레고리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메타픽션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시골 저택』은 1973년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읽기는 작품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칠레 현대사를 넘어서 중남미 역사에서 일어난 변혁과 좌절의 연대기에 대한 문학적 초상화이다. 메타픽션으로서 『시골 저택』은 이런 문학적 초상화의 담론적 성격을 드러내고, 작품 바깥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환기하고자 한다. 이로써 도노소는 암울한 현실의 비일상적인 성격, 한시적인 성격, 허구적인 성격을 드러내고자 한다.

Abstract

Jose Donoso’s Casa de campo is an uncertain and ambiguous novel because it has a political allegory on one hand and metafiction on the other. The novel may well be considered a political allegory about the 1973 military coup in Chile. This understanding, however, oversimplifies the fictional world of Casa de campo. In the deep level of the narrative, the novel is a literary portrait of challenges and failures that occurred in Latin American history. As metafiction, Casa de campo features discourses on the literary portrait and calls attention to reality outside the novel. Therefore, Donoso seeks to reveal the unusual, temporary and fictional character of the grim reality.

Keywords:

Allende, Pinochet, Allegory, Metafiction, Chile

키워드:

아옌데, 피노체트, 알레고리, 메타픽션, 칠레

Ⅰ. 서론

칠레 작가 호세 도노소(José Donoso)가 1978년 스페인에서 출판한 『시골 저택 Casa de campo』은1) 이전 작품과는 다르게 정치적 이야기와 색다른 소설 기법을 구사하고 있어서 출판되자마자 많은 비평가의 관심을 끌었다. 보네트(Bonet)의 작품 시기 구분에 따르면2), 『시골 저택』은 두 번째 단계에 속하지만, 성격이 독특해서 도노소의 전 작품에서도 이례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도노소가 인터뷰에서 밝힌 창작 동기를 보면, 『시골 저택』은 칠레의 현대사, 특히 1973년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1973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도노소는 저명한 영화감독 안토니오니(Antonioni)에게 『음탕한 밤새 El obsceno pájaro de la noche』의 각색을 부탁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폴란드에서 칠레의 군사 쿠데타 소식을 들었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도노소는 각색 작업에 착수했는데, 작업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바르가스 요사와 함께 [스페인에 있는] 우리 집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바르가스 요사에게는 다섯 살 먹은 아이와 일곱 살 먹은 아이가 있었고, 우리 딸은 당시 여섯 살이었다. 시에스타 시간이었다. 우리는 라디오를 켜놓고 군사 쿠데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시에스타 시간에는 놀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장난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시에스타 시간에 금지된 놀이를 하는 것은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안토니오니에게 부탁받은 시나리오를 새로 쓰기 시작했는데, 이 시나리오가 결국 『시골 저택』이 되었다(Martínez and Donoso 1978, 73).3)

작품 마지막에도 “칼라세이테-시트헤스-칼라세이테/1973년 9월 18일~1978년 6월 19일(Donoso 1983, 498)”이라고4) 이 작품을 창작한 스페인 지방 도시명(Calaceite와 Sitges)과 창작 기간을 밝힘으로써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와 관계가 있다고 넌지시 비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시골 저택』 출판 직후부터 현재까지 이그나시오 발렌테(Ignacio Valente 1979), 루이스 이니고 마드리갈(Iñigo Madrigal 1980)을 비롯하여 도널드 쇼(Shaw 2008, 186-187), 이델베르 아벨라르(Avelar 2011, 94-95), 다니엘 노에미 보이온마(Noemi Voionmaa 2012, 153) 등 대다수 비평가는 『시골 저택』을 아옌데 정권과 피노체트 쿠데타에 대한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어냈다.

어떤 작품을 알레고리, 그것도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는다는 것은 작품 이해의 다양성을 옥죄는 독법(讀法)이다. ‘옥죈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알레고리 독법이 구체적 인물과 사건을 강렬하게 환기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다른 독법이 비집고 들어설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시골 저택』을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는 것은 작품에 구조화된 여러 가지 독법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분명하다.

알레고리 독법은 명쾌하지만, 작품을 과도하게 단순화시킨다는 문제점이 있다. 세도밀 고익(Cedomil Goic)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소설 『시골 저택』에서 재현된 세계는 본질적으로 비현실적이고, 불확실하고, 막연하다(Goic 2001, 209).” 불명료성은 도노소의 작품에서 일반적인 특징이지만, 『시골 저택』의 불명료성은 주로 색다른 소설 기법, 즉 메타픽션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도노소의 여느 작품과 차이가 있다.

