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테말라 1954년 군부 쿠데타의 배경과 특징
초록
1996년 12월 29일 과테말라 정부와 게릴라 단체인 “과테말라민족혁명연합”(Unidad Revolucionaria Nacional Guatemala: URNG) 지도자가 “과테말라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36년간(1960-1996) 과테말라에서 지속되었던 내전이 종식되었다. 36년 내전 동안에 사망자나 실종자는 20만 명에 이르렀고, 40만 명의 과테말라 인이 내전으로 인해서 과테말라를 떠났다. 1954년 6월 미국의 도움으로 과테말라에서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1954-1957)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당시의 아르벤즈(Jacobo Arbenz Guzmán, 1950-1954) 정부를 전복시켰다. 이후 아르마스는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1957년 아르마스는 암살되었고 1958년부터 보수 세력 출신인 이디고라스(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6년 동안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디고라스는 미국기업의 이익을 위한 미국의 꼭두각시 대통령으로 평가되었다. 과테말라의 36년간 내전은 이디고라스 정부에서 시작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보자면 1954년 쿠데타가 36년간 내전의 원인이라 볼 수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과테말라에서 1954년에 발생한 쿠데타의 배경과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다.
Abstract
On December 29, 1996, the Guatemala government and guerrilla group “Unidad Revolucionaria Nacional Guatemala: URNG” signed the “Guatemalan Peace Agreement,” ending the civil war that lasted in Guatemala for 36 years (1960-1996). During the 36-year civil war, 200,000 people were killed or missing, and 400,000 Guatemalans fled Guatemala as a result of the civil war. In June 1954, with the help of the United States, Carlos Castillo Armas (1954-1957) coup d'état in Guatemala overthrew the then government of Jacobo Arbenz Guzmán (1950-1954). Armas later became president of Guatemala. Armas was assassinated in 1957, and a 36-year civil war began in 1958 when 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 a conservative, was elected president. Armas later became president of Guatemala. Armas was assassinated in 1957, and a 36-year civil war began in 1958 when 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 a conservative, was elected president. Idygoras was rated as America's puppet president for the benefit of American corporations. Although Guatemala's 36-year civil war began with the government of Idigoras, more fundamentally, the 1954 coup d'état was the cause of the 36-year civil war.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background and characteristics of the 1954 coup in Guatemala.
Keywords:
Guatemala, the 1954 Military Coup, 36-year Civil War, Miguel Ydigoras Fuentes, Jacobo Arbenz Guzman키워드:
과테말라, 1954년 군부 쿠데타, 아르벤즈, 36년 내전, 이디고라스Ⅰ. 서론
1996년 12월 29일 과테말라 정부와 게릴라 단체인 “과테말라민족혁명연합”(Unidad Revolucionaria Nacional Guatemala: URNG) 지도자가 “과테말라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36년간(1960-1996) 과테말라에서 지속되었던 내전이 종식되었다. 36년 내전 동안에 사망자나 실종자는 20만 명에 이르렀고, 40만 명의 과테말라인이 내전으로 인해서 과테말라를 떠났다(Creedon 2019, 23). 1954년 6월 미국의 도움으로 과테말라에서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1954-1957)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당시의 아르벤즈(Jacobo Arbenz Guzmán, 1950-1954) 정부를 전복시켰다. 이후 아르마스는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1957년 아르마스는 암살되었고 1958년부터 보수 세력 출신인 이디고라스(Miguel Ydígoras Fuentes, 1958-1963)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6년 동안의 내전이 시작되었다(Posocco 2014, 28). 이디고라스는 미국기업의 이익을 위한 미국의 꼭두각시 대통령으로 평가되었다(Burrell 2013, 25). 과테말라의 36년간 내전은 이디고라스 정부에서 시작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보자면 1954년 쿠데타가 36년간 내전의 원인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954년 쿠데타는 1944년에 발생한 혁명 이후, 공정하고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아레발로(Juan José Arévalo, 1945-1950)와 아르벤즈 정부가 출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개혁 정부는 과테말라의 정치와 사회를 상당히 변혁했고 이에 대한 토지 과두 세력과 미국 과일 기업(United Fruit Company: UFC 이하 UFC)의 불만이 과테말라 쿠데타 발생의 중요한 대내외적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우비코(Jorge Ubico Castañeda, 1931-1944) 대통령의 13년 독재 이후인, 1944년에 과테말라에서 우비코 독재에 맞서는 대규모 혁명이 발생했고, 이 혁명은 과테말라에서 “10월 혁명”이라 부르는 민주화 운동의 시작으로서, 이후 아레발로와 아르벤즈의 민주적인 정부가 출현하게 되었다. 아르벤즈 대통령은 과테말라 독립 133년의 역사에서 민주주의적 헌법 하에서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치른 선거에서 2번째로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아르벤즈 정부는 특히 농지개혁법, 노동조건 향상, UFC의 경작하지 않은 토지의 대규모 수용, 외국기업의 독점해체 등의 업적을 이룩했다. 이에 아레발로와 아르벤즈에 반대하는 과테말라 우익세력에 의해서 시도된 30회 이상의 쿠데타 시도에도 아레발로와 아르벤즈의 혁명정부(1944-1954)는 생존했다.
1954년 과테말라의 쿠데타 발생의 대외적 요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개입이 있다. 즉 반공의 이름으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서 당선된 정부를 쿠데타로 붕괴시킴에 따라서, 미국은 소련으로부터 위협을 감시하기 위해서 좌파 세력 또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직접적인 개입의 선례를 만들었다. 미국 정부는 미국의 국경으로부터 불과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소련의 무기를 사용하고 소련에 의존하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두려움에 불안해했다. 아르벤즈 정부는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미국의 두려움 때문에 전복되었다. 미국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위협의 부재 속에서 과테말라와 같은 작은 국가에 개입하기 위해서 미국 정부는 미국 국민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고양하는 것이 요구되었다(Fisher 2012, 1-2). 아르벤즈 정부는 소련의 침투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상황판단 때문에 붕괴한 라틴아메리카의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
1954년 쿠데타는 1944년 “10월 혁명”의 실패를 의미했다. 1944년 10월 혁명의 실패는 1980년대 폭발적으로 증가한 내전의 폭력을 광범위하게 설명한다. 과테말라에서 1944년 10월 혁명과 1954년 쿠데타는 1980년대 폭력적인 내전을 발생시킨 과테말라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었다(Foster 2001, 2). 따라서 1944년 혁명의 실패로서 1954년 군부 쿠데타의 연구는 필요하다고 하겠다.
본 연구의 목적은 과테말라에서 1954년에 발생한 쿠데타의 배경과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과테말라 내전에 관한 연구는 반인륜적 대규모 학살, 제노사이드 및 정치 탄압과 국가폭력의 양상이라는 내전 그 자체를 주로 연구했고 내전의 근본적인 원인이 과거 스페인 식민 시기와 19세기 이후 진행된 모순적인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유래한다는 관점에 따라 농지개혁을 중심으로 계급투쟁 양상의 관점에서 내전의 의미를 연구했다(정이나 2015). 이 연구들은 대부분 내전의 원인을 내전 동안의 국내적인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본 연구는 내전의 요인을 내전 기간(1960-96) 이전인 1954년 군부 쿠데타로 보고 1954년 쿠데타의 요인을 국내적 요인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요인도 함께 다루면서 보다 종합적인 관점에서 고찰하려 한다. 이에 2장에서는 1954년 군부 쿠데타의 배경을 살펴본다. 먼저 1944년 혁명이 발생했을 당시의 독재정권이었던 우비코 정권을 중심으로 1944년 혁명이 발생했던 배경을 살펴본다. 그다음에는 혁명 이후에 등장한 혁명 정부 또는 개혁 정부(1944-1954)의 배경을 연구하되 1954년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는 조건과 상황을 중심으로 연구하려 한다. 3장에서는 1954년 군부 쿠데타의 특징을 정치 사회적, 경제적, 대외적인 측면에서 분석한다. 4장은 1954년 쿠데타의 도전과 한계를 고찰한다. 5장은 결론으로서 1954년 군부 쿠데타의 함의를 논하려 한다.
Ⅱ. 1954년 군부 쿠데타의 배경
1944년 우비코(Jorge Ubico Castañeda, 1931-1944) 정부가 군부에 의해 전복되면서, 과테말라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자유로운 민주주의적 선거가 시행되었다. 1944년 12월 선거에서 아레발로가 승리해서 대통령이 되었다. 아레발로는 이상주의적 교육을 받은 개혁주의자이고 반-마르크스주의자였다. 아레발로는 그의 대선 운동 기간에 1944년 혁명에서 전제정치를 반대하는 상징이 되었다. 게다가 아레발로는 과테말라의 경제적ㆍ사회적 전환점을 의미했다. 아레발로는 사회보장제도를 시도했고, 원주민과 문맹자에게 투표권을 허용했으며, 공동 출자한 재원으로 조합을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과테말라에서 미국에 불리한 노동 개혁과 농지개혁을 도입하기도 했다. 아레발로의 후임자인 아르벤즈는 선거에서 아레발로의 승리 인정과 함께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다. 아르벤즈 대통령은 미 CIA의 쿠데타 주도로 전복될 때까지인, 1954년까지 과테말라를 통치하면서, 단기간에 과테말라인에게 혜택을 주는 많은 개혁을 제도화했다. 그중에서 1954년 쿠데타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였던 1952년 농지개혁법(Decreto 900)이 있다(Creedon 2019, 9).
아레발로와 아르벤즈의 혁명 정부(1944-1954)는 정치개혁과 토지재분배 정책을 시도했는데, 이 정책은 이전의 과테말라에서 정책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아레발로와 아르벤즈 정부의 정책은 단순히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책략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테말라에서 민주적 통치를 위해서 그리고 과테말라인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많은 과테말라인의 기대와 바람을 반영한 것이었다. 1944년 혁명을 통해서 창설된 아레발로와 아르벤즈 정부는 과테말라 대부분인 억압받는 농민의 기대를 실현했다(Plantamura 2013, 57). 이에 기존의 과두엘리트, 외국기업,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의 혁명 정부에 불만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1954년 6월 28일 미국이 지원한 아르마스의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아르마스는 1954년에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2.1 우비코(Jorge Ubico Castañeda, 1931-1944)의 독재
과테말라는 1821년에 독립했고, 1839년부터 1944년까지 약 105년 동안 4명의 독재자가 과테말라를 통치했다. 그들은 라파엘 카레라(Rafael Carrera, 1839-1865), 바리오스(Justo Rufino Barrios, 1871-1885), 에스트라다 카브레라(Manuel Estrada Cabrera, 1898-1920), 우비코였다. 라파엘 카레라는 스페인으로부터 과테말라의 독립을 주도했고 1839~1865년 동안 직ㆍ간접적으로 과테말라를 통치했으며, 보수주의적 경향으로 구분한다. 라파엘 카레라는 기본적으로 스페인의 전통을 유지하고자 했고 원주민 희생에 기초하여 토지 과두 세력의 특권적인 위상을 보장했다. 이후 바리오스와 에스트라다 카브레라는 보수적인 경향의 라파엘 카레라와는 다른, 콩트의 실증주의적 사상을 수용했던 자유주의적 경향으로 구분한다. 이들은 경제적ㆍ사회적 발전을 추구했고, 미국과 유럽의 문화적 가치를 모방했다. 에스트라다 카브레라가 1920년에 대통령직을 끝마쳤을 때, 과테말라의 많은 진보를 이룩했으나 국민 사이에 혜택의 배분이 평등하지 못했다. 이들은 또한 자신의 특권적인 위상을 보호하기 위해서 미국의 과일 기업인 UFC와 같은 외국 투자자와 보수적인 과두 세력에서 지지 세력을 발견했다. 농민을 위한 경제적 혜택과 중산층을 위한 정치적 참여에 대한 변혁의 압력이 1920년대 표면화되었지만, 1929년 대공황의 여파와 함께 1931년에 등장한 우비코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Leonard 1990, 172-73).
과테말라의 엘리트는 역사적으로 농민을 대부분 억압했고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의 요구 또는 대중이 자신을 조직하기 위한 모든 시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우비코는 모든 형태의 노조 활동을 반대했다. 우비코는 세계적인 대공황의 시기에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되었는데, 대공황은 과테말라의 중요한 농산물인 커피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대공황 시기 동안에 커피 가격은 반 이상 하락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과테말라는 유럽 시장에 접근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커피 생산국처럼, 과테말라도 미국 시장에 의존하게 되었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반적인 커피 가격이 하락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과테말라의 커피 수출이 감소하면서 과테말라의 재정수입이 부족하게 되었으며, 실업이 증가하게 되었다(Plantamura 2013, 44-45).
우비코 대통령은 1931~1944년 동안 과테말라를 통치했다. 대공황의 여파와 함께, 1931년 선거에서 우비코는 상류층의 지지를 받았고 이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전제적인 방식으로 통치했다. 중산층과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원주민도 고통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우비코가 그들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기회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1929년 대공황 시기에 우비코는 정부 재정 규모를 축소했고, 이런 상황에서 중산층 전문인이 군부에 참여하거나 관료가 되는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일자리 기회가 축소되었다. 우비코는 충성스러운 지지자를 여러 직위에 임명했다. 우비코는 반-공주의자였고 이에 공산당원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우비코는 노동조직도 공산주의자로 보았고 이들을 관용하지 않았다. 우비코는 “제2795법”(Decree 2795)을 제정하여 원주민을 더욱더 억압했다. 제2795법은 지주의 재산에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 총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는데, 지주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는 사람은 주로 원주민농민이었다. 이에 따라, 우비코에 대한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적대감은 1944년 혁명으로 증명되었다(Alberto 2009, 6-7).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대출을 강제하려 했는데, 이것은 미국이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경제적 관계를 확고히 하여 라틴아메리카 국가를 미국의 편에 서게 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우비코는 미국의 대출 제안을 거부하면서, 독일 나치에는 동정적이었다. 이에 우비코는 미국으로부터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독일과 독인인에 대한 위험성 때문에 미국은 우비코의 명시적 허락과 함께 독일계 과테말라인이 소유한 재산의 몰수 과정을 감시하기 위해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직원을 과테말라에 파견했는데, 왜냐하면 미국은 우비코가 실행하는 독일계 과테말라인의 재산몰수 과정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Schlesinger 1982, 27).
우비코는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으로서 군부, 대지주, 외국기업의 지지에 기초했다. 우비코 정부의 주요한 목표는 과테말라를 질서 있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우비코 정부는 중산층이 필요로 하는 사회적 진보를 위한 정책을 시도하지 않았다. 게다가 우비코는 자신의 정부에 반대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개인이나 단체를 억압하거나, 급진적 변혁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억압했다. 이웃인 엘살바도르에서 학생, 교수, 변호사를 포함하는 지식인 단체가 정치개혁을 요구하면서 엘살바도르 정권을 전복시켰을 때, 우비코는 시민권을 억제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우비코의 사임으로 연결되는 사회적 질서가 없어졌다(Tompkins 1964, 4).
절대로 반대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군부조차도 우비코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우비코는 반대자를 진압할 수 없었고 결국 1944년 7월 1일에 사임했다. 비록 우비코가 대통령에서 사임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불완전했다. 우비코의 지지자이자 군부 장성인 페데리코 폰세(Federico Ponce)가 이후에 임시정부 위원회를 통제했다. 즉 우비코의 사임 이후, 우비코의 지지 세력에 의해서 페데리코 폰세가 대통령에 임명되었다. 폰세 대통령은 1944년 7월 4일~동년 10월 20일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폰세 대통령은 2명의 다른 장군을 참여시켜서 삼두정치를 실행했다. 삼두체제는 임시정부에 1944년 혁명에 참여했던 시민은 배제했다. 그때까지 사관학교(Escuela Politécnica)에 근무하고 있었던 아르벤즈(Jacobo Arbenz Guzmán) 대위는 그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이후에 시민혁명 지도자와 봉기를 조직하기 위해서 엘살바도르에 갔다. 그러는 동안 아르벤즈의 동기 중에서 인기가 있었던 소장파 장교 출신이자 육군 탱크부대 지휘관인 아라나(Francisco Javier Arana) 소령이 아르벤즈와 시민봉기계획에 참여했다. 1944년 10월경에 폰세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무기한으로 유지하겠다고 선언한 이후에, 그는 군대를 무장시켰다. 이것은 폰세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민을 자극했다. 이때 아라나의 지지 세력이 쿠데타를 통해서 폰세를 사퇴시켰다(Tompkins 1964, 4).
아라나, 아르벤즈, 시민 출신인 호르헤 토리에요(Jorge Toriello Garrido) 3명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새롭게 구성했고 이들은 선거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헌법의 초안을 준비하기 위해서 제헌의회의 제헌의원을 선정하기 시작했다. 제헌의원은 과테말라 정치를 공고히 하고, 그들 사이에 상호신뢰를 고양하기 위해서 군인과 시민 지도자로 구성되었다. 시민사회 단체는 입법부를 구성하기 위한 빠른 선거 시행을 요구했다. 군부와 시민 사이에 일련의 타협을 통해서 헌법의 최종안은 1945년 3월 13일에 통과되었다. 대통령선거에서 아레발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Tompkins 1964, 5). 기본적으로 1944년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유주의 정부(1871-1944) 시기에 자본주의적 커피 수출경제가 적극적으로 도입되는 과정에서 사회경제적인 모순적 구조와 적대적인 사회적 관계가 고착되었기 때문이다(정이나 2015, 135).
2.2 아레발로(Juan José Arévalo, 1945-1950) 개혁 정부
“10년의 봄”이라고 불리는 과테말라의 혁명 시기 또는 개혁 시기(1944-1954)는 1944년 혁명에서 유래했다. 게다가 과테말라 역사상 처음 민주적으로 치른 1944년 선거에서 대통령 당선인이 탄생하면서 시작했다. 1944년 12월 공정하고 공개된 방식으로 치른 선거에서 교사 출신인 아레발로가 광범위한 국민의 지지로 인해 선거에서 승리했다. 아레발로는 1945년에 대통령에 취임했고 그의 목적은 이전의 군부독재에서 대의적 민주주의로 과테말라를 전환하는 것이었다(Plantamura 2013, 49).
1944년 과테말라 혁명은 근대적 자본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의 조건 창출을 목적으로 했다. 1944년 과테말라 혁명은 미국-라틴아메리카 관계의 이행기에 발생했는데, 즉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의 뉴딜(New Deal)과 선린정책(Good Neighbor Policy)에서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의 매카시즘(McCarthyism)과 보복 정책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Valdés-Ugalde 1999, 125). 1944년 혁명은 지난 독재와 큰 단절을 의미했고 과테말라의 발전과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의미했다. 1944년까지 과테말라는 강력하고 자의적인 독재 방식으로 통치되었다. 원주민 대부분에 대한 독재자의 억압과 약탈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1944년 혁명 이후부터 1954년까지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경쟁하는 민주주의적 선거에서 선출되었고, 노동법이 제정되면서 노동자와 농민이 스스로 조직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토지개혁이 시작되었다(McCamant 1984, 373-74).
1944년 이전 과테말라는 부자와 빈자 사이에 부의 큰 격차를 유지했던 군부독재에 의해 통치되었다. 한편으로, 독재자는 민주적 선거 대신에 지방의 관직에 자신의 지지자를 임명했고, 토지소유권 배분의 불평등은 과테말라에서 불평등의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예를 들면, 과테말라 서부 고산지역에서 사는 원주민을 계약노동자로서 모집했고 노예처럼 취급했다. 1944년 혁명 전의 마지막 독재자는 우비코였고, 그는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과테말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외국인과 농업기업의 투자와 공장설립을 권장했다. 과테말라 정부는 사람과 자원을 착취하려는 미국기업인 UFC에게 대부분의 토지소유권을 허용했다. UFC는 과테말라인을 위한 식량 생산 대신에, 환금성 수출작물을 주로 생산했고 이에 국가 경제는 수출농업 부문에 과도하게 의존적이었다. 1920년대 초에, 노동조합은 노동조건과 임금 증가를 위한 협상을 시도했으나 정부는 반복적으로 노조의 요구를 무시했다(Creedon 2019, 8).
이에 따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아레발로는 과테말라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시민적ㆍ법적 권리를 수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아레발로는 4개의 우선순위를 설명했는데, 그것은 민주주의의 공고화, 농업개혁, 노동자 보호, 향상된 교육체계였다. 곧이어 아레발로는 새로운 사회적ㆍ경제적 우선순위가 포함된 신헌법을 제정했다. 아레발로는 “정신적 사회주의”(Spiritual Socialism)를 언급했는데, 미국 국무부는 아레발로의 정신적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아레발로의 정신적 사회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했던 아레발로의 민족주의적 이념이었다. 아레발로는 정부가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을 중시했지만, 공산주의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레발로의 새로운 지도력은 온건한 개혁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례로서, 사회의 필요에 따라서 정부의 토지수용은 허용했지만, 아레발로는 그의 임기 동안 어떠한 토지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정책은 토지 엘리트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토지 엘리트는 아레발로 정부에 공산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붙이기 시작했다(Plantamura 2013, 48-50).
다른 한편, 아레발로 정부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1947년 노동법에 서명할 때까지 우호적이었다. 이 노동법은 노조를 조직하는 것, 집단적으로 협상을 하는 것, 파업에 대한 권리 등을 보장했다. 과테말라의 1947년 노동법은 1935년의 “미국노동관계법”(American 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을 참고로 하여 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노동법은 과테말라에서 미국의 개입을 유발한 중요한 요소였다. 미국 노동관계법처럼 과테말라의 노동법은 과테말라의 노동자를 위하여 보호를 제공했다. 즉 도시노동자는 노조를 조직할 권리를 보유했고 집단으로 협상할 수 있었으며 파업도 가능하게 했다. 최소 임금제도가 마련되었고 여성과 아동노동을 보호했다. 이것은 이전의 “리브레토”(Libreto, 정부가 만든 “노동 카드”로서 강제노동의 원인을 제공했음)와 대조되는 노동자를 위한 혁명적인 변혁이었다. 아레발로에 대한 미국의 평가는 아레발로가 노조를 합법화시켰기 때문에 아레발로가 공산주의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Plantamura 2013, 51-52).
그러나 이후에 아레발로 정부는 비효율적인 관료제, 관료의 경험 부족, 세금 부족에 따른 재정 부족이라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게다가 아레발로는 그에게 반대하는 음모를 발견하면서 헌법적 보장을 제한했다. 이에 아레발로 정부는 사회적 압력 아래에서 그의 “정신적 사회주의” 이념을 포기해야 했고 편의주의적인 정책을 시도했다. 아레발로 정부의 정치적 상황은 1948년에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정부는 초기의 열정을 상실하게 되었고 지지자가 분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효과적이지 않은 사회적 신화를 이용했다. 정부에 반대하는 음모의 물결이 발각되었다. 노동운동 지도자는 아라나에게 아레발로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노동자에게 무장시킬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그러한 협력을 거부했다(Tompkins 1964, 5).
결국 1948년에 이르러서 두 개의 정치세력이 개혁 문제와 대통령 계승 문제로 인해서 서로 갈등했다. 보수파와 중도 온건파를 포함하는 정치세력은 우비코에 반대하는 전복을 도왔으나 반-군국주의자는 아니었다. 아라나는 이 정치세력의 대변자였다. 좌파인 다른 정치세력은 모든 여당 세력을 포함했고 과테말라의 문제에 대한 진보적인 해결방식을 지지했으며, 과테말라 정치에서 군부 세력에 대한 대안으로서 정당의 발전과 의회주의를 지지했다. 군부의 지지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던 아르벤즈는 좌파적 정치세력의 대변자였다. 이런 상태에서 다음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겠다는 아라나의 비공식적 선언은 양 세력 사이에 적대감을 발생시켰다. 양쪽은 대결을 준비했다. 아라나가 1949년 7월에 암살되면서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아라나의 지지자였던 군 일부 세력이 갈등을 진압했다. 아라나의 암살과 아레발로 정부 사이에 관계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아르벤즈와 아레발로는 강력한 반대 세력의 제거로부터 이득을 보았다. 이에 따라, 아레발로와 아르벤즈 세력은 명확하게 권력의 최고위층이 되었다. 그런데도, 처음에는 아레발로가 이후에는 아르벤즈가 군부의 핵심 세력을 정치적으로 중화시키면서 군대를 민주화하려 했고 최종적으로 군부를 친정부적 기구로 변모시키려 했다. 이런 목적에 따라,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군 장교를 숙청하면서, 진보적이라고 여겨지는 군부 구성원에게 좋은 보직과 혜택을 확대했다. 1950년에 사회 혼란은 아레발로 대통령에게 군부가 필요하게 만들었고 이에 군부는 질서를 회복한 이후, 더 허약해진 국가의 통치력을 아레발로에게 되돌려 주었다(Tompkins 1964, 5-6).