『시골 저택』의 메타픽션 측면에 대해서도 비평가들은 일찍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이 작품이 출판된 1978년만 해도 메타픽션이라는 용어가 생소했기 때문에 비평가들은 19세기 사실주의 소설의 화자를 등장시켰다고 평했으며 이런 경향은 그 후에도 지속되어 『시골 저택』을 “19세기 사실주의의 정점”(Murphy 1992, 21)이라고 단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비평가는 메타픽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시골 저택』의 화자를 “19세기 사실주의 소설의 전형적인 전지적 화자(Noemi Voionmaa 2012, 153)”로 규정함으로써 메타픽션적 성격을 곡해했다. 게다가 메타픽션을 『시골 저택』의 내용, 줄거리, 주제와는 무관한 형식, 즉 소설 기법으로만 파악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도노소의 『시골 저택』을 알레고리이자 메타픽션으로 보고자 하며, 양자는 분리 불가능한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다. 구체적으로, 기존 연구에 바탕을 두고 알레고리 독법과 메타픽션 독법을 순서대로 살펴봄으로써 『시골 저택』에 대한 알레고리 독법은 유의미하지만, 표층적인 독법이며, 심층적으로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통해 암울한 현실의 비일상적인 성격, 한시적인 성격, 허구적인 성격을 환기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Ⅱ. 알레고리로서 『시골 저택』

호세 도노소의 『시골 저택』은 부유한 벤투라(Ventura) 가(家)의 어른 열세 명과 아이들 서른세 명이 마룰란다(Marulanda)라는 곳에 있는 시골 저택에서 벌이는 일련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작품은 크게 제1부 출발(La partida)과 제2부 귀환(El regreso)으로 나뉘는데 제1부는 1장에서 7장까지로 어른들이 시골 저택을 비운 동안 아이들의 행동을 주로 이야기하고, 제2부는 8장에서 마지막 14장까지로 소풍을 마치고 돌아온 어른들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골 저택』은 방대한 장편 소설이고 등장인물도 수십 명에다 이야기 전개도 복잡한 작품이므로 논의의 편의를 위해 줄거리를 살펴보기로 한다. 수도(capital)에 사는 벤투라 일가는 매년 여름 많은 하인을 대동하고 마룰란다의 시골 저택으로 가서 3개월 동안 머문다. 마룰란다는 실제 지명이 아니라 가상의 공간이다. 벤투라 일가가 시골 저택으로 가는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휴가를 즐기면서 가족의 친목을 다지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금박(oro laminado) 생산을 감독하는 것이다. 벤투라 가는 원주민을 동원하여 집안 소유의 금광에서 금을 채굴하고, 이를 금박으로 가공하여 전 세계에 수출하여 부를 누리고 있다. 아무튼, 시골 저택 생활이 조금 지루해질 즈음 어른들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하루 일정으로 소풍을 떠난다.

시골 저택에 남은 서른세 명의 아이들은 성향에 따라서 네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그룹은 아이들 가운데 제일 나이가 많은(열일곱 살) 후베날(Juvenal)이 주축이다. 이 그룹의 아이들은 “질서 유지의 수호자(97)” 후베날의 지휘 아래 ‘후작 부인은 다섯 시에 외출했다’(La Marquesa Salió A Las Cinco)라는 역할 놀이를 하는데, 작품 내내 엘리트 그룹으로 행세한다. 두 번째 그룹은 카실다(Casilda), 파비오(Fabio), 말비나(Malvina), 이히니오(Higinio)이다. 이 그룹은 원주민 출신의 페드로 크리솔로고(Pedro Crisólogo)와 공모하여 금박 상자를 훔쳐 도망간다. 세 번째 그룹의 구성원은 『시골 저택』의 주동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웬세슬라오(Wenceslao)를 비롯하여 아라벨라(Arabela), 아가피토(Agapito), 아마데오(Amadeo), 코르델리아(Cordelia)이다. 이 그룹은 시골 저택을 지배하고 있는 기존 질서를 전복하려고 시도한다. 원주민 거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Francisco de Asís)도 이 그룹에 속한다. 마지막은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아이들이다.

어른들이 소풍을 가자 웬세슬라오는 타일로 장식된 큰 탑에 갇힌 아버지 아드리아노 고마라(Adriano Gomara)를 풀어준다. 아드리아노 고마라는 벤투라 가의 사위로, 직업은 의사이다. 비록 전문 직업인이기는 하지만 유력 집안 출신이 아니어서 벤투라 일가와 잘 어울리지 못하고, 시골 저택 주변에 거주하는 원주민에게 관심을 보인다. 어느 날 원주민 마을에 들른 아드리아노 고마라는 시골 별장에서 버린 오수 때문에 원주민이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발견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원주민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저기에 최근에 설치한 하수구가 있었다. 벤투라 가가 개천에 오수를 흘려보내는 곳이다. 아무도 개천이 흘러가는 저 아래에 원주민이 산다는 생각도 못 했고, 주인네들의 청결한 생활 때문에 원주민의 경작지와 건강이 위협을 받는다는 생각도 못 했다. 아드리아노 고마라는 환자를 보살펴주고, 무엇보다도 거주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67).