2.3 아르벤즈(Jacobo Arbenz Guzmán, 1951-1954) 개혁 정부
혁명의 다음 단계는 아르벤즈로 귀결되었다. 그는 과테말라의 역사에서 민주적으로 치른 선거에서 두 번째로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아르벤즈는 1944년 혁명에서 우비코를 전복한 이후 삼두체제의 일원이었고 1951년 3월 대선 결과에 대해서 아레발로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아르벤즈 정부는 민주적 개혁을 지속했다. 아르벤즈는 자신을 “국민의 군인”이라고 칭했는데, 그것은 당시 아르벤즈가 국민의 인정을 받았고, 아르벤즈 정부의 개혁정책은 과테말라인의 기대를 반영한 것이었다. 아르벤즈 정부는 빠른 속도로 사회변혁을 추진했다(Moye 2001, 45). 아르벤즈는 그의 취임 연설에서 3개의 목표를 언급했는데, 첫째, 반-식민지(semi-colonial)의 종속적 국가 경제에서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국가로 과테말라를 전환하는 것이었다. 둘째, 아르벤즈는 봉건적인 퇴보한 국가에서 근대적인 자본주의적 국가로 과테말라를 전환하는 것이었다. 셋째, 대부분의 과테말라인의 삶의 방식에서 표준을 향상하는 것이 아르벤즈의 계획이었다(Schlesinger 1982, 52).
아르벤즈는 과테말라의 경제정책에서 민간부문의 주도권을 강화하고 과테말라의 자본을 발전시키는 것을 중시했다. 아르벤즈는 외국자본도 과테말라의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이상 환영할 것이지만, 과테말라의 사회적ㆍ정치적 환경에 개입하는 것에는 엄격히 거부할 것이라 했다. 아르벤즈는 수많은 개혁을 진척시켰던 민족주의자였다. 3개의 미국기업(UFC, IRCA, Electric Bond and Share)은 과테말라 독재체제 아래에서 상당한 이권을 양도받았다. 이것으로 인해서 미국기업은 과테말라 경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UFC의 자회사로서 철도기업인 “중미국제철도”(International Railways of Central America, 이하 IRCA)는 과테말라의 철도와 항구시설을 완전히 독점했고 또 다른 UFC의 자회사로서 전기기업(Electric Bond and Share)은 과테말라 전기의 80%를 생산했다. 이들 미국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부재했고 이에 거의 독점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비용이 높게 책정되어 이윤이 높았다. 과테말라의 수입ㆍ수출 수하물도 미국기업이 통제했다. 또한 미국기업은 대부분 높은 세금 우대 및 면세혜택을 받았다. 송금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외국기업에 과도한 여러 혜택을 제공했기 때문에 국제개발은행(IBRD)은 과테말라 정부를 비판했다. 국제개발은행은 독점과 부적절한 운송설비는 과테말라 제조업의 발전과 문화적 통합에 가장 큰 장벽이라고 지적했다(Gordon 1971, 133).
다른 한편으로 아르벤즈 정부의 중요한 정책으로서 농지개혁이 있는데,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농지개혁은 1952년에 시작했다. 아르벤즈 정부에서 농지개혁의 목표는 역사적으로 발생한 토지의 불균형적인 배분을 시정하려는 것이었다. 아레발로 정부 동안에 일정한 농지개혁의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과테말라인은 아르벤즈 정부의 농지개혁을 지지했다. 1950년의 농지 현황조사에 따르면, 대지주 2%가 과테말라에서 경작 가능한 토지의 72%를 소유했다. 대농장 지주가 4백만 에이커의 경작 가능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 소유한 토지 중에서 1/4 이하만이 실제로 경작되고 있었다. 이것은 이용할 수 있는 생산적인 토지가 경작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작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이들에게 혜택을 주는 토지재분배 노력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Plantamura 2013, 54).
당시 과테말라 인구의 90%가 지방에 살고 있었음을 고려할 때, 아레발로의 농지개혁은 실제로 약간의 변화만을 발생시켰을 뿐이다. 이에 아르벤즈 정부의 목표는 농지개혁을 지방으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즉 아르벤즈의 농지개혁은 과테말라 대부분인 토지 없는 농민과 지방 노동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이 아르벤즈 정부가 농지개혁을 통해서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표였다. 이에 따라 1952년 6월에 “제900 호법”(Decreto 900)으로 알려진 농지개혁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이 농지개혁법의 핵심은 사용하지 않는 토지를 농민에게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했다. 수용된 토지는 유상 보상의 방식이었다. 아르벤즈의 농지개혁법은 질서정연함의 표본이었다. 농지개혁법은 엄격하게 운용되었는데, 이것은 불만을 원만히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농지개혁법 전반에 관한 사항을 처리하는 기관으로서 “지방 농지위원회”를 창설하였다(Plantamura 2013, 55-56).
미국기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 국무부와 UFC는 아르벤즈 정부의 개혁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미국 국무부는 농지개혁법 도입 이후 UFC의 과테말라 정부에 대한 공식적 불만을 접수했다. 아르벤즈의 개혁은 다른 중미 국가보다 더 진보적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온건하다고 볼 수 있었다. 실제로 과테말라 개혁의 대부분은 비폭력적이었고 평화로운 방식의 민주적 변혁으로서 미국의 이상에 가까웠다. 게다가 아르벤즈 정부의 토지수용은 유상 보상 방식이었다.
다른 한편, 아르벤즈 정부는 대선 선거운동 시부터 공산주의로 의심받고 있었다. 그것은 ①아르벤즈가 대선에서 공산주의적 특징이 있는 노동운동의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②공산주의 지도자가 아르벤즈에게 협력했다. ③아르벤즈 정부의 압도적인 농지개혁과 노동 개혁 때문이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 아르벤즈는 과테말라 공산주의자에게 합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공산주의자는 아레발로 정부하에서는 공식적인 정당이 아니었지만, 이후 이들은 과테말라노동당(Partido Guatemalteco del Trabajo)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아르벤즈 정부에서 합법적인 정당으로서 인정받았다. 과테말라노동당은 당시 가장 강력한 정치조직이 되었지만, 강력한 대중적 지지는 부족했다. 아르벤즈 정부 내에서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은 증가했다. 그러나 의회의 56명의 의원 중에서 4명이 공산주의자였는데, 전체로서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또한 대통령에 대한 영향력과 접근권을 공산주의자들이 보유하기도 했지만, 아르벤즈에 대한 영향력은 미미했다. 이러한 이유로, 아르벤즈 내각에서 공산주의자인 장관이 없었고 군대에 대한 영향력도 높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르벤즈 정부는 과테말라 공산주의와 관계를 계속 유지했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아르벤즈의 영향력이 약해져서 대중의 지지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공산주의자는 아르벤즈 정부와 계속해서 관계 유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벤즈는 소련과 직접적인 연계는 없었다. 아르벤즈는 민족주의자였고 그의 실질적 바람은 농민과 노동자 사이에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하는 것이었다. 미국 정부는 아르벤즈가 공산주의 세력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미국의 처지에서 과테말라 공산주의자는 과테말라 민주주의 체제에 전복적이라고 보았다. 1954년 3월 미국 정부는 미 의회에 과테말라 상황을 보고하면서, 평소에 아르벤즈는 노동자 운동과 농민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외국기업이 과테말라 민주주의에 피해를 주는 것으로 보았다. 아르벤즈는 과테말라에서 공산당을 포함하여 모든 시민이 자신의 권리를 존중받아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민주주의를 희생하지 않을 것이고 공산주의에 의한 과테말라의 위험도 좌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의 공산주의와 국제공산주의가 아르벤즈 정부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파악했다(Moye 2001, 45-47).
Ⅲ. 1954년 군부 쿠데타의 특징
1944~1954년 동안은 과테말라에서 정치적 근대성과 경제적 진보를 향한 성공적인 이행기였다(Valdés-Ugalde 1999, 129). 이때, 대농장 중심의 과 두 지배 질서의 사회경제적 구조와 독재정권을 대체했다(정이나 2015, 145). 과테말라에서 10년 동안(1944-1954)에 아레발로 정부와 아르벤즈 정부는 과테말라의 주권 회복과 경제발전을 위한 중요한 성과를 이룩했지만, 이들의 노력이 계속되도록 미국 정부는 허용하지 않았다. 1954년 과테말라의 내정에 관여하려는 미국 정부의 결정은 아르벤즈 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해서 군부 쿠데타 계획을 허용했다(Creedon 2019, 13).
1954년 1월 말에, 아르벤즈 정부는 온두라스와 니카라과에서 과테말라 침공을 위해 이디고라스 장군과 아르마스 대령 사이에 신사협정을 비난했다. 그리고 과테말라 정부의 전복을 위한 재정지원자로서 미국 정부를 지목하는 증거를 제출했다. 아르벤즈 정부가 제출한 증거는 전 미군 대령인 칼 스튜더(Carl Studer)가 UFC를 위해서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쿠데타 세력의 훈련을 담당했고 아르마스는 UFC의 철도를 통해서 UFC가 보유한 토지인 티스키사테(Tisquisate)에서 쿠데타에 필요한 물품을 밀수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아르벤즈의 증거서류가 아르마스와 이디고라스에서 누출되었다고 보도했고, 그 증거서류는 사실로 받아들여졌는데, 왜냐하면 회고록에서 이디고라스가 아르마스에 의해서 증거가 누출되었다고 확인해주었기 때문이다(Gordon 1971, 144).
1954년 6월 18일 수백 명의 온두라스 인으로 구성된 쿠데타 세력과 함께 아르마스가 온두라스에서 출발하여 과테말라를 침공했다. 아르마스는 1944년 과테말라 혁명에 군인으로서 참여했고 이후 그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아르마스는 아레발로와 아르벤즈 정부에 반대했다. 이에 혁명하는 동안 주요한 군부 인물이었던 아라나(Francisco Javier Arana) 대령이 주도했던 실패한 쿠데타에 참여한 이후에 아르마스는 온두라스로 망명 갔다. 1950년 아르마스가 온두라스로 망명가기 전에 또 다른 실패한 쿠데타를 시도했는데, 이 사건은 미국의 관심을 이끌었다. 왜냐하면, 과테말라의 쿠데타 주도자로서 적합한 인물을 미국 정부가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미국의 자금, 무기, 병력, 훈련 등의 지원을 받은 아르마스는 미국 CIA와 과테말라 침공에 합의했다. 쿠데타 10일 동안에 미국 CIA는 니카라과에서 미국인 조종사를 은밀하게 고용하여 비행기로 폭탄을 과테말라시에 투하하는 방식으로 아르마스의 지상공격을 도왔다. 마침내 1954년 6월 27일 과테말라 군부는 아르벤즈의 사임을 요구했다. 아르벤즈는 대통령을 사임하면서 과테말라시의 외국대사관에 피신했다. 과테말라 군부와 아르마스 사이에 일련의 협상 이후, 미국특사의 조정에 의해서 아르마스가 대통령이 되었다. 1954년 쿠데타 이후, 민주적으로 선거에서 당선된 과테말라 정부의 붕괴에 대해, 미국 정부는 미국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과테말라에서 반미시위가 발생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도 미국을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노동당을 포함하여 영국의원도 미국을 비난했다. 아르벤즈 정부가 심각하게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잠재적인’ 위협을 미국개입의 정당한 이유로 이용했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을 미국은 부정했다. 그러나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가 과테말라에서 미국 민간기업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도되었다는 것이 이후에 확인되었다(Creedon 2019, 20-21).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이 되지 못했던 아르마스는 난폭한 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 1957년 암살 때까지 과테말라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아르마스는 아레발로와 아르벤즈 정부의 개혁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아르마스는 모든 야당의 활동을 금지했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했으며 정치적 반대 세력을 고문했고 교도소에 보냈다. 대부분이 원주민인 노조 지도자는 특히 충격을 받았다. 1954년에 발생한 쿠데타는 36년(1960~96) 동안 게릴라와 정부 사이에 발생한 내전에서 빈자와 원주민의 억압을 촉발했다(Creedon 2019, 22). 내란 당시 군부가 자행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은 군부와 결탁한 과두 세력의 반공 이념에 따른 이념 갈등이라는 것은 형식적 외향일 뿐이고, 내용상으로는 농지개혁을 통해서 기득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던 과두 세력과 개혁 세력 간의 적대가 만들어낸 계급투쟁의 결과였다. 따라서 내전 당시 군부가 원주민에게 자행한 수많은 학살의 원인은 인종적 편견이나 갈등의 문제라기보다는 게릴라 세력과 원주민농민의 정치적 연합을 염려한 군부와 과두 세력의 군사적 전략이었다(정이나 2015, 151-52).
3.1 정치 사회적 측면
과테말라 사회는 1821년 스페인의 독립으로부터 1870년대까지 보수주의 세력이 지배 세력이었고 1871년 이후에 자유주의 세력이 지배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부가 1930년대에 독재로 전환되면서 1944년에 과테말라 혁명이 성공했지만 1954년 미국이 지원하는 쿠데타로 인해서 진보적 개혁이 종식되었다. 독립 이후 스페인 백인 출신 반도인이 어느 정도 위상을 계속 유지했다면, 1870년대 이후 과테말라에 대규모 커피 수출산업이 발달하면서 자유주의 세력인 끄리오요 백인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대규모 커피 수출산업의 발달로 인해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라디노가 등장하게 되면서, 원주민은 노동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외국 투자와 외국기업이 과테말라에 진출하면서 대규모 커피, 바나나 수출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에 규모의 경제를 위한 토지의 집적ㆍ집중이 발생했고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라디노와 원주민이 분열되면서 원주민은 더욱 소외되었다. 이런 역사적ㆍ구조적 모순은 1944년 혁명의 역동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아레발로와 아르벤즈의 개혁정책은 토지과두세력과 외국기업에 피해를 주면서, 1954년 쿠데타의 원인을 제공했다. 이후 36년간(1960-1996) 내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6년 정부와 게릴라 단체가 평화협정에 서명하면서 과테말라는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이르렀다.
세계자본주의 시장의 수요증가와 함께 커피와 바나나의 대량생산으로 인해 과테말라는 대규모 토지와 노동력이 있어야 하는 농업 산업국가로 변모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분산적인 토지 소유 형태 및 노동정책에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다. 우선 1871년 이전에 형성된 교회소유의 토지를 수용했고 원주민공동체 소유의 토지는 더 이상 경제적으로 의미가 없게 되었다. 교회소유의 토지와 원주민공동체 소유의 토지에서 더 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된 농민은 대규모 농업노동자가 되었다. 이처럼 자유주의 이념을 토대로 수립한 독재정권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 토지의 독점 소유와 노동착취 구조를 재생산했다. 즉 자유주의 정부에서 근대화의 목적은 토지의 사적소유를 합법적으로 보장하고 원주민의 강제노동을 제도화하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에 과테말라 토지 소유구조에 큰 변화가 발생했는데, 그것은 외국 투자의 증가에 따른 것이었다. 커피 생산을 중심으로 성장했던 독일계 자본은 점차 약화되면서 과테말라 경제는 미국에 종속되어 갔다(정이나 2015, 138-140).
1871년부터 자유주의 정부는 커피(이후 바나나)의 수출증대를 위한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했다. 과테말라에서 커피가 중요한 수출작물이 되면서, 특히 커피 수확 시기인 10~2월 사이에 대규모 노동이 있어야 하는데, 과테말라 통치엘리트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커피 재배의 확대로 인해서 커피와 관련된 노동력 부족 현상 때문에 “만다미엔토” (Mandamiento)라는 식민시대 강제노동을 재도입했다. 이것은 자유노동의 자유주의 원칙과 명백히 충돌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만다미엔토는 민간부문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가 강제노동을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식민시대의 제도를 재도입한 것이다. 강제노동 제도로서 만다미엔토는 부채 농민과 자유농민의 임금을 낮추면서 지주의 이익을 증대시켰다(Short 2007, 33-34).
이처럼 현실에서 노동력의 부족과 정부의 강제적인 노동 공급 사이의 모순은 사회갈등을 격화시켰고 이런 맥락에서 라디노가 등장하게 되었다. 과테말라 사회에서 라디노(ladino)는 인종적으로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이거나 원주민이지만 삶의 방식에 있어서 원주민의 삶의 방식 대신에 과테말라에 주도적인 백인 유럽문화를 추구하는 원주민을 라디노로 구별한다. 즉 혼혈인 라디노는 말할 것도 없지만, 원주민의 경우 인종적으로는 원주민이지만, 문화적으로 원주민 문화와 관계없는 과테말라인을 구분하는 명칭이라 할 수 있다. 환금성 작물로서 커피의 도입과 커피 재배면적의 확대(이후에는 바나나)는 과테말라에서 새로운 인종적 구별을 발생시켰다. 라디노는 백인 엘리트를 위해 원주민을 관리하는 대리인이 되었고, 문화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더욱 ‘현대적인’ 종족으로 변모했다. 이런 결과로서, 라디노는 원주민적 요소가 상대적으로 더 적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과테말라에서 인종은 계급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원주민 소농은 라디노와 같은 계급이지만 서로 다른 인종(또는 종족)으로서 공간적으로 분리되었다. 이에 따라, 라디노는 새롭게 만들어진 계급 위상에 놓이게 되었는데, ‘부분적인’ 백인으로서 라디노는 대지주와 원주민인 농민 사이에 대리인으로서 중재하는 역할을 하면서 인종적 위계 제의 전통적 이념에 도전하지 않았다. 이것은 인종적 위계의 뒤에서 보조적인 역할자로서 라디노가 착취체제에 참여했음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라디노의 일부는 원주민의 착취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라디노는 비-원주민으로서 취급되면서 인종적으로도 이득을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종 체계와 자유주의 세력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커피 경작으로 전환은 문화적인 측면에서 계급분화의 ‘급전환’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외국 투자를 특징으로 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과테말라의 커피 생산은 특히 외국 이민을 조장했다(Short 2007, 33-35). 다시 말하자면, 과테말라 사회는 인위적으로 낮은 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와 대지주가 원주민 농민을 억압하면서 대지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변모한 “탈구된 사회”(Disarticulated Society)가 되었다(Short 2007, 33). 게다가 과테말라에서 커피 재배의 확대는 유럽 시장의 접근과 기술지식을 통해서, 유럽인과 백인의 ‘우월성’을 재강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에 외국인의 투자와 서구사회로 수출로 인해서 과테말라 사회는 서구중심주의가 더욱 강화되었다(Short 2007, 35).
1944년 혁명 때까지 과테말라 사회는 스페인 식민시대 이래로 큰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권력은 여전히 백인인 대농장 토지 지주, 군 장성, 외국기업 대표 등에 있었고 정도는 덜하지만, 로마가톨릭 등에 있었다. 과테말라의 엘리트는 통상적으로 스페인 후손으로서 상대적으로 문해력을 갖고 있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통제하며, 소수인 백인으로서 교육받은 부자였다. 과테말라에서 하층민이 사회의 상류층에 진입하는 것은 어렵다고 여겨지지만, 원주민에서 라디노로 사회적 이동은 가능했다. 원주민과 라디노 사이에 차이는 피부색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원주민과 라디노 사이에 피부색의 차이로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원주민과 라디노 사이의 차이는 경제적ㆍ사회적 측면에서 구별할 수 있다. 시민적 책임 의식, 유럽식 의복 착용, 스페인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 스페인의 전통을 따르려는 사람은 라디노로 인식한다. 반면에 원주민 전통 방식의 의복 착용, 원주민 언어사용, 원주민 관습을 따르려는 사람은 원주민으로 구별한다. 인종적으로 보면, 라디노는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이거나 원주민 부모를 둔 자식으로서 원주민이라도 상기 라디노의 구분을 따르면 라디노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라디노가 되려는 모든 원주민은 스페인어를 배우고, 서구식으로 옷을 입으며, 라디노 공동체로 이사할 수 있으면 라디노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주민이 필요한 경제적 부와 스페인어를 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기존의 과두제의 지배문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라디노로 구분하지 않는다. 원주민공동체는 라디노의 삶으로부터 고립되었고 내부구성원 사이에 매우 친밀한 관계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Tompkins 1964, 26). 과테말라에서 라디노의 출현은 근대국가의 틀 내에서 원주민을 합법적으로 배제하고 착취관계를 재구축하기 위한 새로운 국가이념의 형성과정이었다. 라디노와 원주민이라는 정체성의 양극화를 통해서 라디노화 되지 않은 원주민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라디노화는 형식적으로는 원주민을 국가 일부로 통합시키려는 동화정책이었으나 내용상으로는 원주민과 라디노를 대립시키는 분리ㆍ고립 정책이었다. 자유주의 정부는 인구의 1/3을 차지하는 라디노를 통해서만 소수의 백인 세력을 견제하고 다수를 차지하는 원주민을 커피 수출경제의 노동력으로 이용할 구실을 만들 수 있었다(정이나 2015, 137-138).
1940년대까지 과테말라 인구의 3/4은 행정구역상 가장 낮은 단계인 “무니시피오” (Municipio)라는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의 삶을 영위했다. 전형적인 마을인 무니시피오에는 1~2천 명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중에서 2/3는 원주민이고 나머지 1/3은 라디노로 구성되었다. 원주민은 일상적으로 마을에서 삶을 살아가고 물건을 팔기 위해 마을의 시장에 가는 것을 제외하면, 이웃 마을에도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전기와 수도는 일반적으로 라디노의 집에는 있지만, 원주민 집에는 거의 없다. 정치적 측면에서 마을 주민의 적극적 역할은 투표뿐이고 과테말라 전체와 공동체에 대해서는 약간의 정보만이 있을 뿐이다. 행정적으로 마을은 2종류의 정부 관리가 있는데, 하나는 원주민으로 구성되고 다른 하나는 라디노로 구성된다. 각각의 마을은 원주민 시장과 라디노 시장이 따로 있다. 원주민 시장은 마을의 원주민 문제만 전적으로 관리한다. 라디노 시장은 중앙정부가 지방행정의 대표로 임명된 자이고 원주민 시장보다 우위에 있는 권위를 보유하면서, 마을 전체를 대표한다. 일상에서 원주민의 열등한 사회적 위상은 지속해서 강조된다. 지방의 사법 체계는 공평하지 않고 판결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지방 판사의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서 즉 법 자체보다는 판사의 개인적 성향에 따라서 엄하게 판결하거나 관대하게 판결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원주민은 사법당국과 관련된 소송을 불안하게 여겼다. 이에 따라, 원주민은 지방 관리의 권위는 존중하지만, 법관에 대한 신뢰는 매우 낮은 편이다. 다른 한편으로 교육과 노동에 대한 태도도 원주민과 라디노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면, 원주민 대부분은 학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원주민 스스로가 더 유용한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부터 자신의 자식을 떨어트려 놓으려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원주민은 자신의 자식이 교육받는 것을 혜택이라 보지 않았다. 원주민이 평가하기에 교육은 라디노의 집착이었다. 원주민의 노동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육체노동은 남성임을 평가받는 요소였다. 그러나 라디노의 관점에서 보면, 육체노동은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으로 보았다. 마을에서 높은 직업적 위상은 일반적으로 라디노가 보유했고 대부분의 높은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도 라디노의 직업이었다. 원주민 대부분은 라디노의 농장에서 일하는 농업노동자였다. 원주민의 중요한 특징은 자급자족과 고립된 삶의 방식이었다. 라디노는 문화적으로 원주민과 차이가 있고 전통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새로운 이념, 가치, 신념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원주민은 전통적으로 1944년 혁명 전까지 원주민공동체에 기초한 공동 토지를 사용했다. 그런데 세금 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존에 사용하고 있던 토지에 대한 합법적 토지소유권을 인정받는 행정절차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토지의 소유권은 원주민의 관습에 관한 것이었고 토지소유권의 갈등은 원주민공동체 내에서 해결되었다. 반면에, 라디노는 정부 당국에 토지소유권 청구 과정에서 토지소유권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토지가 아닌 것도 포함해서 자신의 소유권 하에 있는 것으로 청구했다. 이에 라디노는 소유권의 형식적 요건을 갖추면서 원래 자신의 토지보다 훨씬 많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취득했다. 1952년 다시 한 번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모든 개인에게 공식적인 소유권을 인정하는 소유권 제도의 표준화를 정부가 시도했을 때, 많은 원주민은 정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고 관습적으로 원주민이 이용해 왔던 토지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이런 토지는 의무 불이행으로 인해서 국가소유권 하의 토지가 되었다(Tompkins 1964, 26-28).