원주민을 식인종(antropófago)으로 간주하고 항상 경계하는 벤투라 일가는 아드리아노 고마라의 친원주민 성향을 반(反)벤투라 성향이라고 의심하던 중, 아드리아노 고마라가 자식의 죽음을 보고 광분하자 ‘광인’으로 매도하여 시골 별장의 큰 탑에 가둬버렸던 것이다.

감금에서 풀려난 아드리아노 고마라는 “삽시간에 마룰란다를 장악하여 급진적으로 모든 걸 변혁(235)”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웬세슬라오 그룹의 아이들과 원주민의 도움으로 시골 저택을 장악하여 원주민을 저택으로 들이고, 곡물 창고를 개방한다. 그러나 후베날 그룹의 비협조, 일부 구성원의 사익 추구, 금박의 국제 교역 단절로 위기에 봉착한다.

한편, 소풍을 마치고 해 질 녘 시골 저택으로 귀가하던 어른들은 도중에 카실다와 파비오를 만난다. 몰라보게 초췌한 모습으로 변한 카실다에게 시골 저택의 근황을 들은 어른들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평소에도 아드리아노 고마라를 “식인종의 두목”이라고 여겨 불신하던 하인들을 동원하여 “새로 만든 것, 조직된 것은 뭣이든지 쓸어버리고 근절하고 파괴하라(277)”고 지시한 뒤 수도로 돌아간다. 하인들은 “모든 하인의 사령관(267)”인 집사(Mayordomo)의 지휘 아래 전투를 벌여, 아드리아노 고마라는 물론이고 원주민 출신의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를 비롯하여 친(親) 아드리아노 고마라 세력을 죽이고, 시골 저택을 탈환하여 엄중한 감시 체제를 확립하고, 전횡과 기행을 일삼는다.

수도로 돌아간 어른들은 마룰란다의 광산과 시골 저택을 외국인에게 매각하기로 하고, 외국인 매수자들을 마룰란다로 초청하여 현장 답사에 나선다. 이때 카실다와 함께 금박 상자를 들고 도망간 말비나가 시골 저택에 나타난다. 사실은 말비나가 외국인들과 합작하여 벤투라 가의 부동산과 광산을 매입한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말비나의 등장에 어른들이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외국인들과 말비나는 화본과 풀(gramínea)의 관모 폭풍을 예상하고 마차를 타고 도망가고, 관모 폭풍을 피하지 못한 어른들은 질식사한다. 시골 저택 무도장으로 대피한 원주민들과 몇몇 아이들만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상의 줄거리에서 칠레 현대 정치사를 연상하고 『시골 저택』을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은 사람은 칠레의 오푸스 데이(Opus Dei) 신부 호세 미겔 이바녜스 랑골로이스(José Miguel Ibáñez Langlois)이다. 이 신부는 이그나시오 발렌테(Igancio Valente)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는데, 1979년 6월 3일 극우 신문 『메르쿠리오 El mercurio』에 게재한 비평 「호세 도노소: 시골 별장 José Donoso: Casa de campo」에서 “알레고리가 분명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벤투라 가는 지배 계급이다. 하인들은 군대이고, 원주민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고, 식인 풍습이라는 신화는 국제 공산주의이다. 아드리아노 고마라는 살바도르 아옌데와 접점이 있고, 원주민의 시골 별장 진입은 인민 연합(Unidad Popular)의 승리를 의미하고, 이로 인한 혼란은 [아옌데 정권이 통치한] 3년이고, 하인들의 승리는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킨 1973년] 9월 11일을 의미한다. 집사는 피노체트 장군을 가리키고, 외국인은 미국의 제국주의,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현 정권의 심문, 고문, 처형, 실종을 가리킨다(재인용 Magnarelli 1993, 136).

발렌테의 비평은 하나만 제외하고는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하나란 바로 “식인 풍습이라는 신화는 국제 공산주의”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발렌테의 이념 정향을 드러낸 것일 뿐, 『시골 저택』에 근거한 주장은 아니다. 아옌데 정권이 공산당과 연합했으므로 국제 공산주의와 무관하지 않듯이 『시골 저택』의 아드리아노 고마라가 원주민과 연합했으므로 식인 풍습을 국제 공산주의의 알레고리로 파악한 것이다. 그런데 작품에서 “식인 풍습이라는 신화”는 벤투라 가의 지배 담론 가운데 하나이다. 시골 저택의 어른들과 엘리트 그룹의 아이들은 원주민을 야만적인 식인종이라고 여겨서 멸시와 차별을 일삼는데, 원주민들은 돼지머리로 고사를 지낼 뿐 식인을 하지는 않는다. 카실다의 항변처럼, “식인종들은 없으며, 당신들이 [원주민에 대한] 약탈과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다(256).” 또 원주민은 벤투라 일가의 아이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식인 풍습이라는 전설은 대내적으로 공포를 조성하여 시골 저택 구성원의 결속과 단합을 유지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루이스 이니고 마드리갈(Luis Iñigo Madrigal)은 발렌테의 알레고리 독법을 다듬어서 마룰란다(시골 저택과 인근의 광산 지대)는 칠레의 알레고리이고(Iñigo Madrigal 1980, 11-12) “어른들은 과두 세력(19세기적 의미로), 아이들은 중산층, 원주민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또는 하류층, 하인은 두말할 필요 없이 국가의 억압 기구, 특히 군대”의 알레고리로 읽는다.(Iñigo Madrigal 1980, 13) 또 아드리아노 고마라(Adriano Gomara)는 아옌데 대통령이라고 하면서, 그 근거로 고마라와 아옌데는 모두 의사이고, 두문자(頭文字) A.G.는 아옌데의 성(性) 아옌데 고센스(Allende Gossens)와 일치할 뿐만 아니라 아드리아노 고마라가 큰 탑에 행한 마지막 연설 또한 아옌데가 모네다궁에서 행한 마지막 연설과 어투가 동일하다고 얘기한다. 마지막으로, 하인들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던 중 기타를 치며 노래하라는 강요에 못 이겨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을 부르는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는 다름 아닌 빅토르 하라(Víctor Jara)라고 해석한다(Iñigo Madrigal 1980, 22-24).

루이스 이니고 마드리갈의 알레고리 독법은 장점도 있고, 한계도 있다. 장점은 수십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복잡한 사건과 화자의 생경한 논평으로 점철된 『시골 저택』을 읽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서술의 모호성을 배제함으로써 작품의 문학적 성격을 정치적 성격으로 단순화시키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시골 저택』을 칠레와 현대사라는 특정 시공간으로 국한시킨다는 한계도 있다.

텍스트상의 지표로 보면 『시골 저택』에서 전개되는 사건의 시공간을 1970년대 칠레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사건은 마치 우화처럼 모호한 지리적 공간에서 전개된다. 이를테면, 마룰란다라는 지명은 칠레를 포함하여 중남미 어느 곳의 지역명도 환기하지 않는다. 벤투라 일가가 평소에 거주하는 곳의 지명도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 수도(capital)이다. 화본과 풀(gramínea) 역시 구체성이 결여된 식물명이다. 가을철 관모(vilano)를 휘날리는 이 외래종 식물은 시골 저택의 외부를 점령하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위협한다. 그런데 화본과에는 820속 12,100종이 있으며,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서 자라므로 『시골 저택』에 등장하는 화본과 풀은 바로 이 종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다.5)

시간 지표 역시 불확실하다. 『시골 저택』에서 구체적인 연대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고마라와 집사의 정치적 행위로 어림하면 1970년대 칠레이다. 그런데 벤투라 일가의 경제 활동을 근거로 추정하면 19세기 말엽이다. 예전에 중남미에서 많이 사용하던 용어로는 신식민주의 시기이고, 요즘 용어로는 제1차 세계화 시기이다. 이 시기의 중남미와 마찬가지로, 벤투라 일가는 1차 산품(광물)으로 부를 축적하고, 외국과 자유 무역을 하며, 외국인은 아무런 제한 없이 직접 투자를 한다. 벤투라 일가의 토지 소유 방식, 원주민 노동력 착취 방식은 식민지 시대와 큰 차이가 없다. 이를테면, 벤투라 일가는 마룰란다 일대에 걸쳐 대규모 토지와 광산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는 17세기에 정착된 라티푼디움의 유산이다. 원주민을 식인종이라고 부르고, 원주민 노동력을 동원하여 금을 채굴하고 금박을 가공하는 것 또한 정복 직후 스페인 왕실이 실시한 위탁제도(encomienda) 또는 분배제도(repartimiento)의 유습이다. 시골 저택의 공간 배치와 사회 구성 또한 식민지 시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시골 저택은 창으로 울타리를 둘러 벤투라 일가가 거주하는 저택 내부와 원주민이 거주하는 저택 외부를 엄격하고 구분하는데, 스페인 왕실 또한 식민 사회를 스페인 사회(república de españoles)와 원주민 사회(república de indios)로 구분하여 양자의 접촉을 근본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종교적인 관점에서 ‘혈통의 순수성(pureza de la sangre)’을 유지하려고 시도했다. 시골 저택의 울타리는 식민지 시대 두 사회(dos repúblicas) 정책의 축소판인 것이다.

『시골 저택』의 지리적, 시간적 불명료성은 의도적인 것으로, 후안 룰포의 『페드로 파라모』,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등 20세기 중엽의 중남미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통시성의 공시적 재현이다. 풀어 말해서, 현재는 과거의 패턴적 반복이며, 이곳과 저곳은 상동하다는 인식의 문학적 표현이다. 이로써 『시골 저택』의 이야기는 칠레를 넘어서 중남미로 확대되며, 현대사를 넘어서 정복 이래의 중남미 역사로 확장된다. 벤투라 일가는 스페인 정복자, 지주, 과두 세력으로 이어지는 기득권층의 표상이고, 아드리아노 고마라는 원주민 반란자, 시몬 볼리바르와 같은 독립 영웅, 에밀리오 사파타와 같은 혁명가의 맥을 잇는 변혁가의 표상이며, 원주민은 문자 그대로 지난 500년 동안 차별과 배제의 대상인 원주민인 동시에 흑인 노예이자 노동자이자 민중의 표상으로 읽을 수 있다. 한마디로, 도노소의 『시골 저택』은 칠레 현대사에 대한 정치적 알레고리를 넘어서 중남미라는 공간에서 정복 이후 유사한 패턴으로 지속되고 있는 지배와 억압의 역사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이다.