1944년 혁명 이후, 원주민에 대한 정부의 태도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발생했다. 아레발로 정부 하에서 신헌법은 “반-방랑법”을 폐지했고, 사회보장제도를 창설했다. 또한 신노동법은 서민 특히 원주민의 사회적ㆍ경제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노조는 도시에서 설립되었다. 1952년 “농지개혁법”이 제정된 이후, 1948년부터 조직하기 시작했던 농업노동자의 느슨한 조합이 설립되었다. “과테말라 전국 농민협회”(the National Peasant Confederation of Guatemala)는 실제로 도시노조 규모의 2배가 되었다. 1944년 이후에도, 여전히 지방에서 원주민에 대한 무시가 증가하면서, 과테말라의 정치에서 중요한 요소로서 원주민단체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1944년 혁명 이후에 민주적 정권이 형성되었고 지방에서 개혁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벤즈 정부 동안에, 정당, 농민 노조, 노동자 노조 그리고 농업위원회에 의해서 과테말라의 정치가 운영되고 통제되면서 피지배 계급 내에서 상층과 하층이 발생했고 그들 간의 분열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레발로와 아르벤즈 정부가 과테말라시와 지방을 연결하려고 했지만, 약간의 성공밖에 하지 못했다(Tompkins 1964, 28-29). 즉 1944년 혁명에도 불구하고, 피지배 계급 내에서 상층과 하층의 분열, 중앙과 지방의 분열, 라디노와 원주민의 분열, 원주민공동체의 고립적인 삶의 방식과 교육과 노동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은 정치 사회적 측면에서 1954년 쿠데타의 원인이 되었다.
3.2 경제적 측면
스페인의 식민 통치 시대처럼, 1940년대 초기에 과테말라의 경제구조는 주로 엄격한 대농장제에 기초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까지 이민해 온 독일 커피 재배자와 함께했다. 1944년 혁명지도자는 과테말라의 경제적 약체성을 인식했고 이에 개혁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다. 혁명지도자는 개혁 없이 과테말라의 농업 다각화와 산업발전의 성취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소수의 대지주는 커피와 바나나라는 2개의 농작물 경작과 판매에 의존했다. 커피와 바나나의 국제가격은 매우 경쟁적이었고 계절마다 국제가격의 등락이 심했다. 커피와 바나나의 국제가격이 좋은 해에는 번영했고 나쁜 해에는 과테말라 경제에 재앙을 가져왔다. 다른 한편, 거의 봉건적 토지제도는 생존을 유지하는 정도의 농사를 짓는 지방의 원주민과 연관되어 있었다. 커피와 바나나의 재배, 관리, 판매는 특정한 시기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1944년 혁명 이전의 과테말라 정부는 값싼 대량의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서 “반-부랑법”(Anti-Vagrancy Law)을1) 제정했고 이 법에 따라서 원주민은 대농장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그러나 1944년 혁명 이후에 반-방랑법은 폐지되었다. 도시에서 제조업은 소자본을 대표했고, 작은 규모로 운영되었으며, 소수의 노동자를 고용했다. 과테말라 도시제조업은 농업생산물을 가공하거나 경공업 제품을 소량으로 만들었으나, 기본적으로 과테말라는 필요한 재화 대부분을 외국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했다. 과테말라의 경제에 투자했던 지방의 사업가는 외국기업에 우호적인 정부에 대해서 자주 실망했다. 과테말라 국내시장은 낮은 구매력으로 인하여 어려움이 있었다. 대부분의 과테말라의 사업가는 주로 미국과 거래했다. 1941년 과테말라의 수입에서 미국의 비중은 78.5%였고 과테말라의 수출에서 미국의 비중은 92%였다(Tompkins 1964, 17).
농지 문제는 1950년대 초에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등장했다. 과테말라의 토지소유권과 농업은 1944년 이전의 군부독재에 의해 시도된 정책 때문에 매우 불균등했다. 과테말라에서 총인구의 2%가 경작 가능한 토지의 72%를 통제했다. 나머지 인구의 88%가 토지의 14%를 보유했다. 1,115에이커 이상을 보유한 농장은 총 농장의 0.3%였고, 이 규모의 토지는 과테말라에서 모든 농장 토지의 반 이상을 포함하는 규모였다. 1952년 농지개혁 이전에, 농지 소유의 불균형 정도는 예를 들면, 중앙 고산지역에 많은 원주민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마을 주변의 대농장에서 경작 가능한 토지의 80%가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반면 농민의 3/4은 토지를 전혀 갖고 있지 않거나 약간의 토지를 소유했을 뿐이다(Gordon 1971, 133). 과테말라인의 2/3 이상은 최소 생존농업에 종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과테말라의 농지제도는 광범위한 빈곤의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양부족과 건강 문제에도 많은 원인이 되었다. 농지 문제의 핵심은 토지 없는 과테말라인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정착시키는 것이었고 특히 과테말라의 북부지역과 동부 국경 지역에 있는 토지를 분배하여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우비코 정부는 토지 없는 농업노동자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서 약간의 노력을 했다. 1930년대 우비코 정부는 1,107에이커의 토지를 독립적인 농민이 되기를 원했던 지방 농민에게 제공했고, 토지와 관련이 있는 여러 비용을 지급할 여력이 없는 농민에게 씨앗, 기구, 유통비용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비코 정부는 자신의 정책을 철회했는데, 왜냐하면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지주들이 불평했기 때문이었다. 우비코 정부의 정책에 대한 지주의 불만은 농민에게 토지를 제공하게 되면 지방에서 노동 공급이 축소되어 대농장에 노동력 부족이 발생하고 이에 노동가격이 상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비코 정부의 농지정책은 가장 생산적이고 중요한 경제 부문을 분열시킬 것이라는 지주의 불만을 반영했다. 이에 우비코 정부는 반-부랑법으로 알려진 제도를 통해서 대지주에게 값싼 대량의 노동력을 공급했는데, 이것은 농업노동자 희생의 대가를 대지주에게 이전시켜서 대지주가 상당한 이윤을 획득하게 했다. 이후 우비코 정부는 대농장의 생산에 위협이 되는 것은 어떠한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경험이 없는 농민에 의한 소규모 농장은 여러 해 동안 잘 운영되어 온 대농장처럼 효율적으로 운영하지 못했다. 대농장 지주는 농지개혁만 방해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방해했다. 정부의 소유권 등기와 조사를 위한 조치의 부족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1944년 후반에 토지의 약 20%만이 사적으로 소유권을 유지했다. 나머지는 국유지였고 대규모의 토지가 그때까지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 지방정부는 자신의 관할권 아래에 있는 소유권의 경계를 정확하게 정하지 못했다. 새롭게 배분된 토지가 농업에 적당한지 그리고 토지의 구획 경계가 정확히 규정되었는지 확실히 하지 않고서는 원주민이 많이 사는 곳에서 대규모의 토지 배분은 가능하지 않았다(Tompkins 1964, 18-19).
농지 문제는 개혁 정부의 중요한 문제였지만, 아레발로 정부도 관리하기 어려운 행정적 문제와 헌법적 문제에 직면했다. 단적인 예로서, 아레발로 정부는 국유지에 몇 개의 집단농장을 설립하고 나서 농업의 기계화와 현대적인 저장시설을 진흥하기 위해서 소수의 대지주 사이에 자발적인 조합을 조직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곧 운영을 멈추었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많은 자본이 있어야 했는데, 정부가 자금지원에 실패하면서 멈추게 되었다. 다른 사례로서 아레발로 정부는 “강제임대법”(the Law of Forced Rental)을 도입했는데, 그것은 대지주가 토지 없는 농업노동자에게 경작하지 않는 토지를 임대하여 생산된 농작물 가치의 5%를 넘지 않는 비율에 임대하도록 했다. 이것은 목표치에 이르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이전의 복잡했지만, 실행 가능한 토지 임대 관습을 깨트렸기 때문이다. 1951년 대중은 아르벤즈에게 압도적인 대통령선거 승리를 안겨주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아르벤즈가 농지개혁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에 아르벤즈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한 법을 제정했다. 그의 대통령 임기 동안에 혁명에 대한 대중과 국가 사이에 인식의 간격을 축소했다(Foster 2001, 2). 1952년 아르벤즈 정부는 공산주의적 노조의 협력과 함께 “농지개혁법”을 제정했다. 농지개혁법은 1945년 과테말라 헌법의 제88조에 근거했는데, 그것은 국가의 중요한 기능인 농업 활동을 장려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노동의 이익이 대부분의 과테말라인에게 소위 말하는 경제적 활동으로부터 발생하는 부의 공정한 배분을 위하여 특별히 노동자에게 혜택이 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농지개혁법은 특정 토지 규모 이상의 경작하지 않는 토지를 수용했다. 664에이커 이상의 토지 보유는 대토지 보유자로 규정했는데, 이 규정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일반적으로 대규모 토지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사용했다(Creedon 2019, 10). 농지개혁법은 221~664에이커 사이에 토지를 보유한 농민이 만약 토지의 2/3를 경작하지 않거나, 그 토지의 소유자를 위해서 누군가 그 토지를 경작하지 않을 때, 토지를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Tompkins 1964, 19). 토지 보상은 25년 만기 연간 이자율 3%로 제공하는 정부 채권 방식이었고 이것은 1952년 5월에 부가세를 신설하여 재원을 마련하여 운영했다. 국가에 의해 배분된 토지의 연간 임대료는 수용된 민간토지인 경우는 생산된 가치의 5%로 정했고, 국가의 토지인 경우는 생산된 가치의 3%로 정했다. 토지 배분과 토지개발을 위해 농민에게 필요한 신용제공은 전국농업은행(National Agrarian Bank)을 통해서 이루어졌다(Gordon 1971, 138).
농지개혁법에서 중요한 조항은 토지를 상실한 대지주가 토지와 관련하여 법원에 어떠한 사법적 호소를 할 수 없도록 했다. 대지주의 호소는 농지개혁법을 관리하기 위해서 설치한 “농지개혁특별위원회”를 통해서 대통령에게만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일반 법정에서 대지주의 수용된 토지의 사법적 권리를 제거하면서 행정부의 직접적인 통제에 두었다. 토지는 살아생전에만 개인에게 배분되었고 소유권은 이전되지 않았다. 즉 사용권은 가능했지만, 소유권은 부여하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지주가 되었고 농민은 임차인이 되었다(Tompkins 1964, 19-20). 토지 없는 농민 중에서 아르벤즈 농지개혁으로 인해 10만 명의 가정이 혜택을 보았고 개혁으로 인해서 직접적으로 혜택을 본 사람은 총 3백만 명 인구 중에서 50만 명에 이르렀다. 약 1백40만 에이커의 토지가 평균 10에이커 규모로 농민에게 재분배되었다. 농지개혁법에 따른 정부의 배상액은 8백35만 달러로 평가되었고, 농민에게 신용을 제공한 액수는 1천2백만 달러로 평가되었다(Gordon 1971, 138). 그러나 농지개혁법이 18개월 동안 진행된 토지개혁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하면서, 결국 아르벤즈 정부 자체의 붕괴를 촉진했다. 그런 갈등 일부는 정부의 실수에 기인했다. 정부가 수용한 토지를 오랫동안 요구했던 원주민공동체에게 토지를 배분한 것이 아니라, 농지개혁을 실행했을 때, 그 토지에 우연히 살고 있었던 이주한(전입한) 농업노동자에게 배분했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했다. 다른 유형의 갈등은 과테말라 지방의 구조에서 유래했다. 과테말라시의 중앙정부가 토지개혁을 지방정부에 확대하려 했을 때, 종종 소란이 발생했다. 고지대에 사는 원주민공동체는 중앙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도시의 라디노에 대해서 의심했다. 게다가 다른 원주민공동체는 아르벤즈의 개혁이 너무 늦게 진행된다고 보았다. 이에 원주민공동체는 불법적인 토지점거를 통해서 자기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다른 한편으로, 아르벤즈의 중앙정부는 지방의 토호 세력의 개인적 권한을 축소하려 했으나, 이미 오래전부터 형성된 후견적인 관계망과 오랫동안 유지된 대지주-농민의 관계로 인해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Ching 1995, 384-85).