Ⅲ. 메타픽션으로서 『시골 저택』

서사 이론의 측면에서 『시골 저택』의 가장 큰 특징을 든다면 단연 화자이다.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화자는 텍스트 표층을 뚫고 올라와서 “내가 이 소설에서 핵심으로 삼으려고 하는 소풍이 있기 전날 밤(13)”이라고 말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과시한다. 현대 소설에서는 예가 드문 화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소설은 퍼시 러복(Percy Lubbock)이 『소설의 기교 The Craft of Fiction』에서 제시한 방향에 따라 이야기하기(telling)보다는 보여주기(showing)에 집중했고, 그 결과 화자의 서술보다 등장인물의 대화 비중이 높아졌다. 도노소의 『시골 저택』은 이와 정반대이다. 화자가 이야기 뒤로 숨기는 커녕 이야기 전면에 등장하여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논평한다.

내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을 때, 아마도 독자들은 작가가 시간의 경과나 장면의 변화에 대한 정보에 불과한 논평을 텍스트 여기저기에 뿌림으로써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작가의 존재를 기억하도록 매번 읽는 사람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짓은 문학적으로 ‘고상한 취미(buen gusto)’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53).

이런 유형의 화자는 19세기 소설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의 화자를 들 수 있다.

따라서 독자 여러분들도 손에 이 책을 들고 ‘재미있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면서 부드러운 안락의자에 파묻힐 것이다. [···] 아! 그렇지만 알아 두라. 이 드라마는 허구도 아니고 꾸며낸 이야기도 아니다. ‘모든 것이 사실이다.’ 이 드라마는 너무도 사실과 일치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 집에서나, 어쩌면 자기 마음속에서 이 드라마의 요소들을 인정할 게다(발자크 2014, 8-9).

19세기 중남미 소설에서 예를 든다면, 아르헨티나 작가 호세 마르몰(José Mármol)이 1851년에 출판한 『아말리아 Amalia』의 화자이다. “이 우수에 젖은 검은 눈의 청년은 우리 독자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Mármol 1918, 5).”라든가 “이 청년에 대해서는 나중에 우리 독자에게 상세히 소개하겠다(Mármol 1918, 30).” 등등 작품 전반에 걸쳐 사건과 인물에 대해 논평을 한다.

이상의 인용문만 보면, 도노소의 『시골 저택』 화자와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나 마르몰의 『아말리아』의 화자는 작품에서 전개되는 사건과 인물에 대해 논평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유형의 화자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작품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큰 차이가 있다. 19세기 화자는 사건과 관련된 신뢰할 수 있는 정보와 인물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제공하여 독자가 작품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비해, 『시골 저택』의 화자는 도덕적 판단을 유보할 뿐만 아니라 상호 모순적인 사건이나 진술을 통해서 소설적 환상을 깨뜨리는 메타픽션 화자이다. 이를테면, 도노소의 『시골 저택』에는 근대 소설에서 재현된 공간과는 상이한 공간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작품 초두에 벤투라 가의 어른들이 소풍을 가는 못(laguna)이다. 시골 저택의 근처에 있다고 얘기하는 이 못의 풍광은 유토피아처럼 보인다.

그곳은 날씬한 폭포가 무지개를 두른 못 위에 떨어지고 있으며, 거대한 수련잎이 물 위로 마치 에나멜 칠을 한 작은 섬처럼 떠 있어서 그 위에서 카드놀이를 하거나 낚시를 하기에도 멋진 곳이고, 수목은 무성한 메꽃으로 치장하고 있고,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나비와 오팔 색 가슴 털의 새와 유익한 곤충과 과일과 향기와 꿀이 있다(44).

아름다운 풍광에도 불구하고, 이 못은 실재하는 장소가 아니다. 벤투라 가의 아이들 가운데 아라벨라가 옛날 지도를 조작하고, 웬세슬라오가 이상적인 경치라는 이야기를 덧붙여서 지어낸 곳이다. 아이들이 상상력으로 창조한 산물에 어른들이 현혹된다는 설정은 핍진성(verosimilitud)이 결여되어 있지만, 『시골 저택』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믿고 하인들과 함께 아침에 출발하여 해 질 무렵에 돌아오는 하루 일정으로 소풍을 간다.

야릇한 일은 어른들의 반응이다. 소풍 간 어른들은 매우 즐겁게 지내고 올 뿐만 아니라 어른 가운데 한 사람인 셀레스테(Celeste)는 그 못에 다시 가고 싶다고 말한다.

[수도로] 돌아가는 길에 거대한 수련과 폭포가 있는 못에 들르도록 합시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못은 자연의 걸작입니다(428).

셀레스테는 장님인데도 그 사실을 완벽하게 감추고 대단한 심미안의 소유자처럼 행동하는 인물이므로 이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문제는 안셀모를 비롯하여 다른 어른들 또한 셀레스테와 마찬가지로 “피난처이자 휴식처로서 우리[어른들]가 좋아하는 못(483)”으로 피난 가자고 외치고, 어른들은 이구동성으로 동조한다는 데 있다. 못의 실재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 못을 꾸며댄 웬세슬라오는 “그런 못은 애초부터 없던 곳(485)”이라고 못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이런 경우 독자는 화자의 판단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시골 저택』의 화자는 한편으로는 “환상적인 수련이 있어서 아름답고 호젓한 못”은 외국인이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진술하고(483-484) 다른 한편으로는 “아라벨라가 만들어낸 신기루(491)”라고 말함으로써 못의 실재 여부에 대해 모순된 진술을 한다.

어른들이 소풍을 간 공간뿐만 아니라 소풍에 소요된 시간을 두고도 어른들과 아이들의 이야기가 다르다. 어른들은 소풍이 당일치기, 정확하게 열두 시간 남짓하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오늘 아침에 시골 저택을 나섰는데 네[파비오]가 일 년 전부터 여기에 있었다는 얘기는 설득력이 없다. 우리는 집을 비운 시간은 열두 달이 아니라 열두 시간이다(254).

아이들 가운데서 후작 부인 놀이에 참여한 멜라니아도 “어른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시기로 약속한 것은 다행한 일(15)”이라고 하고, 후베날 역시 어른들이 집은 비운 기간은 ‘단 하루(313)’라고 하며, 어른들을 수행한 집사(mayordomo)도 “저희[하인들]가 단 하루 집을 비운 동안(303)”이라고 얘기한다. 이에 반해, 후작 부인 놀이에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 즉 웬세슬라오, 카실다, 파비오, 코르델리아에게 어른들이 집을 비운 기간은 하루가 아니라 일 년이다. 이 기간에 아드리아노 고마라는 시골 저택을 장악하고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카실다와 파비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고(p.252), 코르델리아와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사이에서는 쌍둥이가 생겼다(p.304). 『시골 저택』의 몇몇 등장 인물에게 일 년은 객관적으로 경과한 시간이다. 그런데 화자는 텍스트상의 진술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시간 불일치에 대해서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조차 제공하지 않는다.

이런 시간의 불일치와 관련된 예를 하나 더 든다면, 카실다의 아이 일화이다. 어른들이 소풍을 마치고 귀가하던 도중에 만난 카실다는 ‘인형’을 안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카실다의 어머니 리디아는 “넌 인형 놀이를 하기에는 너무 컸어. 부끄러운 일이야. 그 인형 이리 내놔.”라고 말하자 카실다는 “그것은 인형(muñeca)이 아니에요. 제 아들(hijo)이에요.”라고 항변한다(p.252). 이와 동일한 기제는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와 코르델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일화에서도 반복된다. 하인들은 코르델리아의 쌍둥이를 인형이라고 얘기하면서 “코르델리아가 이런 인형을 자기 자식이자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의 자식으로 여긴다고 사람들이 수군댄다”고 비아냥거린다(304). 이에 대해서도 화자는 “아이/인형(hijo/muñeco)”이라고 서술함으로써(304) 판단을 유보한다. 앞서 얘기했듯이, 화자는 작품의 사건과 인물에 대해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고 소설 곳곳에서 자랑하면서도 막상 확실한 정보와 명확한 판단이 필요할 때는 “독자가 나중에 깨닫도록 독자의 호기심에 대답하지 않고 ‘유보(suspenso)’하는 것을 좋아한다(339)”고 진술함으로써 서술의 모호성을 제거하기는 커녕 오히려 증폭시킨다.

사실 『시골 저택』은 일반적인 소설과는 다르게 두 층위에서 읽어야 한다. 하나는 사건과 등장인물의 층위이고, 다른 하나는 화자의 층위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읽기는 전자였다. 전개되는 사건과 인물의 정합성이라는 판단 기준으로 소설을 읽은 것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작품 초반부터 직접적인 논평을 통해서 이 작품을 화자의 층위에서도 읽으라고 권유한다.

내가 때때로 이야기에 개입할 때는 독자가 이 소설의 소재와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다루는 대상을 보여주고 진열할 뿐, 대상에 절대 함몰되지 않음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내가 다루는 대상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53).

바꿔 말해서, 허구(“내가 다루는 대상”)는 순전한 허구일 뿐 허구 바깥의 현실(“독자 자신의 경험”)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다. 이런 유형의 메타픽션에서 자주 사용하는 서술 기법 가운데 하나가 ‘픽션 속의 픽션’인데, 『시골 저택』에서는 ‘후작 부인은 다섯 시에 외출했다’라는 아이들의 놀이로 변주되고 있다.