아르벤즈 정부가 1954년 전복된 이후, 권력을 잡은 아르마스는 대통령 취임 즉시 농지개혁법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선언했다. 이에 많은 농민이 부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정부의 토지개혁기록은 아르벤즈 정부가 붕괴한 이후에 폐기처리 되었다. 이처럼 농지개혁법은 대지주의 아르벤즈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았고 기존의 대지주와 농민 사이의 후견적인 관계망은 1954년 쿠데타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게다가 정부의 실수로서 수용된 토지를 오랫동안 토지를 요구했던 농민이 아닌 이주한 농업노동자에게 배분하면서 원주민농민의 불만이 존재했고, 다른 한편으로 원주민농민이 평가하기에 서서히 진행된 아르벤즈 농지개혁법은 원주민이 불법적 토지점거를 유발했다. 당연히 불법적으로 자신의 토지를 상실한 자의 불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농지개혁법과 관련된 여러 부문의 불만이 존재했고 이들의 불만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큰 상태였고 이것이 1954년 군부 쿠데타 발생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50년대 초기에 토지수용의 속도처럼, 과테말라에 있는 외국기업인 UFC에 대한 처리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1944년 혁명 이전의 정치지도자 대부분은 UFC를 과테말라와 미국 사이에 가까운 양국 관계의 상징으로 인식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UFC는 과테말라의 무역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44년 혁명 이전에 자급자족과 경제적 독립은 많은 과테말라인의 희망이었다. 1944~1954년 동안에 과테말라의 민족주의적 경향은 미국과의 관계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930년대 초에, 우비코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UFC는 과테말라에서 규모가 큰 2개의 좋은 토지를 보유했는데, 하나는 태평양 연안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대서양 연안에 있었다. 바나나의 수출이 증가하면서, 과테말라 총수출의 10%를 담당하는 UFC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었다. 바나나는 커피에 이어서 과테말라에 달러를 제공하는 순위에서 2위에 있었고 1만5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다. 그 외에도 많은 과테말라인이 직간접적으로 UFC와 관련이 있었다. UFC는 과테말라에서 다른 중요한 기업을 소유 또는 통제했는데 그중에 하나는 IRCA라는 철도회사였다. 이 철도회사는 약 5천 명의 과테말라인을 고용했고 과테말라에서 철도와 관련이 있는 상당한 토지를 보유했다. 이 철도는 상하기 쉬운 바나나를 대농장에서 미국 시장으로 향하는 배가 있는 항구까지 빠른 수송을 보장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이에 UFC의 철도운임을 낮추는 것이 가능하게 했다. 다른 기업은 라디오와 전신 회사(Tropical Radio and Telegragh Campany)였는데, 이 기업은 과테말라 통신을 독점했다. UFC의 자회사로서 전기회사는 UFC에 전기를 공급했다. 우비코 정부는 UFC에 많은 이권을 허용했고 과테말라의 중요한 대서양 연안의 바리오스 항구(Puerto Barrios)도 UFC만을 위해서 독점적으로 운영되었다. UFC는 당장 사용하지 않는 공적 토지의 장기임대로 허용받았다. UFC는 우비코 하에서, 수익세, 관세, 수입세 등 과테말라에서 각종 세금에 대한 면세 특권을 누렸다. 게다가 노동분쟁이 발생할 때면, 언제든지 정부는 UFC를 지지했다(Tompkins 1964, 20-21).
그런데도, 많은 과테말라인은 UFC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예를 들면, UFC는 하루에 일당으로 1달러 50센트를 지급하여 비교적 높은 일당이라 볼 수 있지만, 연간 총수입으로 계산하면 낮았는데, 그것은 UFC가 재배하는 바나나의 계절적인 노동수요 때문이다. 즉 1년 내내 일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확기에 많은 노동력이 집중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높은 일당이라 하여도 고용상태는 평균 노동자처럼 지속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바나나 나무를 고사시키는 통제할 수 없는 “파나마병”으로 인해서 새로운 토지에 바나나 나무를 계속해서 다시 심어야 했고, 이에 따라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재배지역을 옮겨야 했기 때문에, 일자리의 안정성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또한 UFC는 수확기에 노동자에게 일주일에 7일 동안의 노동을 요구했고 산발적이고 비조직적인 시위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게다가 UFC는 인종차별적인 정책을 권장했는데, 그것은 모든 유색인이 백인에게 길을 양보하도록 요구했고 백인과 이야기할 때는 모자를 벗도록 요구했다. 또한 노동자는 기억하기를 UFC는 우비코의 농지정책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비코 정부는 반-방랑법에 따라서 농지 없는 지방의 노동자가 다른 사람의 경작지에서 일 년에 150일을 일하도록 요구했을 때, 일반적으로 과테말라 대농장의 지주는 노동자가 자기 가족을 위하여 약간의 토지를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인정하면서, 그들에게 약간의 토지를 할당해 주었는데, UFC는 그러한 규정을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정책은 왜 UFC가 노동문제에 자유롭지 못한지를 설명한다. 게다가 아르벤즈 정부에서 극좌파는 UFC를 지속해서 악의에 찬 선전 운동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전 정부에 의해서 UFC에게 양도한 이권은 착취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과테말라 전국에 있는 UFC 관계망은 제국주의적 탈취로 보였기 때문이다(Tompkins 1964, 21-22).
1951년 아르벤즈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에서 공산주의 활동에 대해서 매우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르벤즈 정부가 공산주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미국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르벤즈의 경제적ㆍ농업적 개혁은 미국기업인 UFC에게 부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1953년 초에 아르벤즈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시행했는데 그때 UFC가 과테말라에서 소유한 총 토지는 57만 에이커였고 그중에서 41만 에이커의 토지를 수용했다. UFC는 소유했던 토지의 85%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경작하지 않는 일부의 토지는 바나나 병에 대한 유일한 수단으로써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서 새로운 지역에 바나나를 다시 심어야 했기 때문에, 파나마병에 대처하는 대비책으로서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UFC는 사전에 정부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의 행위를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Thearle 2012, xiii). 이후 농지개혁법에 따른 토지수용에 대한 보상으로서 보상액 산정은 세금을 과테말라 정부에 내기 위해서 UFC가 직접 평가한 토지의 평가 가치에 따라, 과테말라 정부는 UFC에게 60만 달러를 제시했다. 그러나 UFC는 태평양 연안에서 수용된 토지의 가치만 1천5백만 달러라고 주장했다. UFC는 과테말라의 토지수용에 대해서 미국 국무부가 UFC를 대신해서 개입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써, 과테말라 담당 관리는 농지개혁법에 따라 수용된 토지는 외국인과 내국인 모두 같은 기준을 적용했고 수용된 토지는 무상이 아니라 유상 보상한다고 밝혔다. UFC는 보유한 토지의 보상에 대해서 과테말라 정부는 평균적으로 에이커 당 2.99달러로 보상액을 제시했고, UFC는 에이커당 75달러로 계산했다. UFC는 20년 전에 토지를 살 때, 에이커당 1, 48달러를 냈다(Schlesinger 1982, 76). 어쨌든 UFC는 자신이 평가했던 토지가격의 5%만 보상받았다(Weber 2017, 5). 또한 태평양 연안의 티스키사테 지역에 있는 UFC의 보유토지는 과테말라 정부가 항구를 건설하라고 UFC에 공여한 것이었으나, UFC는 항구건설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즉 티스키사테 지역에 있는 UFC가 보유한 토지는 항구건설을 목적으로 과테말라 정부가 UFC에게 공여한 토지였으나 UFC가 항구건설을 하지 않았으므로 UFC의 토지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UFC가 보유한 대서양 연안의 많은 토지는 불법적으로 취득한 토지라고 밝혔다(Creedon 2019, 18).
1950년 12월에 당선된 아르벤즈 대통령은 토지소유권 제의 개혁을 시도하면서 세계 커피 가격에 대한 경제적 종속으로부터 탈피하고 미국기업이 지배하고 있는 과테말라의 경제 통제력을 회복하려 했다. 그는 이런 목적을 위해서 4개의 중요한 계획을 시작했다. 그것은 ①IRCA의 철도수송독점을 깨기 위해서 대서양 연안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 ②IRCA와 UFC에 경쟁하기 위해서 대서양 연안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는 것, ③UFC의 자회사인 전력회사에 대한 종속성을 축소하기 위해서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것, ④노동과 토지 사용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농업생산을 확대하고 특히 국내적으로 소비하는 식량을 증대시키기 위한 농지개혁을 시도했다. 이 계획의 재정을 위해서 아르벤즈 정부는 수입세와 수출세를 인상했고, 사치품과 주류에 대한 세금을 인상했으며, 소득과 자산 이득에 대한 세금부과 법안을 마련했다(Gordon 1971, 137).
아르벤즈 정부는 외국기업의 독점체제를 해체하기 위한 4개 계획의 일환으로서 UFC의 철도기업인 IRCA에 압력을 행사하면서, IRCA 철도회사가 보유한 독점권을 해체하려 했다. 이에 따라, 아르벤즈는 철도 운영에서 충분한 수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통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철도와 병립하는 고속도로로서 “대서양 고속도로”(Highway to the Atlantic) 건설을 시작했다(Tompkins 1964, 22). 그리고 중미를 관통하는 “미주 고속도로”(Pan American Highway) 건설도 지원했다. UFC는 과테말라에서 수출과 수입에 관한 물류 시설을 독점했는데, 대서양 연안의 바리오스 항구에 있는 철도 종점에 하역시설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수입과 수출에 관련된 물류기업(Great White Fleet)도 소유했다(Moye 2001, 45). 대서양 연안에 있는 UFC 전용 항구인 바리오스의 항구를 견제하기 위해서 산토 토마스(Santo Tomás) 지역에 있는 대서양 고속도로 끝자락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Creedon 2019, 10-11). 게다가 아르벤즈 정부는 UFC의 전기회사에 대한 압박을 가했다. 아르벤즈 정부는 UFC의 전기회사가 사용하는 수자원을 과테말라가 건설하는 수력발전소가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했다(Tompkins 1964, 22). 아르벤즈의 독점 해체 개혁은 미국의 이익을 축소했다(Creedon 2019, 10-11). 이처럼 UFC 보유토지의 상당한 규모의 수용과 낮은 토지 보상 그리고 UFC 관련 기업의 독점 해체는 UFC가 미국 정부가 과테말라 쿠데타에 개입하도록 만든 요인이었다.
과테말라에서 노동조건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이래로 변하지 않았다. 과테말라 경제는 농업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이익을 내는 농업은 값싼 노동력인 원주민에 특히 의존적이었다. 과테말라에서 경제적 번영은 원주민에게 행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었고, 원주민에게 복지를 거의 제공하지 않았으며, 원주민에게 식민시대의 복종체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즉 과테말라 농업은 노동집약적 특징을 갖고 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이후 과테말라의 농업노동자에 대한 대우는 별로 변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원주민 노동력이 스페인 식민시대의 강제노동 체계인 엔코미엔다(Encomienda)에 의해서 아직까지도 대농장에 메여있었기 때문이다. 엔코미엔다는 농업노동자인 원주민에게 강제노동을 요구하는 제도였다. 식민시대 과테말라의 자연염료인 인디고 산업에서 대규모 노동자가 필요했고 엔코미엔다는 대농장 지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이후 스페인 왕실은 엔코미엔다가 식민지에서 지주 세력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염려하여 “만다미엔토”(Mandamiento)라는 제도를 발전시켰는데, 만다미엔토는 원주민 통제를 대농장 지주가 행사했던 것을 대신해서 스페인 식민정부가 원주민 통제를 직접 행사하는 것 이외에 엔코미엔다와 차이가 없었다. 즉 과테말라의 만다미엔토는 남미의 레파르티미엔토(Repartimiento)와 미타(Mita)와 비슷한 제도이다. 과테말라가 1824년 모든 인간은 자유롭다고 선언했고 모든 종류의 노예제를 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주민 농업노동자가 싼값에 강제적인 노동을 제공케 하는 만다미엔토는 유지되었다. 이후에 아닐린(Aniline)이라는 인공 염색재료가 만들어지면서 과테말라의 자연염색 재료인 인디고 시장이 붕괴했다. 바리오스(Justo Rufino Barrios 1871-1885) 대통령은 생산 품목을 전환하기 위하여 인디고 생산에서 커피 생산으로 공식적인 권한을 사용했다. 단기에 과테말라는 고품질 커피 생산의 주요한 생산국이 되었다. 이 생산의 전환 시기에 지방의 관리자인 “정치 책임자”(Jefes Politicos)를 통해서 원주민의 노동을 엄격히 통제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정부는 대농장 커피 지주에게 원주민 노동력을 충분히 제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바리오스 대통령은 지방의 중간 관리자인 정치 책임자에게 지시해서, 의무를 회피하는 원주민에게 법이 정한 최고형으로 처벌하고 원주민이 가능한 많은 시간의 노동을 강제하도록 했다(Tompkins 1964, 23).