‘후작 부인은 다섯 시에 외출했다’는 앙드레 브레통이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폴 발레리에게 의탁하여 사실주의 소설의 구태의연한 진부함을 비판한 말인데(브르통 2012, 66), 도노소는 『시골 저택』에서 도노소는 후베날 그룹의 아이들이 행하는 일종의 역할극 명칭으로 차용하고 있다. 놀이 방식은 소꿉놀이와 유사하다. 다만, 아이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후베날이 “질서의 수호자”로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97)”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역할을 지정해주고, 아이들은 맡은 역할이 내키지 않더라도 벌을 받지 않기 위해 후베날의 말에 순종한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여러 가지로 변주되는 후작 부인 놀이에서 아이들은 후베날의 지시에 따라 벤투라 가의 어른들처럼 육체적인 사랑 연습을 하기도 하고, 결혼식을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시골 저택으로 진입하는 순간에도 후베날은 아이들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가장무도회를 개최한다.

아이들이 사방에서 자라나는 화본과 풀을 보려고 발걸음을 멈추는 일이 없게 하려면 속히 아이들의 분장을 고쳐주는 게 나았다. [...] 후베날은 올림피아(Olimpia)의 이마에 별을 그려주고, 큐피드로 분장하기 위해 이폴리토(Hipólito)의 머리를 땋으면서도 모르가나(Morgana)를 쳐다보고, 이 가장무도회를 기획한 핵심 인물인 자기에게 주목하도록 나머지 아이들을 부름으로써 단조로운 소리를 내면서 다가오는 화본과 풀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232).

이런 후작 부인 놀이는 아이들이 외부 상황과는 무관하게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픽션(『시골 저택』) 속의 픽션’과 유사한 면모를 띈다. 그러나 앙드레 지드의 『위폐범들』에서 볼 수 있는 미장아빔(mise en abyme)과는 거리가 있다. 미장아빔은 틀(frame) 사이에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 있는 데 반해, 후작 부인에서 놀이에 참여한 아이들은 놀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놀이라는 틀을 무너뜨릴 수 있다.

우리가 ‘후작 부인은 다섯 시에 떠났다’라는 연극 놀이를 할 때만 네[멜라니아]가 나[마우로]를 사랑하고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이야. 그러므로 우리가 놀이의 규칙을 따르지 않을 때는 서로 아무런 애정도 느낄 수 없어(97).

후베날은 어른들에게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권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의적이고 전횡적인 권한이 유효한 영역은 후작 부인의 놀이로 한정된다. 이 놀이에 참여하지 않은 아이들은 물론이고 놀이에 참여한 아이들이라고 할지라도 놀이가 끝나는 순간 역할에서 벗어나며, 후베날의 권위도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된다. 마치 배역에 몰입하던 배우가 일상으로 돌아올 때처럼 틀이 전환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후작 부인의 놀이는 현실(reality)을 구성하는 놀이다.

이렇듯 『시골 저택』의 화자와 등장인물은 각기 자신만의 현실을 구성한다. 현실을 구성하는 힘은 언어에서 나온다. 후베날이 배역을 지적해주는 것도 언어의 힘이고, 아이들이 배역을 연기하는 것도 언어의 힘이다. 후작 부인의 역할 연기를 한다고 해서 배역을 맡은 아이가 후작 부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고받는 언어에서 후작 부인이라는 의미가 형성될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카실다와 코르델리아의 아이/인형에 대한 상반된 지각도 언어의 작용이다. 카실다와 코르델리아의 언어에서는 아기라는 의미작용이 이뤄지는 반면에, 발비나(웬세슬라오의 어머니)가 웬세슬라오에게 여자 옷을 입혀놓고 인형으로 간주했듯이, 벤투라 가의 어른들의 언어에서는 인형이라는 의미작용이 이뤄진다. 그렇기에 카실다의 부모(에르모헤네스와 리디아)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카실다의 아기/인형을 빼앗아 우물에 빠뜨려 죽인다. 이처럼 언어로 구성된 각자의 현실에서 진리치는 지시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정합성에 있다. 따라서 못(laguna)도 어른들에게는 언어적으로 실재하는 현실이다. 실제로 못이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는 일 년일지라도 어른들에게는 하루일 수 있다. 집사(Mayordomo)는 마부장(Caballerizo Mayor)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네가 감히 한 달, 일주일, 하루를 운운해? 이 등신만도 못한 놈아, 이곳에서는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으며, 흐르지도 않고, 앞으로도 흐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어? 주인어른들께서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라는 걸 몰랐어? 그러니까 그분들이 소풍을 나섰을 때 시간은 정지된 것인데, 그분들이 돌아오시기 전에 시간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니(350)!

이제 메타픽션으로서 『시골 저택』의 본령이 드러나게 되었다. 『시골 저 택』은 언어로 구성된 여러 현실, 상이하고 모순된 여러 현실이 제각기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각축하는 장이다. 작품 초두부터 작품이 끝날 때까지 화자는 시시때때로 논평을 통해서 『시골 저택』의 이야기가 제아무리 현실을 환기한다고 할지라도, 바꿔 말해서 정치적 알레고리로 보일지라도, 본질은 언어적 구성물에 불과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Ⅳ. 결론

호세 도노소의 『시골 저택』은 좁게는 1973년 피노체트 쿠데타라는 칠레 현대사에 대한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으며, 넓게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 이후 반복되어온 변혁과 실패의 문학적 형상화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시골 저택』에는 자의식적 화자가 등장하여 작품에서 전개되는 사건과 인물이 제아무리 현실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언어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이로써 재현이라는 이름의 가교로 이어진 현실과 소설 사이의 관례적인 관계는 불안정해지고, 나아가 알레고리 독법은 무화(無化)되지는 않으나 도전을 받는다. 읽기의 초점이 정치적 현실을 빗댄 사건과 인물에서 현실 구성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벤투라 가의 아이들이 ‘후작 부인은 다섯 시에 외출했다’라는 놀이에서 자기의 역할에 맞는 현실을 구성하고 행동했듯이, 『시골 저택』의 등장인물(어른들, 고마라, 후베날 그룹, 웬세슬라오 그룹, 외국인들, 집사와 하인들) 또한 각기 상이한 현실을 구성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한다. 도노소는 이렇게 구성된 현실 가운데 어느 것이 정당하거나 옳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핍진성이 부족하고 또 상호 모순적이라고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시골 저택』이라는 연극 무대에6) 올려놓을 뿐이다. 독자라는 관객에게 작품의 인물과 행동을 구경거리 대상으로 제시한다. 이로써 독자는 정치적 알레고리로서 『시골 저택』을 객관화한다. 암울한 현실에 대한 비유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일종의 연극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노소의 문학과 현실 사이의 거리두기는 형식적으로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와 유사하지만 결은 다르다. 『시골 저택』 작품이 발표된 1970년대는 칠레와 중남미 대다수 국가는 군부독재 치하에 있었으므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독자가 자각하도록 새삼 일깨울 필요는 없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은 항거했으므로 굳이 문학을 통해 실천을 설교할 필요도 없었다. 도노소가 객관화를 통해서 얘기하려는 바는 암울한 현실의 비일상적인 성격, 한시적인 성격, 허구적인 성격을 환기하려는 것이다.

Notes

1) 소설 제목 ‘Casa de Campo’의 사전적인 뜻은 ‘시골집’, ‘촌가(村家)’ 또는 ‘귀족이나 부유 계층이 시골에 소유한 저택’, ‘별장’이라는 뜻이다. 칠레 비평가 이니고 마드리갈은 칠레에서 시골 저택을 뜻할 때는 “비록 집이 한 채이더라도 ‘casas’라고 복수형을 사용하므로 [...] ‘casa de campo’라는 표현은 영어투(Anglicismo)로 보인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Iñigo Madrigal 1980, 8). 참고로, 이 작품은 ‘광야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되었다.
2) 도노소의 작품은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단계는 칠레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1953년부터 1966년까지이고, 두 번째 단계는 스페인에서 자발적인 망명 생활을 하던 1967년부터 1980년까지,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1980년에서 1996년까지로 칠레로 귀국한 후 생애를 마칠 때까지의 시기이다(Bonet 2003).
3) 도노소는 1979년 6월 스페인의 잡지 『오이 Hoy』에 게재된 후안 안드레스 피냐(Juan Andrés Piña)와 인터뷰에서도 이와 대동소이한 단어로 창작 동기를 밝히고 있다(Piña 1979).
4) 이하 『시골 저택』을 인용할 때는 괄호 안에 페이지만 밝힌다.
5) 내친 김에 기존의 알레고리 독법을 보완하자면, 매년 가을이면 주기적으로 시골 저택을 위협하는 관모 폭풍은 중남미에 적대적인 외부의 힘이다. 이 힘은 중남미인의 통제력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자연 재해와 동일하다. 시기에 따라서 군사적 위기, 정치적 위기, 경제적 위기라는 형태로 구체화되는 이 힘은 외부와 결탁한 중남미 세력을 제외하고는 모든 구성원을 역경으로 몰아넣는다. 『시골 저택』에서 관모 폭풍이 닥치기 전에 몸을 피한 사람은 외국인과 외국인과 결탁한 말비나, 집사뿐이며, 벤투라 가의 어른, 아이, 원주민은 질식사하거나 겨우 질식사를 면한다.
6) 작품 곳곳에서 화자가 언급하는 무대(escenario), 프로시니엄(proscenio), 막(telón) 등의 무대 용어는 소설 용어의 비유로 쓰인 것이 아니라 작품의 연극적 성격을 독자에게 각인하려는 장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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