바리오스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만다미엔토를 폐지했지만, 실제로 만다미엔토는 계속해서 실행되고 있었다. 1909년에 특별재판소가 설립되었는데, 그것은 대지주로부터 돈을 빌린 이후 빚을 갚지 않고 도망 다니는 원주민을 기소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특별재판제도는 지방의 정치 책임자가 해결하던 사인을 대신해서 사법부가 직접 맡아서 처리하는 제도로서, 이 제도는 원주민을 위한 제도라기보다는 대지주를 위한 제도였다. 1934년에 추가적인 법은 대규모 농장 지주를 위해서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하겠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에 “반-방랑법”을 제정하면서 원주민농민의 노동의무를 만들었다. 반-방랑법은 하루에 일당을 5센트로 계산하면서, 1년에 150일을 강제적으로 커피농장에 노동을 제공해야 했다. 게다가 국가 도로 건설을 위해서 3주 동안 무료로 국가에 노동을 제공해야 했다(Gordon 1971, 132). 1934년 이전에 빚을 지지 않았던 원주민은 비록 고용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도 정부의 괴롭힘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러나 새로운 법인 반-방랑법은 모든 사람은 고용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노동을 강제했다. 만약, 고용상태를 유지하지 않고 있는 자는 방랑자로서 유죄판결을 받으면, 그에 대한 처벌로서 30일 동안 구류에 처하게 된다. 이후에 또다시 반-방랑법을 위반하게 되면, 한 달을 더 부과하여 처벌하는 우리나라의 가중처벌을 부과했다. 즉 반-방랑법은 부작위에 의한 부작위 범죄자를 양산했다. 반-방랑법을 보증하기 위해서, 노동부는 행정적으로 경찰의 사무에 참여했다. 농장노동자는 고용주에 의해서 고용조건이 명시된 일종의 “노동 카드”로서 리브레토를 소지하고 다니도록 요구되었다. 만약 노동자가 일 년 동안 고용상태를 나타내는 리브레토를 보여주지 않으면, 방랑자로서 기소될 수 있었다. 과테말라에서 노동법의 역사는 적어도 20세기 중반까지, 원주민과 정부 사이에 지속적인 긴장 관계에 있었다. 원주민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전통적인 자급자족의 문화 안에서 단순하고 고립적인 삶에 만족했고, 가능하다면 원주민이 아닌 사람을 피하려 했다. 다른 한편, 정부는 고립된 원주민을 핵심적인 노동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반-방랑법을 제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원주민은 어느 정도 법을 우회하고자 했다. 예를 들면, 모든 농업노동자에게 요구되었던 리브레토 소지를 피하려고 많은 원주민은 제도가 완비될 때까지 자신을 “돌아다니는 상인”(Traveling Merchant)이라고 주장하면서 강제노동을 피하려 했다(Tompkins 1964, 24).
1944년 혁명 때까지, 과테말라 정부는 모든 종류의 노동조직을 금지했다. 그러나 개혁 정부는 노조결성을 권장했고, 반-방랑법을 폐지했다. 이에 개혁 정부는 공식적으로 도시노조를 빠르게 창립했다. 농업노동자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 오랜 기간이 필요했고 대부분은 도시의 활동으로부터 고립된 문맹자였다. 그런데도, 1952년 정점에 이른 농업노동자 노조는 20만 명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 숫자는 도시노동자 조직의 2배였다. 그러나 지적해야 할 것은, 지방의 농업노동자 노조는 느슨하게 조직되었고 노조 지도자는 도시노조보다 활동에 있어서 영향력이 적었다. 따라서 구성원 숫자는 정확한 영향력의 측정 수단이라 볼 수 없다. 아레발로 정부는 대지주의 협상력과 개인 노동자 협상력 사이에 불균형을 1944년 이후 시정하려고 했다. 1947년 “사회보장제”와 노동법 통과와 함께, 정부가 노동자를 지지했고, 이에 따라 외국기업 관리자와 대지주는 정부가 과거처럼 더 이상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새로운 노동법이 이제는 외국기업에 이익이 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새로운 노동법은 도시와 지방 노동자가 노조를 조직하고, 협상하며, 시위하는 권리를 허용하면서, 도시노동자에게 주어진 혜택을 지방의 노동자에게도 확대했다. 노동자의 건강과 경제적 안정을 향상하는 노동자 보상, 출산수당, 직업재활, 사고 예방 등을 사회보장제에 포함했다. 사회보장제의 혜택은 과테말라시에서 서서히 시작되었고 이어서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대부분은 중요한 도시와 가장 큰 농장으로 확대되었다(Tompkins 1964, 25). 이처럼 노동조건의 측면에서, 1944~1954년 “10년의 봄”기간 동안 노동자에게 유리한 제도가 설립되면서, 기존의 토지 과두 세력과 외국기업의 이익이 하락하게 되었다. 이에 아레발로와 아르벤즈 정부의 개혁적인 노동정책은 1954년 쿠데타 발생에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되었다. 노동자에 대한 많은 혜택은 1954년 아르벤즈 정부 전복 이후에 폐지되었다.
3.3 대외적 측면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개입 작전(PBSUCCESS)은 군사적 침공으로서 단순히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전략가는 미국의 직접적 군사개입 방식을 두려워했는데, 그것은 직접적인 미국의 군사개입은 라틴아메리카 내에서 미국에 대한 신뢰성을 약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은밀한 방식의 개입을 선택했다. 미국의 작전은 아르벤즈 정부로부터 과테말라 군부를 분리하려는 것이었다. 미국 CIA는 강력한 선전 운동과 과테말라 농산물 수입제한을 조합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작전은 과테말라 군부가 아르벤즈 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미 CIA는 과테말라 장교에게 매달 1만 달러를 지급하려는 뇌물을 준비했었다. 그리고 미 CIA는 실제로 아르벤즈에게 대통령직을 그만둘 것을 전제로 하여 뇌물제공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런 과정에서, 아르벤즈는 자신에 대한 신뢰성, 정당성을 약화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인지했다. 이런 관점에서 미국이 아르벤즈의 무기 구매 요청을 거절했을 때, 아르벤즈는 소련제 무기수임을 시도하면서 군 지도부의 지지를 확실히 하려 했다(Fisher 2012, 9).
1954년 5월 미국 국무부는 체코의 배가 무기를 선적하고 과테말라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고, 이에 따라, 미국 국무부는 소련의 행동을 비난했으며, 체코의 배에 “원자폭탄” 선적 가능성을 언급했다. 과테말라 주재 미국대사 푸리포이(Peurifoy)는 과테말라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 개입을 요청하면서, 1954년 5월 24일 미 해군은 과테말라 해역을 차단했다(Fisher 2012, 9). 다른 한편, 과테말라의 무기수입과 함께, 온두라스와 니카라과도 과테말라의 침공에 직면해 있다고 과테말라를 비난했다. 이런 상황은 과테말라에 대한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는 니카라과와 온두라스에 미국이 무기를 제공할 수 있는 구실을 주었다. 실제로 과테말라는 미국, 라틴아메리카, 유럽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기 위하여 여러 해 전부터 시도했으나, 미국이 과테말라의 무기구입을 철저히 방해했다. 미국의 무기 구매 거부 운동은 과테말라의 경찰을 위한 권총도 사지 못했고 “사냥과 낚시 클럽”에서 취미로 사용하는 소규모 탄약을 사는 것조차도 구매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은 폭력으로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드러내 놓고 니카라과와 온두라스에 무기를 제공하고 있었다. 과테말라 정부는 세계의 어떠한 국가라도 자유롭게 무기를 거래할 정당한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다. 세계는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고 주권국가의 정당한 행위를 통제하려는 미국 정부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했다. 과테말라의 반공주의자 사이에서조차도, 아르벤즈의 무기 구매 권리의 주장은 지지를 얻었다.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유럽도 그러한 관점을 공유했다. 과테말라가 침공당하기 이틀 전, 워싱턴은 과테말라의 무기 봉쇄를 위해서 “자유로운 세계의 해상국가들”에 공개적으로 공해상에서 선박에 대한 우호적인 조사를 미국에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모든 유럽 정부는 그러한 미국의 요구에 대해서 거부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바다에서 전통적인 자유의 권리를 억제하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1954년 6월 19일 자 “타임스”(Times)에 의하면, 대서양은 미국 국무부 장관인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사유물이 아니라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 정부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비난했는데, 유럽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과테말라 정부가 공산주의자라면, 그것은 과테말라의 권리라는 입장이다(Gordon 1971, 145).
미국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개입주의에 이념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지만,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선린정책에 기초한 비개입주의를 보다 지지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1952년 대선 운동 중에 트루먼의 소극적인 관여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대외정책 변화를 약속했다(Fisher 2012, 5).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과테말라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아르벤즈 정부가 공산주의자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 정부의 과테말라 쿠데타 계획(PBSUCCESS)의 기획자인 스티븐 레베(Stephen Rebe)는 라틴아메리카 국가 내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소련의 전 세계적 활동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고 했다. 미 국무부는 아르벤즈 정부의 전임 정부인 아레발로 정부를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극좌파로 판단했으나 미 CIA는 아레발로 정부가 미국의 안보 이익에 잠재적인 위협이라고 경고하면서 아레발로가 공산주의에 더 동정적이라고 판단했다. 아레발로에 대한 잠재적 공산주의의 영향력은 아르벤즈 선거 이후에 증가했다고 보았다. 아르벤즈 대통령 취임 3개월 후에 미국 국무부는 아르벤즈 정부가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판단했다(Fisher 2012, 6). 1953년과 1954년에 반공주의는 아이젠하워 미 정부의 라틴아메리카 대외정책의 중요한 특징이었는데, 이에 따라 1953년 가을부터 미 정부는 아르벤즈 제거를 위한 계획을 시작했다(Fisher 2012, 7).
아이젠하워 미 정부는 국내 정치에서도 1952년 대선 운동에서 민주당보다 공산주의에 대해서 보다 강력한 정책을 약속했다. 트루만 정부의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에 의존하는 대신에, 아이젠하워는 소련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차단하는 강력한 정책을 취하겠다고 했다. 1953년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아이젠하워 정부에 대한 정치적 압력이 증가했고, 다른 한편으로, 1953년 여름에 재임 승산이 없음을 알았고 아이제하워는 실망했으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완화하기 위해서 외교정책의 승리라는 업적이 필요했다. 아이젠하워 관점에서, 미국의 국제적 신뢰, 아이젠하워의 개인적 지도력, 그리고 국내외적으로도 성공적인 임기를 위한 전망에서도 아르벤즈의 제거가 요구되었다. 게다가 아이젠하워는 실제로 아르벤즈가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자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런 판단으로 인해아이젠하워는 1954년 과테말라 개입 작전을 시작하게 되었다(Fisher 2012, 8).
한편, UFC와 IRCA에 반대하는 파업이 과테말라에서 여러 해에 걸쳐서 발생했다. 1948~1949년 파업에서 과테말라 정부는 노동자의 편에 있었다. 1954년 쿠데타가 발생하기 전에, 미 의회에서 보스턴 출신의 정치인이 이런 과테말라 정부를 비난했다. UFC는 보스턴 제일은행(Boston's First National Bank)과 올드콜로니 신탁회사(Old Colony Trust Company)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보스턴 제일은행은 UFC의 주거래 은행이었고 올드콜로니 신탁회사는 UFC의 선적대리인 회사였다. UFC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입법부의 정치인이 과테말라 정부를 비판하면서, UFC를 지지했다. 예를 들면, 1949년 2월에 공화당 상원의원 헨리 로지(Henry Cabot Lodge)는 상원에서 과테말라 노동법이 UFC를 차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비난했다. 일주일 후에 다수당인 민주당의 지도자급 의원인 존 맥코맥(John McCormack)도 미국인 회사라는 이유로 UFC를 부당하게 대하려는 과테말라의 정치인을 비난했다. 보스턴 출신 공화당 하원의원인 크리스챤 허터(Christian Herter)도 미국기업을 차별하는 국가에 미국의 자금지원을 차단하는 법을 도입하겠다고 위협했다(Gordon 1971, 40).
이후에도 과테말라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미 외교정책 담당자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당시에 미국의 중요한 외교정책 담당자는 UFC의 법적, 재정적, 정치적 영향권에 있었다. 당시 미 국무부 장관인 덜레스의 법률회사는 1944년 과테말라 독재체제에서 UFC를 대표했고 IRCA에 법률적 조언자 역할을 했다. 중남미 담당 미 국무부 차관보인 존 캐벗(John M. Cabot)은 보스턴 제일은행의 책임자인 토마스 캐벗(Thomas D. Cabot)의 형제였다. 국가안보 관련 대통령 보좌관이자 국가안보위원회(National Security Council)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연락관인 커틀러(Robert Cutler)는 워싱턴에 임명되기 이전 올드콜로니 신탁회사의 사장이었다. 올드콜로니 신탁회사의 이사회 의장은 또한 UFC의 이사회 의장이었다. 1956년 아르벤즈 정부 붕괴 이후, 커틀러는 올드콜로니 신탁회사의 이사회 의장으로서 복귀했다. 상무부 장관인 싱클레어 위크스(Sinclair Weeks)는 그가 행정부에 있기 전후로 보스턴 제일은행의 책임자였다. 아르벤즈 정부 전복계획에 참여했던 미국의 코스타리카 대사였던 힐(Robert D. Hill)은 1953년 후반에 미국대사로 임명되기 전에 “W.R. Grace and Company”의 부사장이었는데, 이 기업은 과테말라와 교역에 적극적이었고 혁명 정부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힐은 이후에 UFC의 책임자가 되었다(Gordon 1971, 141).
과테말라 쿠데타 침공 전에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1954년 3월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개최된 제10회 미주대회(Inter-American Conference)에 미 국무부 장관이 참석했는데, 그의 목적은 아르벤즈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서, 라틴아메리카에서 공산주의를 고립시키고 반공을 위한 미국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Loaeza 2015, 728). 이에 과테말라 외교부 장관은 대중의 진보에 반대하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 반공의 이념을 사용하면서 빅스틱(Big Stick)과 달러외교를 하고 있다고 미국을 비난했다. 미국이 제안한 결의안은 통과되었으나 라틴아메리카 인구의 1/3을 대표하는 아르헨티나, 멕시코, 과테말라는 결의안에 반대했고 2개의 다른 국가는 온건한 저항으로서 기권했다(Schlesinger 1982, 12). 과테말라는 주권 침해라고 비판하면서, 미국의 개입 권리를 부정했다(Gordon 1971, 144).
과테말라 내에서, 미주대회에서 미국의 결의안이 통과되는 것을 보고서 과테말라에 대한 미국의 적대감에 아르벤즈를 지지하던 중간계급은 당황했고 그에 따라 과테말라가 외교적인 고립국가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워싱턴의 적대감을 둔화시키기 위해서 아르벤즈는 정부와 UFC 사이에 차이점에 대한 협상을 제안했고 온두라스와 비-공격 합의에 서명을 제안했다. 아르벤즈는 아이젠하워와 대면적인 만남을 요구했다. 그 제안은 거부되었다. 워싱턴은 과테말라 정부의 파괴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테말라와 협상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반대로 증가하는 국내적ㆍ대외적 압력은 아르벤즈로 하여금 자신의 개혁정책 대신에 공산주의에 대한 열정을 더욱 증가시켰다. 1954년 의회에서 행한 정기적인 연설에서 아르벤즈는 과테말라에서 공산주의자가 합법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공산주의자를 고립시키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혁명 정부에 의해 처벌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아르벤즈 정부에 대한 ‘무력’이라는 방식의 쿠데타 침공은 반대 세력이 ‘정치적으로’ 아르벤즈 정부를 패배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Gordon 1971, 146).
이처럼 대외적인 요인으로서 과테말라에 대한 군부 쿠데타에서 미국의 개입요인은 첫째, 아르벤즈 정부가 소련의 영향을 받는 공산주의 정부라는 인식이 작용했다. 둘째, 당시 매카시의 열풍으로 공산주의는 미국의 안보 이익에 잠재적인 위협이 존재하고, 미국 정부의 중요한 대외정책의 특징으로서 반공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셋째, 아이젠하워 정부가 재임 승산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을 완화하기 위해서 외교정책의 성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넷째, UFC가 입법부와 행정부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여 과테말라에서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려 했기 때문이다.
Ⅳ. 도전과 한계
대외적 요인으로서, 1954년 과테말라의 군부 쿠데타에 미국이 개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3개의 관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현실주의적(Realist) 관점, 수정주의적(Revisionist) 관점, 후기 수정주의적(Postrevisionist) 관점이 있다(Streeter 2000, 63-64). 현실주의자는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의 원인으로서 공격적이고 확대 지향적인 소련의 냉전을 비난한다. 왜냐하면 현실주의자는 아르벤즈 정부가 소련의 괴뢰정권이라 믿었고,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아르벤즈 정부를 붕괴시켰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주의자는 1950년대 냉전체제에서 소련을 비난한다면, 수정주의자는 냉전체제의 다른 한 축인 미국을 주로 비난하는 관점으로서, 외국 투자를 진흥하고 해외시장을 확대하려고 하는 미국을 강조한다. 수정주의자는 아르벤즈가 민족주의자이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보았다. 수정주의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시장의 주도권 적 통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미국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즉 수정주의자는 과테말라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유는 미국이 UFC를 구하려는 경제적 제국주의의 중요한 사례로 보고 있다. 중미는 자본투자와 수입(Imports)처로서 그리고 수출시장으로서 미국과 경쟁할 상대가 없었다. 실제로 미국은 세계의 다른 지역보다는 중미 지역에 많이 투자했다. 이런 관점에서 과테말라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미국기업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 공산주의(이념)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1954년 워싱턴에서 대외정책 담당자의 여러 중요한 인물이 법적ㆍ재정적ㆍ정치적으로 UFC와 개인적 관계가 있었다(Tassell 1993, 265). 후기 수정주의자는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에 미국이 개입한 이유를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다는 어려움을 주장하는 관점이다. 후기 수정주의자는 미국의 개입을 재촉한 것은 UFC 또는 경제적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정치적ㆍ전략적ㆍ심리적ㆍ이념적 요소의 조합 때문이라고 보았다(Weber 2017, 7-8). 후기 수정주의자는 소련 책임론 입장에서는 아르벤즈 정부가 공산주의의 괴뢰정권이었기 때문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설명방식(현실주의적 관점)보다는 미국 정부가 UFC 이익을 위한 경제적 제국주의였기 때문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설명방식(수정주의적 관점)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 위협론의 입장에서는 아르벤즈 정부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였다면 미국 정부의 엘리트가 아르벤즈 정부를 공산주의자로 잘못 인식했던 문화적ㆍ이념적 영향을 설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후기 수정주의자에 따르면, 아이젠하워 정부가 아르벤즈 정부를 지지하지 않고 등을 돌렸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아이젠하워의 정부가 아르벤즈 정부를 민족주의자라고 보기보다는 공산주의로 보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후기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미국의 국내정치적 요인도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과테말라에 대한 미국의 개입요인으로서 국내정치적 요인으로서도 설명하자면, 당시 미 상원의원인 조제프 매카시(Josep MaCarthy)와 매카시즘은 아이젠하워 정부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조제프 메카시는 1950년대 초기에 미국정치를 지배했던 냉전체제에서 반공을 중시했던 정치세력을 대표했고 정치적 우파와 미국 대외정책을 이끌었다. 게다가 매카시즘(MaCarthyism)은 수천 명을 숙청했고 수십만 명 이상을 위협했다(Tassell 1993, 267).
위의 설명방식에서 현실주의적 관점인 아르벤즈 정부가 공산주의 정권이었기 때문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관점에 반박하는 관점도 있다. 1920년대 이래로 과테말라에서 공산주의자의 활동이 존재했으나, 우비코의 무자비함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1934년 이후에 생존이 어려웠다. 1945년 헌법은 국제적 관계를 맺은 정당을 금지했고 소련과 외교관계도 금지했다(Leonard 1990, 178). 하지만 아르벤즈 정부는 과테말라노동당(PGT)을 합법화했고 미국 정부가 선호하는 것에 도전하는 독립적인 대외정책을 시도했다(Denise 2015, 74). 다른 한편, 과테말라에서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은 미미했고 아이젠하워 정부는 아르벤즈의 민족주의를 공산주의로 잘못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 정부가 중미의 소국에서 발생하는 공산주의 위협을 과도하게 평가했다는 증거로서, 과테말라노동당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과테말라 사회의 강력한 보수주의적 성격을 간과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다른 전문가는 과테말라에서 공산주의 영향력은 이전의 공산주의보다 더 광범위했으나, 소련은 과테말라노동당과 어떠한 관련도 없었다는 것이다(Denise 2015, 76). 소련은 1954년 아르벤즈와 관계가 없었고, 과테말라에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Weber 2017, 7). 1954년 미국 국무부 차관보인 헨리 홀랜드(Herny Holland)는 언급하기를 극좌파 정당과 공산주의 사이에 구별은 자주 유동적이기 때문에 좌파 지도자에게 공산주의 꼬리표를 붙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아이젠하워 정부가 제삼 세계의 민족주의와 국제공산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았다(Leonard 1990, 169).
이런 대외적 요인 외에도, 대내적 요인으로서 사회문화적 요인, 농지개혁법, UFC, 노동조건을 이미 앞에서 분석했고 이장에서는 특히 가톨릭교회라는 요인을 첨가하려 한다. 비록 가톨릭교회가 식민시대와 독립 초기에 과테말라에서 막강한 권한을 유지했지만, 1870년대 자유주의 세력의 개혁은 약 60년 동안 심각하게 교회의 위상을 제한했다. 제도로서 가톨릭교회는 1931~1944년 동안 우비코 체제하에서 보다 많은 자유를 경험했지만, 다른 전문가는 주장하기를 교회-국가의 관계는 혁명 기간(1944-1954)에 관계가 다시 악화하였다는 것이다. 아레발로와 아르벤즈 정부는 가톨릭 신부의 특권을 계속 거부했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 사이에 마찰이 발생했고 그것이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과테말라의 개혁 정부는 보수적인 교회에 계속해서 반대했다. 가톨릭교회도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신부의 특권 부정으로 인해서 대주교와 낮은 서열의 신부나 일반 평신도 지도자도 개혁 정부에 지속해서 반대했고 이것이 1954년 쿠데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Pattridge 1994, 527-529).
Ⅴ. 결론
1950년 대선에서 아르벤즈는 압도적인 선거 득표 차이로 대선에서 승리했다. 이것은 1954년 군부 쿠데타의 내부적 요인이라 할 수 있는데, 즉 이것은 아르벤즈 정부의 개혁에 반대하는 과두 세력이 선거라는 공식적인 제도를 통해서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고, 결국 아르벤즈 개혁 정부에 반대하는 방법은 불법적인 쿠데타의 방식밖에 남지 않았다. 스페인의 식민시대와 독립 이후에도 400년 동안 과테말라를 지배했던 지배 세력으로서 과두 세력은 1944~1954년 개혁 정부 동안에 큰 피해를 보았다. 이에 과두 세력은 개혁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당시 미주 대륙은 미국을 중심으로 반공이 중요한 정책이었다. 이에 과두 세력은 미국의 대내외적인 상황을 이용하여 미국의 도움으로 1954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개혁 정부를 붕괴시켰다. 이후 과두 세력은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과두 세력은 1960년 이후 피지배 계급인 게릴라 세력과 원주민ㆍ농민 사이에 36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유지했다.
1944~1954년 동안 개혁 정부는 토지개혁을 통해서 소유권을 원주민이나 농민에게 양도한 것이 아니라 대지주 또는 국가 소유의 토지를 임대하는 방식이었다. 임대 방식에서도 결정적인 실수는 오랫동안 토지를 요구했던 원주민이나 농민이 아니라 당시 우연히 그 토지에 살고 있었던 농업노동자에게 배분하여 갈등이 발생했다. 중미에서 특히 과테말라는 토지가 비옥해서 마야문명이 생성되었던 지역이다. 이에 원주민과 농민에게 토지는 단순한 경제적 의미만이 아니라 각별한 역사적ㆍ사회적ㆍ문화적 의미가 있다. 따라서 과테말라에서 토지에 대한 경제적 의미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깊이 고민하고 토지 임대 방식이 아닌 토지소유권 양도가 농지개혁에 더 의미가 있었을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후 내전이 36년간 지속될 정도의 저항이었기 때문에 토지를 요구했던 원주민과 농민에게 토지소유권을 양도했다면, 개혁 정부가 쉽게 붕괴되지 않았을 것이다. 코스타리카는 중미에서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정치문화를 보여주었는데, 그 핵심에는 코스타리카의 토지가 전반적으로 과테말라 토지보다 비옥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시대부터 엘리트는 토지에 관심이 없었고 이에 따라 오래전부터 많은 농민이 작은 규모이지만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 코스타리카에서 평등주의적 사상과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을 발달시켰다(김달관 2004). 이것을 고려하면, 과테말라 농지개혁의 핵심은 토지 임대가 아니라 토지소유권 양도가 더 적합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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